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7화 (17/244)

17- 계열사를 노리는 자들.

재환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번에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대형 국책은행이었다.

중앙산업은행.

당대 금융계는 조상제한서[조아은행-상업중앙은행-제중은행-한양은행-서울종합은행]와 국책은행인 대한산업은행과 대한기업은행이 있었다.

둘 다 재벌 대기업들과 아주 긴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지금 친해져야 할 것은 국책은행이었다.

“어서 오세요.”

“혜성의 신재환이라고 합니다.”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구 선언 이야기도 멋졌고요.”

재환을 만난 이는 대한산업은행의 상무 윤기철이었다.

나이는 40대 중후반 정도에, 깔끔한 정장에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큰 안경을 쓴 금융인의 모습이었다.

악수했을 때 향수 냄새가 확 풍기는 걸 보니 담배는 태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저희가 혜성그룹과는 많은 인연을 가졌습니다.”

“네, 국가만큼이나 언제나 저희 혜성의 발전을 위해 융자를 많이 해주셨죠.”

“하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융자부 과장 시절부터 혜성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게 벌써 20년이나 되었군요.”

윤기철 상무와 혜성의 과거 이야기를 나눈 재환은 이 사람이 ‘나는 친 혜성파다.’라는 것을 재환 앞에서 부각하고 있었다.

이런 유형이라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금칠해주는 말을 한 다음에 ‘미안하지만, 더 이상의 관계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힘 좀 써볼 테니 성의 좀 보여달라.’라는 것일 거다.

‘돈 필요해 보이지는 않을 것 같네? 국책은행의 융자부라고 하니 기업 대출 관련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다른 생각으로는 이것일 것이다.

재환은 그것을 위해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윤 상무님,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지금 대한산업은행에 관한 건데 괜찮습니까?”

“음, 아~ 네. 이야기하세요. 제가 아는 일이라면 기꺼이 대답하겠습니다.”

“금융위에서 저희 혜성건설 매각 건 가지고 인수 논의가 오갔습니까?”

“?!”

정곡을 찔린 것인지 움찔하는 기철이었고, 재환은 역시 그거였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네요. 혜성건설을 산업은행 산하에 두시기라도 하려나요?”

“···하, 하하! 천천히 말하려고 했는데 눈썰미가 아주 좋으시군요.”

기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실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현재 혜성건설이 우리 중앙산업은행에 채무로 1500억가량 됩니다.”

“에이~ 은행원이신데 반올림 잘 해주셔야죠. 1418억인데 그게 왜 1500억입니까?”

“아, 네··· 정정하겠습니다. 1420억에 육박합니다.”

어쨌건 꽤 큰 금액이었다.

이 정도라면 매각을 진행해도 혜성건설을 소유한 회사는 채권문제로 골치 좀 썩힐 거다.

‘일시금으로 징수할 건 아니니 적당히 융자 연장기한 늘려서 매출수익으로 돌리면 되겠지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혜성건설에 대해서 융자 채무 금액을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럼 은행이 혜성을 인수하시려고 합니까?”

“···상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렇군요.”

훗날 대한산업은행은 혜성뿐만 아니라 아성그룹과 대윤그룹에도 융자를 회수하지 못해 두 회사의 건설사인 아성건설과 대윤건설에 대해 법정관리를 하여 고액에 매각해 공적자금 투입을 메꿔냈다.

‘아성과 대윤 이전에 혜성건설을 중앙산업 산하에 두겠다라··· 내키지는 않는데?’

은행하고 거래를 하면 빌릴 때는 큰돈이 나와도, 매각논의를 한다면 재미를 못 본다.

분명 매각대금도 채무를 까면서 시작해 소규모일 테고, 완전 인수가 아니라 지분 50% 전후로 가지면서 공기업처럼 관리하다가 경기가 살아나면 몇 배의 웃돈을 받고 파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 탕감이라··· 지금은 좋은 방법이 아니야.’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금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재환은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일단은 저 혼자서 진행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의상 정중한 거절을 에둘러 표현한 재환이었지만, 역으로 기철이 달려들었다.

“공기업에 준하는 대우이니 임직원들 처지에서도 협상이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네, 하지만 경영자로서는 채권단에게 회사 넘어가는 것은 악수로 보이기 때문에 혜성그룹 내에는 악재가 될 겁니다.”

어차피 은행이 무슨 건설에 대한 원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 인수하겠는가?

채권단이 적당히 구조조정을 하고 그럴듯한 기업으로 만든 다음 팔아넘길 목적, 거기에 잠시 공기업의 혜택을 조금 누리는 정도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다음번에 또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재환은 기철과 인사를 나눈 뒤에 대한산업은행을 나섰다.

훗날 이곳이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대기업 계열사의 채권을 가지고 ‘한국자산관리공사’라는 무시무시한 전담기구로 돌아오는 게 2년 뒤였다.

“이건 바로 아버지에게 말해야 하겠다.”

차를 타면서 재환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첫째, 아버지가 그냥 현금 쌓는 거 대신 채무를 지우는 쪽으로 가자며 받아들인다.’

만약 이걸 선택한다면 재환은 다시 아버지랑 사업하겠다는 계획을 접어버릴 거다.

그리고 자신이 독립해서 현규랑 약속한 디스램 매각대금으로 새 사업을 혼자 할 것이다.

‘혜성 몰락하면 그 상표권은 인수할게요. 그리고 제가 집에서 모시죠.’

물론 이 건은 하책 중의 하책이니 아버지가 최소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조금 현실성이 있지. 내가 아니라 김범준 대표 통해서 매각 건을 진행하고, 아버지는 반대하지만, 이사회가 올라올 때.’

그러면 명백한 등기이사들의 배신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겐 상관없을 거다.

산업은행하고 딜만 잘 한다면 그들은 공기업 산하 임원이라는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는 아버지가 움직여 줘야 해. 그리고 사전에 김범준 사장하고 이야기를 해야겠고.’

하지만 마지막 문제는 가장 큰 난관일 것이다. “그건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는 일이지···.”

그 순간 벌써 자동차는 남영동에 도착해있었다.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요?”

하긴 여의도에서 용산이니 단거리긴 했다.

“후우~ 시작해 볼까?”

재환은 넥타이를 고쳐매면서 혜성빌딩을 올려다봤다.

***

“뭐?”

“말한 그대로예요. 대한산업은행이 그런 짓을 했습니다.”

은행이 혜성건설을 가지겠다는 말에 희경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지며 서서히 분노가 예열되는 게 보였다.

그 분노는 과연 어디에서 터질지 재환이 궁금해할 때, 희경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후우, 기어이 그렇게까지 됐나.”

한숨을 푹 쉬던 희경은 들고 있던 신문을 가지고 재환이 앉은 책상 앞에 던졌다.

착-

신문기사에는 아주 강렬한 문구가 있었다.

[사상 최악의 건설사 부도 릴레이.]

[도급순위 5위인 상윤건설마저 법정관리 신청! 채권자인 기업은행이 나서···]

“아이고야. 기어이 쌍륜도···.”

원래 이름은 쌍륜이지만, 센발음이 듣기 안 좋다 해서 고쳐진 이름 상윤그룹.

재계서열 6,7위를 오가며 시멘트, 건설, 중공업, 물산, 자동차, IT, 석유화학까지 안 하는데 없었던 문어발식 경영으로 유명했다.

‘아, 석유화학하고 물산은 쪼끔 아쉽지만, 지금 살 여력이 없다.’

재환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 희경은 그 표정은 못 보고 신문만 넘겼다.

“상윤건설 이전에 남부토건, 청솔건설, 동방건설, 서울건설···.”

전부 부도처리로 날아가 버린 건설사들이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겠냐?”

희경의 질문에 재환은 느긋하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비싼 돈 준다는 곳에 기업 규모 생각 안 하고 넘겨야겠죠?”

“하~ 그게 진짜··· 좀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대기업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희경에게 재환은 좀 더 다그치기로 했다.

“선택은 아버지의 몫이에요. 자존심이랑 돈 중에서 뭐가 더 남을 건지 말이죠.”

점점 몰아붙이는 아들에게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희경은 담배만 문 채로 라이터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혜성의 창업주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의 상황은 인생에서 숙여야 하는 때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재환은 조용히 일어나 품 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서 아버지가 문 담배에 불을 붙여 들었다.

띵- 치익-

손가락으로 한 번 튕긴 다음 불이 붙자 희경은 길게 한 모금 내뱉은 다음 고개를 저었다.

“···김범준이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네, 그렇게 하세요.”

“물론 더 좋은 조건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건··· 아직 유효해. 그러니 마이다스던 어디든 가장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봐.”

결국, 희경이 아들에게 맡기고 한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재환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갈 준비를 했다.

“그것만 지켜주셔도 충분해요. 그럼 이만 움직이죠.”

재환은 좀 더 바쁘게 움직일 셈이었다.

***

[아따 벌써 몇백 번은 들은 말 같네? 나가 건설회사 노리는 건 혜성 하나밖에 없다고 말 안했소?]

TV에는 마이다스의 오현우가 나와 기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혜성건설은 자신이 인수하겠다며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다.

[긍께 이번 기회로 우리 마이다스가 서울 진출을 하는거여! 그리들 알아 두라고!]

“연기 좋고~ 임팩트 있고~”

재환은 TV 앞에서 마이다스 오 회장의 반응을 보고 웃으며 캔맥주를 깠다.

지금까지는 재환이 조언해준 대로 아주 잘 해주고 있었다.

‘뭐여? 나더러 텔레비전에 나와서 막 날뛰라고?’

‘시끄러울수록 좋아요. 사장님의 의지대로 나는 이 회사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를 보여주세요. 마이다스가 어떤 곳인지도 신문 인터뷰 많이 하시고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있는겨?’

‘네~ 많이 달라질 겁니다. 일단 마이다스 건설이 어떤 회사인지 서울사람들이 알 테니까요.’

일단 그렇게 해서 충실히 언론을 이용하는 마이다스 오 회장을 보고 재환은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여보세요? 오 사장님.”

[아따, 며칠 안 됐는데 겁나 반가운 목소리쇼잉~]

언제 들어도 걸걸한 사투리를 듣고서 재환은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다른 곳에서 인수 논의가 나오고 있다는 걸 제가 회장님을 설득해서 붙잡고 있습니다.”

[아, 그려요? 어째 잘 되려는지 모르겠소.]

“일단 최대한 협상을 할 겁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그것’은 잘 준비됐습니까?”

재환은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조건을 걸었다.

채권이나 주식을 매매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것으로 거래하게 했다.

[아, 달러 말이죠? 준비한 대로 긁어모으기는 하겠는디, 워째 서양 돈으로 거래하실라 그러시우?]

“말씀드렸잖습니까? 혜성의 해외 진출과 앞으로의 시국 때문에 달러가 더 필요할 거라고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몇 개월 사이에 달러 보유로 인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상황이니 더욱 필요했다.

게다가 오현우는 그 상황을 두고 ‘그렇지 않아도 지방은행들은 쌓아놓고 안 돌아가는 달러가 많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재환이 꽂힌 것이었다.

[금도 있는 대로 긁기는 하겠소만 이거 거래한다 하셨지라?]

“아유~ 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완전 땡큐죠.”

[근디 지금 나라도 어지러운데 이걸로 받다가 환율 한번 삐끗하면 워쩌려고 그러쇼잉?]

재환은 느긋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네~ 10년간 널뛰기 많이 했는데, 그래도 오르긴 오를 거에요.”

재환은 그것을 두고서 마이다스와 확실히 거래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저렇게 고마운 물건들로 거래해주는데 답례도 준비했고 말이다.

“세번째 시나리오가 안 되게 마이다스가 빠르게 움직여주네.”

재환이 생각했던 세 번째 시나리오는 바로 정부가 개입해서 ‘혜성건설의 채무를 긴급회수한다.’는 발표로 국책은행에 강제로 떠넘기는 것이었다.

매각대상자가 제대로 안 나오면 희경도 재환도 손 쓸수가 없는 일인데, 그걸 막기위해서라도 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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