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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재벌의 삶!-14화 (14/244)
  • 14- 내기 하나 할까요?

    그날 밤늦게 들어온 희경은 술에 취해 빨개진 얼굴로 재환을 보고 소리쳤다.

    “재환이 너 임마! 아까 회사에서 보인 그 태도 뭐야?”

    “여보, 취했어요. 나중에 말해요.”

    명숙이 황급히 말렸지만, 재환은 아까와는 달리 느긋한 모습이었다.

    “너 일 잘하다가도 맘에 안드려고 해?”

    “네, 쉬세요. 내일 회의실에서 이야기 드릴게요.”

    재환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휘청거리는 아버지를 번쩍 들어서 안방까지 안전하게 모셨다.

    “야, 임마! 이거 안 나? 히끅!”

    “자~자~ 주무세요.”

    재환은 발버둥 치는 아버지를 침대에 눕히고는 손을 흔들면서 나갔다.

    명순은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내일은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콩나물국 준비하라고 해야겠네.”

    “네, 저도 기대할게요.”

    재환은 아버지를 재운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자~ 오늘도 집안에 통신비 좀 올리겠습니다.”

    재환은 PC 통신을 들어가서 최근 동향에 대해 생각하다가 해외 사이트로 눈을 돌렸다.

    “아이고, 이게 아니라~ 브라우저로 들어가려면···.”

    인터넷 브라우저로 돌리고, 지금 시간이라면 딱 시차가 미국이 낮일 테니 그쪽의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미국은 자신이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배우면서 아는 친구들도 많았고, 이후에 정보도 기억하는 게 많았다.

    “자~ 닷컴 버블에 숟가락 좀 들이밀자. 친구들~”

    지금부터 준비해도 한창 부족할 시기.

    이제 한국에서 다시 없을 경제위기는 정말로 눈앞에 드리워졌다.

    ***

    다음날 재환은 회장실에서 숙취에 젖어있는 아버지를 보고 소파에 앉았다.

    회장실의 직원들은 또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의외로 닫힌 문 안에서는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다.

    “어제는 한 따까리 할 것 같더니만, 오늘은 와서 무슨 소리를 하러 온 거냐?”

    “저도 건설 매각 건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세요.”

    “김범준이가 한다고 했잖냐.”

    “네, 그분도 열심히 하시라고 하고요. 저도 따로 협상하려고요.”

    “아, 글쎄! 구멍가게 같은 소기업에는 안 판다니까?”

    “어제도 이야기했는데요. 매각대금이 100억 이상 차이가 나도 그런 소리 하실 겁니까?”

    “뭐, 뭐야?”

    재환의 말에 희경의 눈이 번득였다.

    그리고 여기서 승부를 보기위해 재환은 아버지에게 또 한 가지 딜을 걸었다.

    “오늘 보니까 부도나는 건설사 장난 아니더군요. 여기서 매각 타이밍 잘 잡아야 하잖아요? 이왕이면 김 대표보다 더 받을 수 있게."

    "하, 하지만 그래도··· 이름있는데 팔아야···"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도 인수대금이 100억, 아니 200억 이상 차이 난다면 그건 경영자로서 고려해보실 대상 아닙니까?”

    “재환이 너! 상식적으로 그런 애들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소리냐? 네 말로 이 시국에 누가 사 가냐고 했잖아?”

    “아버지, 이번에 대구 다녀오고 느낀 게 많았어요. 서울 진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지방 큰손들의 존재를요.”

    “!”

    “마이다스가 지금은 작은 곳이죠. 하지만 저희도 할아버지가 광주에 작은 제과점에서 시작하시고 아버지가 서울에서 와서 과자 공장 짓고 시작한 회사 아닙니까?”

    “으으음.”

    “사다리는 걷어차지 말아야죠. 밑에서 성장하는 애들만큼 우리도 위로 올라가야 하고.”

    재환이 미사여구를 쓰면서 설득은 했지만, 진짜로 희경이 꽂힌 것은 ‘대기업보다 더 인수대금을 크게 쓴다면?’이라는 조건이었다.

    사실 비자금을 티 안 나게 썼다 하더라도 꼬리가 길면 밟힌다.

    지금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대통령선거가 얼마 안 남아서 정치권이 기업에 큰 관심을 안 보이지만 일단은 표면적으로 매각대금을 크게 불러 회사 현금을 만들어야 했다.

    “···자신 있냐?”

    “김범준 사장보다 매각대금 크게 받을 자신이요? 그거라면 가능합니다.”

    “만약에 못한다면?”

    “앞으로 벌어질 계열사 인수, 매각 건에서 손 떼고, 감사팀이나 운영하면서 BQ사업에만 몰두하겠습니다.”

    재환이 그렇게 나오자 희경은 잠시 재벌 오너 자존심을 놓고 경영자로서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은 찜찜하지만··· 좋아, 단 매각대금이 200억 이상 차이 날 때 가능하다.”

    “알겠습니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쿨하게 받아들인 아들을 보니 이 녀석이 진짜 뭔가 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살펴봤다.

    “그럼 날짜만 정해주세요. 그리고 김범준 사장이 알아본 회사와 비교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이번에도 약조한 다음 재환은 움직였다.

    “출장계 오늘로 끝내겠습니다.”

    재환은 그 말을 끝으로 회장실을 나가 자신의 영역인 기획조정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재환을 보고서 기획조정실의 직원들은 눈치를 보면서 일을 시작했다.

    이미 신희경 회장과 신재환 이사가 회사 안에서 한바탕 싸웠다는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환은 담담하게 일을 하면서 말했다.

    “박 부장님.”

    “아, 네!”

    재환이 자리를 비울 때 기획실을 통솔했던 박찬우 부장에게 말했다.

    “제가 지방 출장은 없어도 당분간 자리를 많이 비울 것 같습니다. 혜성건설 사장님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되고 매각회사도 여러 곳 둘러봐야 하겠네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마이다스에서 연락받았다고 하셨죠? 거기 사장님 연락처도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직원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린 뒤로 재환은 카드를 꺼내 박 부장에게 건네줬다.

    “회식이나 비품은 이걸로 쓰세요. 제가 없는 동안 기획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이런 걸 받기에는···.”

    “받으세요.”

    재환은 손에 카드를 쥐여준 다음 휘하 직원들에게 인사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카드를 받은 박 부장은 얼굴을 긁적이며 다른 직원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 회식할까?”

    ***

    “이것 참··· 일이 그렇게 됐습니까?”

    건설의 노병각과 해운의 이중선을 부르고 차 한잔을 마시는 재환은 그간의 상황을 말했다.

    “일단 기한을 두고 김범준 대표님 팀과 저희 팀이 따로 움직여서 매각대금이 높은 쪽에 매각될 겁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일사천리로 할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런 ‘급처’가 필요할 때였다.

    “그리고 저희는 일단 마이다스 쪽을 알아보고 다른 업체도 알아볼까 합니다.”

    “신 이사님.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인해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매각을 앞둔 계열사 대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도 되는지 싶은 노 대표였다.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를 기울였다.

    “혜성의 계열사들은··· 모두 그룹 공채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저희 혜성건설도 그렇고, 같은 임금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힘들게 공채로 혜성에 들어왔는데, 지방의 건설사에게 먹히면 임직원 인수인계 문제가 힘들겠다는 겁니까?”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프라이드가 있는 것은 오너인 신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재계에서 20위권의 대기업 집단인데 중소업체에 인수된다면 그 박탈감이 클 것이다.

    이건 과거 재환이 삼신전자 대표이사를 맡을 때도 겪어본 일이었다.

    당시 압도적인 재계서열 1위인 삼신의 계열사를 매각할 때 5, 6위 권인 그룹에 매각해도 삼신 공채자가 어떻게 다른 데로 가냐고 불만이 있던 임직원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거에 대해서도 협상을 해 봐야겠네요. 남을 사람은 남아도, 가는 분은 프리미엄을 좀 얹어주는 식으로 해결을 해야죠.”

    재환은 그것을 약속하고서 건설사 문제와 해운도 신경 쓰기로 했다.

    “아, 그리고 이 대표님.”

    “네, 이사님.”

    “그동안 해운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못 드렸는데, 대략 알아보니 해운 터미널이 대부분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네요.”

    “아, 그렇습니다. 특히 주력은 인천항과 평택항 터미널 쪽입니다.”

    그 일대가 중국을 거쳐 대만과 동남아 쪽으로 향하기 좋은 루트였다.

    “지금이 경제상황은 어려워도 앞으로 수출을 위해서는 중국과 동남아 위주로 해운루트를 원하는 곳이 많을 겁니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해운사는 차분하게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생각하신 기업이 있습니까? 아니면 저희도 마이다스를···?”

    “네, 일단 기존 해운회사 위주로 알아보고 아니면 해운에 새로 진출하는 것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해운은 상황이 특별하니 한 가지를 더 여쭤보고 싶네요.”

    “네, 말씀하세요.”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해운업에 대해 이중선에게 물었다.

    “혹시 해외에 매각해도 문제없겠죠?”

    “네? 해외라 하시면···.”

    “해운업은 한국 진출을 위해 노릴 회사가 많을 겁니다.”

    “으으음, 일단 그것은 임직원 회의를 한 번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21세기가 되어 세계 해운업계는 거대 동맹을 이루면서 뭉치게 되니 해외자본을 미리 받아들여도 문제는 없을 거다.

    거기에 달러로 인수대금을 받는다면 그거만큼 땡큐인 일이 없을 테고 말이다.

    “해외인수··· 거기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번 알아봐야겠네요.”

    재환은 두 대표와 대화를 마치고 그들에게 인사하며 본사를 나섰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았다.

    ***

    재환이 강남 프라자 호텔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을 때,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키가 190은 되는 거구에 검은 정장으로 묵직한 인상을 주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아, 오셨군요.”

    재환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자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따, 혜성그룹 신 이사님이시죠? 겁나 반갑소잉.”

    걸걸한 사투리가 인상적인 인물은 마이다스 건설의 오현우 사장이었다.

    “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혜성그룹의 신재환이라고 합니다.”

    “그려, 나 마이다스의 오현우요!”

    그리고는 정중하게 주문을 받는 호텔직원에게 물었다.

    “아, 여기 전통차도 되오?”

    “네, 어떤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쌍화차, 거기에 노른자는 두 개로.”

    “···.”

    순간 재환은 비즈니스 문제가 아니었으면 반사적으로 뿜을 뻔했다.

    70년대 다방도 아니고, 5성급 호텔 라운지에서 노른자 탄 쌍화차를 주문하는 걸 보니 감성이 대단해 보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호텔직원들이 프로는 프로였다.

    그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계란 노른자 두 개 넣은 쌍화차를 준비하러 카운터로 가는 걸 보면 말이다.

    “서울이 좋긴 좋소, 와~ 호텔 삐까번쩍한거 보소.”

    “광주에도 좋은 호텔이 들어오겠죠.”

    “잘 보셨소잉. 나가 우리 마이다스가 광주에서 호텔 건설을 추진하는데, 상무지구 아쇼? 거따가 삐까번쩍하게 하나 만드려고하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전남권 일대에서 광주 상무지구는 알짜 신도시로 유명했고, 훗날 국토부에서도 상당히 지원을 받는 지방 신도시로 주목받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희 혜성건설 인수를 생각하신 겁니까?”

    “그려, 인자 말이 통하는구먼, 여기 인수 못 하면 광주 안 내려갈 생각으로 왔으니 같이 협상합시다.”

    “흐음,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관해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겠네요.”

    재환은 지금까지 혜성 내부에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일부러 ‘신 회장이 마이다스라는 이름 없는 기업에 혜성건설을 판다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라는 말도 넌지시 흘렸다.

    그것을 듣고 있던 오현우 사장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있습니다.”

    “아따, 동향 사람끼리 조금 섭하네잉. 나가 혜성하고 손잡으면 엄청나게 키울 수 있을 것인디.”

    “네, 저도 사장님의 의지를 보면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네요.”

    “그럼 어떡해야 되것소? 그 말 할라고 여기 온 건 아닌 것 같소만?”

    재환은 그 말에 빙긋 웃었고, 타이밍 좋게 오 사장이 시킨 계란노른자 두 개 넣은 쌍화차가 도착했다.

    “네, 그래서 한 번 여쭤보려고요. 오 사장님. 혜성건설 인수에 얼마나 매달리시겠습니까?”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현우의 의지는 대단했다.

    “말했잖소? 나가 혜성건설 인수 못 하면 광주 안 내려갈 갈라요.”

    “굳이 혜성이 아니라 다른 건설사가 매물로 나왔어도요?”

    하지만 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세 개를 뻗었다.

    “하나, 호남 기업은 호남이 인수해야 그림이 좋소잉.”

    ‘우리 회사 서울에서 시작했는데··· 할아버지랑 아버지 고향이 광주인거지.’

    “둘, 나가 호텔 짓겠다고 했잖소? 대형 건물하고 상가, 그리고 앞으로 지구 올린다는 그 기술력은 여그 만한 데가 없소.”

    ‘확실히 혜성이 대규모 건축물 공사 많이 했지. 상무지구에서도 일부 주택단지 지었고.’

    “그리고 셋. 지금 혜성건설이 아파트 올릴라고 상무, 금호, 충장로일대에 택지 많은 걸로 알고 있소. 다같이 인수해서 나가 좋은 건물 지을 거요.”

    이렇게 들어보니 확실히 ‘혜성건설 아니면 안 된다.’라는 오현우의 의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사업 이야기 계속 이어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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