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쩐주 여사님.
“맛난거 들고 계시네. 내 먹을 것도 있는교?”
미금이 다가와 자리 한 곳에 앉아 곧바로 자리를 마련하고 호텔직원들이 곧바로 새 음식을 준비했다.
“김 여사님이 여기에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인수 건은 이야기 드렸어도···.”
“아이고, 마 됐어요. 이미 나는 신 이사랑 만나서 이야기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미금의 반응에 철원 역시도 쉽게 뭐라 말하질 못했다.
재환은 지난번에 약속대로 인사를 올린 다음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내가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두 분을 찾았는데 다들 괜찮은지 모르겠소?”
“하,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신 이사는···.”
“들어는 보죠.”
쿨하게 대답한 재환을 보고서 미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동성시멘트 인수한 거 보고서 내 가진 지분을 어떻게 이용할지 모르겠는기라.”
대놓고서 지분을 가지고 행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동성 시멘트의 새 주인 앞에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재환은 담담했다.
“네, 대주주로써 존중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배당금은 꾸준히 들어갈 겁니다.”
“내가 그거 하나 가지고 여기 온 줄 아는기가!”
그 순간 철원은 헛기침하면서 슬며시 일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잠시 회장님의 호출이 있어서 통화를 좀 하고 와야겠네요.”
“다녀오쇼.”
미금은 철원과 대등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그를 보냈다.
재환은 눈치껏 일부로 빠진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빈 술잔을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경상도 일대에서 큰 손으로 유명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전국에서도 나 모르는 사람 없다니까?”
“이미 음지로도 자금이 엄청나실 텐데 굳이 저에게 이리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가 뭡니까?”
재환은 정말로 궁금해서 그것에 관해 물었고, 미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육십 평생 살면서 악착같이 모은 돈이 상당해요. 그러면서 지금 재벌이라 불리고, 대기업 오너라 불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내 앞에서 돈을 빌려 간 이름 대면 한 다스는 나올거야.”
“저는 지금 당장 돈 빌릴 필요 없는데요.”
“지금은 그래도 신 이사는 내가 알고 지내면 나중에 분명 뜬다. 이건 내 선구안이 증명한다고.”
“···그러니까 초면부터 저를 눈여겨보시고서 후원을 해주신다는 겁니까?”
“맞다! 그 말인데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기고?”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요.”
“!”
하루에 수십, 수백억을 매일같이 융통할 수 있는 큰손의 제안에도 재환은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빈 잔에 술을 채우고서 쭉 들이킨 다음 입을 닦으며 이유를 말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는 사람을 가리는 경우는 있어요.”
“내 같은 쩐주 할매랑 엮이는 건 재벌 격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기가?”
재환은 그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존중은 합니다. 보통 이런 큰손이나 후원자라 불리는 분들 보면 회사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제안하시면서 거리낌 없이 돈을 쏟으시죠.”
“맞다. 나도 그래서 서울과 대구에 사장들 목숨 여럿 살렸제.”
“그런데 그 돈이 온전하게 여사님 소유입니까, 아니면 일본에서 세탁기 한 번 돌리고, 소독해서 오는 현금입니까?”
“!?”
재환은 이 시기에 사채 거물들이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여사님도 보면 일본에 연락망 좀 있으신 거 같네요. 한국에서 안 파는 명품백을 차고 다니시는 거··· 그거 일본 백화점에서 사신 거죠? 거기에선 쩐주들 위에 더 큰 자금책이 있을 것이고, 호텔 슬롯머신 도박자금이나 보따리 밀수로 금액 돌리시는 거··· 아닙니까?”
미금은 귀엽게 봤던 유망한 재벌가 도련님이 자기네들의 업계 상황을 꿰고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랬다.
“공부··· 많이 했나 보네, 신 회장이 알려 준 기고?”
“옛날 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많이 알게 되더라고요. 고리 사채 써서 낙동강에 다리 공사 하신 분 이야기라던가, 여기 대구에서 설탕공장 짓는데 일본에서 큰손 끌어온 분이라던가 말이죠.”
둘 다 현재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재벌의 창업주의 과거 이야기였다.
재환의 말을 들은 미금은 어떻게 해서도 자신이 혜성에 줄을 댈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다.
“···아쉽네. 더 인연이 이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그때 재환은 술 한 잔을 더 따르면서 이야기했다.
“혜성과 정 인연을 가지고 싶으시다면··· 김 여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있습니다.”
“으잉? 그기 뭐고?”
앞으로 벌어질 경제위기에 대해서 재환은 약간의 방법을 알렸다.
“지금 돈 모아서 양지로 올라오세요.”
“뭐라고?”
“여신회사나 신용금고 같은 곳이 앞으로 우수수 떨어져 나갈 겁니다. 이미 쓰러진 곳도 많을 거고요.”
재환의 말이 맞았다.
1금융권인 은행도 휘청거리는 상황인데, 그 밑에 있는 2금융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2금융권에서 회사를 인수하셔서 합법적으로 올라오세요. 여사님의 수완이시라면 지역 일대에 이름난 상호신용금고나 캐피탈 회사 인수는 일도 아닐 게 아닙니까?”
“그, 그기 말처럼 쉬운데 아닌데···.”
미금은 그 이야기를 듣고 침을 삼켰다.
사실 그녀 역시도 양지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배운 게 음지의 돈만 굴린 일이니 재환 같은 유망한 2세대 경영인을 붙잡아서 올라가려고 했던 것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 못 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닌기라. 이유야 다양하지만···.”
“여사님이 양지로 못 올라가신 건 돈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공무원들 인허가 문제를 못 받으니 그렇죠. 거기에 중앙이 아니라 지자체 사람들이라 더 상대하기 힘드시죠?”
“···맞다.”
“그래도 지금 시국을 노리시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이때 아니면 2금융권도 인수하기 힘든 시국이 올 겁니다. 나라의 금융규제는 안정되면 계속 생기니까요.”
“···으으음.”
“참고로 엔화보다는 달러랑 금이 더 주목받을 겁니다. 남은 금액을 그걸로 전환하시고 합법적인 금융권의 사장님이 되시면, 그때는 제가 사업 이야기를 기꺼이 논하겠습니다.”
재환의 명쾌한 조언에 미금은 활짝 웃었다.
“히야··· 내 오늘 여기 오길 참 잘한 것 같데이. 신 이사가 역시 귀인이 맞구마.”
“네, 그러니 다음에 뵈면 ‘큰손 김미금 여사’보다는 ‘김미금 사장님’으로 뵙길 원합니다.”
그러자 미금은 그 조언을 받아들고서 재환에게 선물 하나를 줬다.
“이런 얘기 알려줬으니 나도 뭐 하나 줘야 할 거 아이가?”
“이게 뭡니까?”
재환에게 두툼한 수첩을 하나 준 미금이었다.
한 번 열어보자 그 안에는 체계적으로 작성된 대구를 넘어 경상도 일대의 기업들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흠···.”
그들의 대다수는 김미금과 연이 있거나, 그녀에게 자금을 융통한 기업가들이었다.
“동성 시멘트 말고 거서 인수할 만한 회사 있으면 함 해 보그라. 내 뒤에서 도와주께.”
재환은 이것은 일반적인 언론사 정보나 주식가 정보보다도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흐음, 이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는 빚지고는 못사는 몸이니 주는기다.”
“네, 감사해요. 다음에 만날 때는 제가 드린 이야기대로 뵀으면 좋겠네요. 김 사장님.”
“그래.”
그렇게 남은 식사를 마치고서 철원이 슬그머니 들어왔을 때, 재환과 김미금이 한층 더 밝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자, 계속 식사하시죠?”
재환은 대구에서 아주 많은 것을 얻은 뒤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다음 날.
재환은 아침부터 나오는 지역방송 TV에 자신이 나온 것을 보고 배를 잡았다.
[저희 혜성이 왜 망합니까? 제가 있는데요.]
“와~ 저건 진짜 내가 말했어도 정말 명문이었다.”
재환은 손뼉을 치면서 신문에도 올라온 혜성그룹-동성그룹간 빅딜에 관한 기사를 모두 오려냈다.
이제 대구에서 웬만한 일은 다 했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유망한 기업들을 둘러볼 셈이었다.
그때 갑자기 재환의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기획실이었다.
“여보세요?”
[이사님. 저 기획팀장입니다.]
“아, 박 부장님. 무슨 일입니까?”
서울 본사 기획실에서 온 다급한 연락에 재환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었다.
[이사님, 조금 전에 혜성건설과 혜성해운의 인수 의사를 밝힌 기업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 그래요? 다른 임원들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지금 막 혜성건설에 연락이 온 것이라 그쪽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부산 출장은 다음에 가야겠군요. 지금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재환은 빨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 부장님. 인수 의사를 밝힌 기업이 어디랍니까?”
[저 그것이··· 마이다스 건설이라고 합니다.]
“네? 어디요?”
마이다스라는 이름에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아, 그 사람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구나.’
IMF라는 전국적인 위기에서 재환이 하는 행동과 같이 지방의 유망한 회사들을 먹어치우면서 서울에 입성한 기업.
재환은 그들에 존재를 알고서 곧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지금 막 대구에서 출발합니다.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으니 도착하면 연락드리죠.”
[네, 이사님.]
지금 당장 출발한다면 오후 1시 전후가 될 것 같았다.
재환은 곧바로 차를 몰아 출발했고, 대구를 떠났다.
“다음에 다시 보자. 달구벌아!”
그리고는 있는 대로 액셀을 밟았다.
***
오후 1시 반쯤 되어서 남영동 혜성그룹 본사에 도착한 재환은 지끈거리는 다리를 두들기면서 기획실로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때 1층에서부터 재환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신 이사!”
“?!”
재환을 기다렸다는 듯이 1층 라운지에 앉아있던 인물이 있었다.
“아, 김 사장님?”
김범준 사장이 직접 재환을 맞이하고는 그를 데리고 최상층 회장실로 올라가려 했다.
“기획실에 이야기 나와서 곧바로 회장실로 올리라는 회장님 명입니다.”
“그래요? 동성 시멘트 인수하고 아버지가 칭찬해주시려 하시나?”
재환이 농담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범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지난날 성윤규가 실각된 이후로도 범준과 재환의 사이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접점이 없었다.
그저 사무적인 관계.
그렇게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회장실 앞 데스크에서 비서팀 직원들이 보였다.
“회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소규모 팀에 불과하지만, 재환은 훗날 기획실과 통합하여서 계열사들을 유연하게 통제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로 만들 셈이었다.
어쨌건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희경이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회장님, 인사드립니다.”
사뭇 다른 온도차의 범준과 재환이었고, 희경은 둘 다 반갑게 맞이했다.
“아, 그래. 여기 와서 커피 한 잔씩 하라고.”
희경은 소파에 앉아서 둘에게 커피를 돌리면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재환이 너, 이번에 동성그룹과 빅 딜건 잘 했더라. 이원구 그 노친네가 아주 너를 칭찬하더라고?”
“믿어주시면 잘 한다고 했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들을 보고 희경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재환을 보고 말했다.
“그래, 이번 건은 잘 했으니 칭찬해주마. 하지만 건설, 해운 건은 아니다.”
“네?”
“마이다스에서 연락 왔다고 들었다. 그거 매각은 취소해라.”
“!”
재환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물었지만, 희경은 범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건설하고 해운 매각은 김범준 사장에게 맡길 거다. 이건 내 의지야.”
“아버지!”
재환은 잘 나가다가 또다시 아버지가 어깃장을 놓는 상황에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