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0화 (10/244)
  • 10- 꽃밭을 향긋하게 가꾼다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재환은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소주를 그렇게 마셨는데, 아침 6시가 되자 반사적으로 일어난 재환은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머리를 풀었다.

    “젊은게 좋긴 하구나, 찌뿌둥한 곳이 없네.”

    과거의 삶에서 언제나 6시 기상 새벽 1시 수면에 들어가서 말년에는 몸 여기저기 안 쑤신 곳이 없었는데 요새는 아주 상쾌했다.

    “건강관리 좀 해야지. 다음부터는 좀 일찍 자야겠어.”

    몸을 푼 재환은 휴대폰을 열었지만, 녹색의 화면에서 새로온 문자는 하나 있었다.

    [아들, 언제나 엄마가 믿고있어.]

    “후, 저도요. 엄마.”

    대구로 출장간 아들을 향해 보내준 어머니의 문자를 보고 재환은 곧바로 사랑한다고 답장을 보냈다.

    재환은 아침 식사로 냉면을 주문하고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보통 아침 회의가 7시에서 8시일거야. 곧바로 연락은 안 올테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서야 만나자고 하겠지. 부회장급 인물 하나 불러서 말이야.”

    재환은 그 시간 동안 신문을 받아서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삼우일보의 기사를 본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해도 너무한 일부 언론사의 기업 때리기, 이래도 괜찮은가?]

    신문사가 신문사를 까는 진귀한 풍경이 헤드라인이었다.

    그리고 나온 내용 역시도 사이다였다.

    [모 신문사는 광고가 끊긴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서 기업 위기설을 보도하여 사장단이 격노했다는 소문이 있다. 현재 법무팀에서 소송 준비를 하는 가운데, 그 신문사는 정정 보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며···.]

    깡패같이 긁어댔던 신문사 한경일보는 삼우일보를 포함해 다른 언론사에 영혼까지 털리는 굴욕을 맞았고, 다른 대기업의 오너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한경에는 광고 주지 말자고 골프나 치면서 논할 것이다.

    하지만 한경일보를 아무리 조져도 문제가 있었으니 결국 건설과 해운은 팔아야 하는 계열사인데, 이후로 매각을 하면 결국 자기 말이 맞았다며 펜대를 굴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더 열 받네, 이놈들만 아니었어도 건설하고 해운 진작에 매각대상자 찾고, 시멘트는 현금 충분할 때 나중에 매입해도 됐는데···.”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오전 9시쯤 돼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실장님, 저··· 한경일보의 기자입니다.]

    “구독 안 해요.”

    탁-

    재환은 곧바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연락이 왔지만, 매몰차게 끊어버렸고, 잠시 후 장문의 문자가 왔다.

    [죄송합니다. 증권가에 떠도는 소문만 가지고 잘못된 기사를 썼습니다. 혜성이 위기설이라는 보도에 대해 정정 보도를 할 것이며···]

    길게도 썼지만, 결론은 자기들이 헛소문을 들은 것이니 무조건 잘못했다는 말이었다.

    재환은 조용히 차단 버튼을 누르고 잠시 생각했다.

    “이 자식들 때문에 돌아가게 생겼어. 당장에 제값 받을 매각자 찾아야 되는데··· 하아~”

    정 안된다면 혜성의 이름으로 회사 몇 개를 인수하고 나서 건설은 나중을 위해 그냥 안고 갈지도 생각했다.

    어차피 건설사를 매각안하면 지금은 좀 괴로워도 시멘트, 레미콘이 한 번에 붙어있다면 나름의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근데··· 그러면 이사회 투표했던 의미가 없잖아. 아, 진짜 신문사 하나 농간 때문에···.”

    그것을 두고서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현재 동향을 알기 위해 스위트 룸 안의 컴퓨터를 켰다.

    서울 집의 인터넷에 비해 현저히 느렸지만, 별수 없었다.

    “이 동네 전화국하고 거리가 있나보구만.”

    21세기에는 우스운 소리였지만, 90년대는 한국통신 전화국 근처부터 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인터넷 속도가 느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에나 있었던 촌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인터넷 사업도 손을 대야겠어. 이제 막 벤처 붐이 일어나기 전이니 배 곪은 IT 사업자 넘쳐날 거니까.”

    한 가지에만 몰두하다 보니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아직 손을 못 대고 있었다.

    과거 재환의 전공이었던 스마트폰과 가전제품 사업도 있고, 컴퓨터 보안 서비스와 이러닝 등, 지금 시대에는 돈만 있으면 선두로 나설 수 있는 사업이 무궁무진했다.

    재환은 혜성의 주가가 다시 반등하는 것과 PC통신 내에서도 한경일보를 성토하는 글, 그 외 혜성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글들을 보고 다행히 회사가 대중에 호의적이란 것을 알게됐다.

    컴퓨터를 종료한 재환은 씻고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가 보이는 자리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킨 뒤 다음 행선지에서 인수를 논의할 회사들을 찾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지방은 특히 타격이 커서 헐값에 올라올 매물이 굉장히 많았다.

    “건설 찍고 그다음은 바로 현금 동원이 가능한 유통, 물론 목이 좋은 자리를 잘 살펴서···.”

    재환이 중얼거리면서 수첩에 이리저리 적고 있을 때, 그에게 조용히 다가오는 인물이 있었다.

    “실례 좀 하겠소.”

    “?”

    재환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초면의 중년 부인이 있었다.

    나이는 50대 중후반 정도였는데,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반지가 가득한 손에 명품백을 들고 있는 귀부인이었다.

    재환은 그녀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실례하세요.”

    재환의 말에 그 귀부인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호텔직원이 달려와 차를 한 잔 내며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동성그룹의 이름으로 VIP로 왔던 재환 만큼이나 대접을 받는 사람 같았다.

    “아이고~ 총각이 아주 훤칠한 미남이구마.”

    “네, 칭찬은 고마운데, 그래서 누구십니까?”

    실례한다면서 대뜸 맞은편에 앉아 차를 시킨 귀부인은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한자로 ‘金美金(김미금)’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만 단출하게 적혀 있었다.

    재환은 그것을 보고 짐작 가는 게 있어서 다시 한번 김미금을 바라봤고 그녀는 화사한 미소로 응답했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 여사님.”

    “나도 혜성그룹 장남 만나서 아주 영광이에요.”

    “저를 찾아오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에 총각이 동성그룹하고 계열사 판매 논한다기에 내 왔어요.”

    “···.”

    재환은 정보가 이런 아줌마에게 퍼진 것을 동성그룹에 따지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잊고 있었다. 지금은 90년대야.’

    스마트폰과 초고속인터넷의 정보시장은 없지만, 사람과 사람의 인편을 통해서 아주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는 존재가 있었다.

    누구에게는 ‘사채’ 혹은 ‘쩐주’라고 불리고 또 누구에게는 ‘큰손’ 이라던가 ‘대주주’ 또는 ‘후원자’라 불리는 사람들 말이다.

    “김 여사님은 음지쪽 돈을 맡으시나 보군요.”

    “음지든 양지든 다 같은 돈 아니오? 그래서 이야기 좀 하고 싶소.”

    “좋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동성그룹하고 긴밀하게 논하면서 계열사 매각 건까지 알아 재환을 찾아올 정도면 대구를 넘어 경북 일대에서 알아주는 큰손일 것이다.

    “그 전에,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 지금 직책을 보니 이사쯤은 될 것 같은데 맡소?”

    “네, 편하게 신 이사라 불러주세요.”

    “좋아요. 그럼 신 이사, 내 말 할게요. 지금 동성에는 나의 손길이 닿은 돈이 상당해요. 만약 정말로 시멘트하고 레미콘 사업 인수한다면 내가 더 쉬운 방법을 알려줄라꼬.”

    “뭡니까?”

    “내 지분을 인수하면, 만사가 형통인기라. 대주주 권한 가지면서 지금 대금보다 더 적은 돈으로 동성 거는 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김미금이란 이 쩐주 아줌마가 생각 이상으로 보유한 자본금이 큰 것 같았다.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지하경제의 자금을 동원해서 대기업의 계열사 지분을 상당 부분 소유해서 단숨에 대주주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신 이사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내 경상도 일대는 아주 꽉 잡고 있소. 그리고 전국에서도 나 모르는 사람 없다카이.”

    “네, 일면식도 없어서 저를 찾아오셔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시는 걸 보면 대단한 분인 것 같긴 하네요. 존중은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재환은 그 제안을 두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 여사님의 좋은 제안은 마음만 받겠습니다.”

    “뭐라꼬? 그럼 진짜 혜성만의 자금으로 그 큰 회사를 먹으려는기고?”

    “네, 그럴 겁니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자 김미금은 당황하면서 다시 물었다.

    “우째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해요? 혜성이 그리 돈 많이 쌓아놓은 것도 아닌데?”

    “네, 기업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융통할 자금줄이 있고요. 저는 그걸 써서 양지에서 돌리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딴 금고라도 쓰는갑네.”

    “!”

    재환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바뀌었고, 미금은 정곡을 찔렀다는 듯이 말했다.

    “내 말 틀리면 언제든지 반박하소. 지금 돈줄 씨가 말랐는데, 그렇게 당당한 거 보이 비상금 끄집어내서 돌리는 거밖에 방법 없잖소? 아니면 어디 금맥이라도 캤다든지.”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그리고 김미금 여사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일단 제 뜻을 말하겠습니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녀에게 말했다.

    “동성에 얼마나 지분을 가지신지 모르겠고, 그 돈으로 지역경제 영향력 끼치는거 뭐라 할 사람은 경찰이랑 국세청밖에 없을 겁니다. 그냥 가진 지분만 잘 가지세요. 배당금은 착실하게 챙겨드릴 테니, 경영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맡기시길 바랍니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신 이사가 아주 칼 같네.”

    “그럼 여기까지 말하겠습니다. 여기 차 맛이 좋네요. 언제 마주칠 일 있으면 인사는 드리겠습니다.”

    재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부산에 가서라도 저런 쩐주나 사채업자들이 지분을 가지고서 지방 회사 인수합병 하는 상황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금은 재환이 떠난 자리에서도 계속 앉아있어 생각에 잠겨있다가 피식 웃었다.

    “신 회장이 자식 농사 잘 지었네? 그 친구 보면 볼수록 물건인기라.”

    분명 자신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지만, 미금은 그렇다고 재환과의 인연을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 역시도 음지지만 돈을 굴리고, 더 많은 돈을 벌려면 양지에 있는 기업가들을 더욱 더 알아둬야 한다.

    거기에서 미금은 재환에 대해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접근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말했다.

    “어, 내다. 복 사장 언제 돌아온다하노? 그래? 그러면 이번 주 내로 끝나겠구마.”

    미금은 동성에 내부 관계자에게 태연하게 전화를 하고서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통화를 끝냈다.

    ***

    스위트룸에 돌아온 재환은 담배를 물면서 중얼거렸다.

    “나무와 꽃밭을 가꾸면, 향긋한 꿀 냄새를 맡고 꿀벌과 나비가 오지만, 파리와 모기도 꼬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재환이 과거 신사업을 할 때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기술의 발전과 업계의 파이가 커질 때마다 언제나 그것을 악용하고, 이권만 노리는 벌레들이 꼬이는 걸 숱하게 봐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누가 모기, 파리고 벌하고 나비인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재환은 남은 시간 사흘 동안 한 번 동성그룹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기로 했다.

    정 안된다면 파토 내버리고 아예 인수금액을 공개해서 이 가격에 시멘트 회사 팔 업체 찾는다고 선언해버리면 되니까.

    어느 쪽이던 칼자루는 아직도 재환이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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