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98화 (998/1,000)
  • 외전 124화 멸망 재림(滅亡 再臨) (10)

    유다희.

    오래 전에 명성을 떨쳤던 하이랭커.

    그러나 결혼과 임신을 기점으로 게임 세계에서 은퇴했던 전설적인 플레이어.

    그녀가 오랜만에 다시 게임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렴.”

    유다희는 손을 뻗어 튜앙카를 일으켜 주었다.

    루시퍼에게 체력을 흡수당해 설 힘마저 잃어버렸던 그녀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츠츠츠츠츠-

    유다희는 튜앙카에게 포션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살짝 떠민다.

    “어서 가 봐.”

    빙긋 웃는 유다희의 얼굴을 마주한 튜앙카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린다.

    ‘……멋지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여자를 엄마로 둔 자식들은?

    바로 그때.

    “튜앙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튜앙카는 이내 깜짝 놀라야 했다.

    발록, 데모고르곤, 어둠 대왕, 역병 여왕, 구울 퀸, 데스나이트 등등…….

    수없이 많은 악마군 고위 간부들의 포위망을 뚫고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콰콰콰콰쾅!

    악마군의 최전선을 뒤집어엎으며 달려오는 두 명의 플레이어.

    튜더, 그리고 비앙카.

    사망 패널티를 기꺼이 감수한 채 루시퍼에게조차 도전장을 내민 이들.

    그들을 바라본 튜앙카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딸! 네 렙에 여기는 이르다고 했잖니!”

    비앙카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딸을 나무란다.

    하지만 그 옆에 선 튜더는 그저 온화한 미소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컸구나. 이런 곳에 스스로 찾아오고.”

    “…….”

    “성과에 대한 압박이 조금은 줄어들었니?”

    부모님의 말에 튜앙카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

    “이번 레이드 끝나면 밀린 이야기들을 해 보자. 성적이나 일 얘기 말고. 그냥 일상 이야기 말이야. 어디 유원지라도 갈까?”

    “유원지는 무슨…… 제가 애도 아니고…… 아빠는 맨날 저를 애 취급…….”

    “허허- 그래서 싫어?”

    “아뇨!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튜앙카가 눈물 어린 시선으로 황급히 아빠의 말에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본 비앙카는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비앙카는 딸에게서 시선을 뗀 뒤 그 옆에 있는 유다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평소 오만하기로 소문난 그녀가 유일하게 예의를 차리는 상대가 바로 유다희 여사였다.

    “간만에 인사드려요, 언니.”

    “뭘. 바쁜 거 다 아는데. 그래도 딸래미 좀 느슨하게 키워~”

    “저희는 느슨하게 해요. 애가 스스로 빡빡하게 구는 거지.”

    “어휴, 우리집 애도 그래. 아들래미가 말이야. 딸래미는 너무 풀어져 있어서 탈이고. 호호호-”

    “언니네도요? 어머어머~”

    두 여자가 자식 이야기로 잠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콰쾅!

    전장의 어귀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이 빌어먹을 계집이! 감히 폐하의 옥체에 손을……!]

    단탈리안.

    항상 신사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던 이 고위악마는 지금 루시퍼의 팔이 잘린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었다.

    악마군을 통솔하는 최강의 S급 몬스터.

    같은 S급이라고는 하나 개체값과 특성치 면에서 다른 S급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최강 최악의 악마형 마물.

    단신으로도 능히 수십 마리의 발록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 몬스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쿠르르르르륵!

    단탈리안의 애병 ‘페르소나’가 수천 도에 이르는 온도의 불길을 뿜어냈다.

    폭주하는 칼날이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온다.

    “엄마! 위험해요!”

    이산하와 이우주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

    유다희는 그저 씩 웃으며 몸을 풀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드득- 우드드득- 우득!

    이윽고. 몸 풀기를 마친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빠를 동경하는 것은 좋아. 닮고자 하는 것도 좋고. 하지만 말이야.”

    유다희는 저 멀리에 있는 아들과 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너희들의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해.”

    엄마로서, 인생을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그리고 상위 랭커의 게이머로서 하는 조언.

    “살아라, 얘들아. 가능한 즐겁고 명랑하게.”

    그리고.

    홱-

    고개를 돌린 유다희의 표정이 일순간 무시무시하게 변한다.

    그 앞에는 분노에 눈이 먼 채 돌격해 오고 있는 단탈리안이 있었다.

    “우린 구면이지? 옛날 3차대격변 때 한번 만났었던 것 같은데.”

    먼 옛날 용과 악마들의 전란에 휘말려 불타 버렸던 그레이 시티.

    그날의 참사가 유다희의 머릿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대격변에서도 그랬지만 그 이전부터 그레이 시티는 항상 용과 악마들의 전쟁에 의해 피해를 받아 왔던 도시가 아닌가.

    그리고 유다희는 그곳 그레이 시티에서 본인이 직접 은퇴를 결정하기 전까지 자그마치 3번이나 시장 재임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했다.

    “빚은 갚아 줘야겠지? 이자까지 톡톡히 쳐 줄게.”

    동시에.

    우드득-

    도끼자루를 잡은 유다희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그리고.

    콰-쾅!

    굵고 짧은 일격.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한 방.

    그것은 돌진해 오던 단탈리안의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다.

    [껙!?]

    그 일격에 맞은 단탈리안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36개의 머리들 중 하나가 일격에 터져 나갔다.

    그토록 많은 하이랭커들이 십자포화를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던 머리였다.

    [끄아아아아아악!]

    단탈리안은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기다려. 아직 많이 남았어.”

    유다희는 계속해서 도끼질을 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순식간에 서른 네 번의 도끼질이 이어졌다.

    “막아? 어어? 막아? 막아? 계속 막아 봐 그럼 어디, 그러다 뼈 맞을 텐데? 어쭈? 어쭈?”

    [흐에에에에엑! 괴, 괴물이다!]

    유다희의 구타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지켜보고 있던 트로츠키나 페이사 등이 오들오들 떨 정도였다.

    “여전히 두려운 힘 스탯이로군. 깡 공격력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측정할 수도 없어.”

    “……형수님이라는 존재는 왜 다 저렇게 무서운 것이지?”

    한편,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이어지는 구타에 정신이 반쯤 단탈리안은 연미복의 꼬리 부분을 제비의 날개처럼 퍼덕여 재빨리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이, 이제 그만! 루시퍼 님을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러니 나는 살려 줘-어!]

    그러나.

    “아아, 막타 뺏기게 생겼네.”

    유다희는 입맛만 다실 뿐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도.”

    “빼놓으면 섭섭하지.”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허공에 뜬 단탈리안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커다란 화살, 그리고 그보다 더 커다란 주먹 한 방.

    윤솔과 드레이크가 단탈리안의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마마! 파파!”

    솔레이크가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드는 앞으로.

    콰-콰콰콰콰콰쾅!

    단탈리안이 실시간으로 공중분해된다.

    [이이이이이익!]

    그 옆에서는 파이몬이 창을 휘두르며 저항하고 있었으나.

    쿵-

    위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검은색 앞발에 의해 납작하게 뭉개진다.

    [후, 인간. 오랜만이구나.]

    [호앵뿌!]

    위풍당당한 몸집을 자랑하는 검은 비늘의 용 오즈.

    그리고 그런 오즈의 코에 고삐를 채워 놓은 채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쥬딜로페.

    오랜만에 등장한 그 둘이 파이몬을 순삭시켜 버린 것이다.

    [?]

    팔이 잘린 채 물러난 루시퍼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 많던 악마들은, 그 많던 용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

    루시퍼의 표정에서는 그가 느끼고 있는 허탈함과 황당함이 그대로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한편.

    “세상에! ‘그 사람들’이다!”

    “올림피아드를 뒤집어 놓았던 주역들!”

    “그립군. 그 시절의 전설들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전장에 모인 모든 플레이어들은 눈앞으로 펼쳐지는 20년 전 레전드들의 등장에 전율한다.

    그들은 그 사이 얼마나 더 강해진 것일까?

    얼마나 더 아득히 높고 먼 곳까지 닿아 있을까?

    이 점은 뭇 플레이어들의 꿈과 희망을 더욱 더 자극하고 있었다.

    모험심. 동경. 그리고 파이오니아(Pioneer).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설레이는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처억!

    묘한 대치구도가 형성되었다.

    한계까지 몰린 루시퍼의 앞으로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대치하고 섰다.

    죠르디의 머리 위에는 해골 용 위에 탄 죠디악이 버티고 있었다.

    솔레이크의 뒤로 드레이크와 윤솔이 다가와 섰다.

    이산하의 뒤에는 유다희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펄럭-

    바람에 휘날리는 망토.

    얼핏설핏 들여다보이는 살색의 육체.

    “……!”

    이우주는 전율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지면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등 뒤에 누가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우주가 넘고자 하는 벽, 닿고자 하는 곳.

    그리고 한없이 든든한 뒷배.

    고인물.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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