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7화 멸망 재림(滅亡 再臨) (3)
-띠링!
<‘샛별 마차’가 과열되고 있습니다!>
<‘샛별 마차’의 냉각기가 파괴됩니다!>
<‘샛별 마차’의 궤도를 올바르게 수정하십시오!>
살벌한 알림음들이 연신 귓가를 때린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살벌한 메시지는 단연코 이것이었다.
<‘샛별 마차’의 탑승자는 사망 시 최대 1만 배의 패널티를 적용받습니다!>
그것을 본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 이걸 왜 이제야 말해! 샛별 마차에 탈 때는 이런 주의사항 없었잖아!”
“있다! 적혀 있다! 저기 약관 주의사항 밑에 깨알만 하게!”
“아무런 복선도 없이 이 난리라니. 또 급발진 막장 엔딩으로 향해 가는 건가…….”
뎀2에서 플레이어가 사망할 경우 대량의 경험치와 아이템 손실, 그리고 최소 반나절의 접속 불가 패널티가 주어진다.
이우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럼 최소 단위로만 계산했을 때도 12시간의 1만 배……. 더군다나 경험치 손실량까지 감안한다면…….”
네 사람의 머릿속에는 절망적인 수치가 떠오른다.
최소 12만 시간. 5천 일. 무려 13년이 넘는 접속 금지다.
사실상의 영구 접속 금지나 다름없는 수준의 패널티에 레벨 역시도 최소 수십 구간은 뒤로 후퇴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계정 삭제나 다름없는 결과인 셈.
“무작정 샛별 마차를 끌고 가서 자폭하지 못하게끔 제약을 걸어 놓은 건가? 그렇다면 이것을 정말로 잘 조종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이우주의 말에 세 여자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지금 조종하고 있는 것은 무려 S+급 아이템, 위력도 어마어마하지만 패널티 역시도 어마어마하다.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리라.
“하, 하지만 이걸 어떻게 조종하지?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이우주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띠링!
새로운 스크린 창에 뜬 의문의 알림음이 이우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20마일 안쪽. 90도 이내. 지금 눌러!
어딘가 낯익은 아이피.
이 닉네임을 어찌 잊겠는가.
“어!? 그때 우리 도와준 사람이다!”
이산하가 소리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에 벌어졌었던 서큐버스 퀸 델라와의 레이드가 떠오르고 있었다.
-무명의 겜덕후 3021: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무명의 겜덕후 3021: 여자도 여자의 마음을 모르고 남자도 남자의 마음을 모르다니……
-무명의 겜덕후 3021: 어쩌면 그냥 타인의 마음 자체가 알기 어려운 것일지도.
-무명의 겜덕후 3021: 이번만 내 가르침을 줄 터이니 앞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 보시게 젊은이들ㅎㅎ
이우주 역시도 이 아이디를 알아보았다.
거인국에 오게 된 단초를 제공했었던 서큐버스 퀸 델라와의 격전에서 도움을 받았었던 채팅창의 현인(賢人).
그가 아니었더라면 히든 퀘스트 ‘동방박사의 선물’을 클리어하지 못했을 것이고 항아의 머리카락으로 활시위를 만들지도 못 했을 것이며 거인국으로 오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얻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어봤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무명의 겜덕후 3021: 이름을 밝힐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못 된다네.
-무명의 겜덕후 3021: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군.
-무명의 겜덕후 3021: 게임은 혼자서 하기에 좋은 놀이임과 동시에 여럿이서 즐기기 좋은 유희이지.
-무명의 겜덕후 3021: 자신의 내면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여러 사람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인문학의 장이라 이거지.
-무명의 겜덕후 3021: 타인과의 관계를 모두 포기하면 게임을 잘할 수는 있겠지만 즐길 수는 없어. 결코 정점에 설 수도 없지.
-무명의 겜덕후 3021: 진정코 게임을 즐기면서 정점까지 가고 싶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하네.
방금 전까지 수행이 모자랐다며 탄식하고 있던 이우주는 오래 전에 들었던 그의 조언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동시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
.
채팅창의 메시지 알림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rkpk vor a app 18을 참고해.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아, APP mode + 2nd AP engage도.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LAND3, Rollout and Flare Armed. Ra50dp flare 안되면 G/A. RA27에 Retard 안되면 A/T 끊고 Manual로 랜딩 가능.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바로 G/A해야 되면 오토랜드는 사실상 잘 안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종종 써야 할 때가 있지.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뎀2안에 존재하는 비행용 탈것들은 생물형이든 무생물형이든 전부 다 정기적으로 성능 점검 차 테스트 해야 해서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오토랜드 하지. 너희들이 지금 몰고 있는 샛별 마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것도 탈것으로 분류되니까 비슷할 거야.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1. PFD에 ILS CODE IDENTIFIED. 2. DEVIATION POINTER(LOC G/S) PROPERSIDE WITHOUT FLUCTUATION, 3, INTERCEPT HEADING. 4. APPROACH CLEARANCE OBTAIN. 이 4가지가 모두 다 확인되면 거침없이 APP MODE 버튼을 눌러도 좋아.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ILS신호가 identify되고 final app course에 intercept 할 수 있는 heading일 때를 잘 잡아봐.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로컬라이저랑 글라이드 캡쳐하고 활주로 헤딩 일치해?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CIIP같은 조건 달려있지? Clearance obtained, Intercept heading, Identified, Pointer displayed(localizer 및 glide slope) 말이야.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localizer를 캡쳐 할 수 있는 heading이야?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IAN 기능 있고 허가된 탈것은 RNAV 어프로치에서도 Approach mode를 사용할 수 있어. 아까부터 쭉 보니까 그 샛별 마차라는 것도 IAN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것 같던데? 아마 RNAV 어프로치할 때 어프로치 모드 누르면 LOC GS와 똑같은 모양으로 마젠타 다이아몬드가 뜰 거야.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물론 ILS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RNAV도 이제는 제법 정밀해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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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많은 조언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이우주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중에 걸러들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바로바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그야말로 목숨줄 그 자체와도 같은 조언이라는 것을.
물론 그 조언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기본이 되어야지만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어어? 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무명의 겜덕. 조언 고맙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외계어. 쓰는 것을 보니. HOXY 외계인?”
“우, 우주. 너는 알아들을 수 있겠어?”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
세 여자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이우주를 향한다.
채팅 내용들을 쭉 훑어본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쥐었다.
“……저 조언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세!”
모두가 이우주를 와락 끌어안는다.
이우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네 마리의 불개들을 컨트롤했다.
불개들의 체력, 허기짐, 기분, 스트레스 게이지 등등의 정보들이 수없이 많은 계기판을 통해 이우주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우주는 채팅창의 현인이 조언해 준 대로 레버와 버튼들을 조종했다.
이윽고, 고삐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불개들이 말을 듣기 시작한다.
“조, 좋았어! 궤도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이우주의 말대로 샛별 마차는 더 이상 심하게 요동치지 않았다.
난기류를 벗어나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는 네 마리의 불개들을 보며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처음치고는 제법 잘 하네. 사고도 안 내고.
채팅창의 현자가 한마디를 했다.
이우주는 저도 모르게 활짝 미소 지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나.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하지만 너무 들뜨지는 마.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는 사람들은 너보다 운전 실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야. 다만 너보다 운전을 많이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채팅창의 현자는 마냥 덕담만을 하지는 않는다.
때론 이처럼 날카로운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굴까? 전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느꼈는데.’
이우주는 채팅창의 현자 ‘무명의 겜덕후 3021’이 누구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탈것을 이렇게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지? 대체 누구이기에…….’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무명의 겜덕후 3021(124.91): 이제 진짜 라스트 스퍼트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힘내라 요 깜찍한 비행 청소년들아!
언제나 묵묵히, 뒤에서 응원해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