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0화 부당거래 (1)
그 뒤로 시간이 꽤 흘렀다.
[그르르르……]
[크르릉-]
[컹!]
외성의 문지기 케르베로스는 오늘도 성벽 앞을 순찰하고 있었다.
비록 평생 성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문지기 신분이지만 그는 마왕성 내부에서 대단히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몸이었다.
깐깐한 성격, 성실한 태도, 높은 지능, 강력한 전투력.
거기에 낯선 침입자가 주는 불결한 음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까다로운 입맛까지.
케르베로스는 비록 위험등급이 A+등급이기는 했으나 문지기로 있을 때만큼은 S급이나 다름없는 초고위마물인 것이다.
[……!]
[……!]
[……!]
그런 케르베로스가 문득 성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문 앞에서 한 병사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공무원이었다.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는 그 모습에 케르베로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맨날 야근을 하는군,]
[성실한 모습 보기 좋아.]
그러자 신입 문지기는 빠릿한 태도로 경례를 하면서 말했다.
“앗! 아닙니다! 케르베로스 님! 제 일인걸요!”
[좋아. 그런 마음가짐.]
[아주 훌륭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라고.]
케르베로스는 세 개의 머리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휴. 깜짝 놀랐네. 진짜 내 일 보는 중이었는데.”
신참 문지기 이우주는 종이에 적던 것을 슬쩍 다시 꺼낸다.
방금 전까지 종이에 끄적이던 것은 파이몬 성 안으로 침투할 공략이었다.
그때.
“어이! 동생!”
“순찰. E. N. D.”
“외성벽 순찰 다 돌았어. 이제 일일퀘스트 끝이야.”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가 성벽 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파이몬 성을 지키는 문지기 공무원이 된 이후 그들은 한동안 성벽 순찰과 경계임무라는 일일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또 의외로 경험치랑 보상이 은근 꿀이라서…… 안 하면 손해랄까?”
“평생. 이것만. 해도. 좋을 것 같다. 이것이. 공무원의 메리트?”
“우리 근무지 운이 좋았어. 저 안쪽 내성으로 발령받으면 업무량이 헬이라더라.”
셋은 이제 거의 완전한 공무원 마인드가 된 것 같아 보인다.
이우주는 그런 세 여자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건 됐고.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뭔 부탁?”
“떡 말야! 만들어 와 달라고 했잖아!”
“아, 맞네.”
이산하는 뿔테안경을 고쳐 쓰더니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신입 문지기의 시보떡> / 재료 / D
새롭게 임용된 공무원이 선배들에게 돌려야 하는 떡이다.
싸구려일 경우 선배들에게 미움받을 수 있다.
-미움받을 용기 +1
그것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예쁜 떡이었다.
겨잣가루와 꿀을 잘 조합해서 만든 이 꿀떡을 보며 이산하는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선배님들이 좋아하실까? 요즘은 시보떡 말고 피자를 돌리거나 치킨을 쏘거나 한다던데. 요즘 누가 촌스럽게 떡 돌리냐고 하면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떡 모양이랑 색깔을 조금 더 예쁘게 해서 재료 등급을 올려볼 걸 그랬…….”
“아오! 됐어! 이만하면 됐다고! 진짜 공무원이라도 된 거야? 왜 이렇게 과몰입해!”
이우주는 이산하의 손에서 떡을 빼앗았다.
이윽고, 이우주는 수면제인 바곳을 꿀떡 안에 몰래 집어 넣었다.
이제는 정말 케르베로스에게 떡을 먹이는 일만 남았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성문 앞에서 케르베로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케르베로스 선배님…… 아니 그 녀석은 언제 오지?”
“성 한 바퀴 돌고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어.”
“초과근무. 찍고 갔나?”
“야무지게 찍고 가더라.”
어차피 가만히 죽치고 있어도 호봉은 오른다.
업무량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성 안쪽으로 침투하는 것이 목적이니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내.
[어이- 신참들.]
[업무는 잘하고 있느냐.]
[퇴근하기 전에 결산보고 올려라.]
케르베로스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우주는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케르베로스의 앞으로 공들여 준비한 시보떡을 내밀었다.
“케르베로스 님! 이거…….”
이우주가 막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크르릉- 뭐냐? 시보떡이냐?]
[요즘 애들은 다 상품권이나 다른 예쁜 먹거리로 주던데.]
[보기보다는 센스가 없구나, 너?]
케르베로스는 이우주가 내민 떡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낼름-
이우주의 손바닥 위에 있는 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나는 떡 같은 건 별로다.]
[신입 성의를 봐서 하나 정도는 먹어 주지.]
[남은 건 다른 문지기들 나눠 줘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케르베로스는 성벽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가는가 싶더니.
[흐아아암- 오늘은 왠지 눈이 감기네.]
[신입아. 오늘치 초과 근무 찍어 놔라.]
[사우나나 가서 한숨 자야겠…….]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네 사람은 케르베로스가 완전히 수면 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했다.
“저 자식, 콱 잡고 가면 안 되냐?”
“데미지가 들어가면 상태이상이 풀려 버려. 소란 일으키지 말고 들어가자.”
“싸우러 온 것 아니다. 무역을 위해 온 것.”
“문 열게 지금.”
죠르디가 열쇠를 가지고 정문을 열었다.
이윽고, 네 사람은 파이몬 성 안으로 통하는 정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이산하는 의기양양한 어조로 손뼉을 쳤다.
“자~ 드가자~! 선수입장!”
한국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언젠가는 한번쯤 꼭 외쳐 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 * *
따라다라딴~♪ 따라라라~♬
“뭔 BGM이야 이거?”
“러브하우스라고. 2000년대 유행했던 방송의 BGM이야. 곡명은 ‘미술관 옆 동물원’의 OST인 ‘시놉시스’지.”
“……왜 그렇게 잘 알아? 너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데.”
“새로운 맵으로 갈 때 종종 들어본 적 있는 노래라서 찾아봤지.”
이산하와 이우주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안으로 들어간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레드 카펫이 내성 안쪽까지 쭉 깔려 있다.
그 위로 한 발을 내딛자.
[외성의 하급 문지기들이 감히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네 사람의 귓가로 웅웅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과거의 유튜뷰 동영상을 통해 이우주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파이몬. 루시퍼 산하의 S급 몬스터다. 오른팔 격이로군.”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레드카펫 위를 계속 걸어간 끝에 이 성의 진짜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높은 옥좌 위에 걸터앉아 있는 미소년.
<파이몬 왕> -등급: S / 특성: 악마, 어둠, 하수인, 고생물, 매혹, 싸움광, 예술가, 절대음감, 솔리스트, 프리마돈나, 소매치기, 자연재해, 1:1, 백전노장, 뽐내기, 하극상,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젠틀맨 퍼스트, 무사고 운전
-서식지: 거인국 ‘파이몬 성’, 세계수해
-크기: 1.5m
-가장 위대한 악마가 지상으로 추락할 때 쪼개져 나온 파편들 중 하나.
태초의 시절부터 샛별을 보좌해 왔던 고귀한 악마이다.
여자의 모습을 한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어리고 나약한 미소년의 몸을 빌려 전생하는 습성이 있다.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가 오른팔로 인정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오만의 군단 내에서 약 40여 개의 몽마 군단을 지휘하고 있으며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악마와는 라이벌 관계이다.
오만의 군단 내의 서열은 공동 2위로 사실상 가장 악마성좌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존재.
그는 바로 그 이름도 위대한 ‘파이몬 왕’이었다.
작은 머리 위에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큰 왕관.
왕좌에 덮여 있는 두터운 낙타 가죽 위에 무료하다는 듯 누워 있는 모습이 퇴폐적이다.
[너희들은 뭐냐? 뭔데 감히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느냐?]
파이몬은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우주는 그 앞에서 잠시 지난날을 생각했다.
<서대륙의 ‘세계수해’가 ‘오만의 군단’ 소속 고위악마 ‘파이몬 왕’에 의해 불타 버렸습니다>
20여 년 전, 서대륙의 그린헬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강력한 악마.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세계수 역시도 이 파이몬 왕의 힘 앞에서는 결국 기둥뿌리가 뽑히고 말았었다.
‘……영상 속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군. 격이 달라.’
보스 몬스터가 뿜어내는 기운을 흔히 ‘피어(fear)’라고 부른다.
대중매체에서는 강대한 적 앞에서 몸이 얼어붙고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을 일컫는데 이것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의 몸을 무겁게 만들고 피부를 저릿하게 하며 나아가 HP를 조금씩 조금씩 감소시키는 것으로 표현한다.
‘파이몬. 역시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군. 절대로 방심할 수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짓누르는 피어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거대한 몸집의 아르파닉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살벌했다.
이우주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다른 세 여자들도 하고 있었다.
“으윽! 몸이 굳어서 안 움직여!”
“플레이어. 행동불가. 마비 상태.”
“……싸우면 무조건 죽겠군.”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눈앞에 있는 이우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피어를 뚫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털썩!
별안간 이우주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
파이몬이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이우주는 카펫 위로 고개를 숙인 채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옥을 다스리는 위대한 대왕을 뵙습니다. 더러운 용들에게 등을 돌린 채 북서쪽을 보고 당신을 향해 경배를 드립니다. 저를, 우리를 당신의 의지로 묶으시고 세상 모든 비밀을 밝혀 주시며 부와 명예와 좋은 벗들을 주소서. 앞으로 영원토록 당신의 영예 안에 살게 하소서.”
그것은 델라에게 고위마족 예법 강의를 받은 결과였다.
그러자.
-띠링!
<‘파이몬 왕’의 호감도가 대폭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증가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파이몬이 입을 열었다.
[호오- 고전적인 인사법이로군. 고전은 좋은 것이지. 이는 필시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온 고위 마족들 간의 전통 예법이로다. 너는 왕족이냐?]
“아닙니다.”
[하급 문지기가 어찌 이런 예법을 알고 있는 것이지? 갸륵하고 또 신기하구나. 가까이 오너라. 알현을 허락해 주마.]
일단 파이몬의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파이몬은 변덕이 심하지. 저 흥미가 사라지기 전에 쇼부를 봐야 해.”
이우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이 먼 곳까지 파이몬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대왕과 거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와? 거래를? 너희들이?]
파이몬은 실소를 머금었다.
눈앞에 있는 하잘것없는 것들이 감히 찾아와 거래를 하겠다니 기가 찰 수밖에.
하지만 이우주가 보여 주었던 예법과 예절이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파이몬은 몇 초 정도를 더 만남에 할애해 주는 아량을 선보였다.
[네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리고 그 이전에, 무엇을 바치려 하느냐?]
얼마나 값나가는 것을 가지고 왔기에 감히 그런 요구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내.
“대왕께 꼭 바치고 싶은 물건이 있지요.”
이우주는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선보였다.
-<생생한 황금룡의 용옥(龍鈺)> / 재료 / S
금빛 비늘을 지닌 용의 심장.
막대한 마나가 응집되어 커다란 구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찬란하고 생동감 있는 빛을 내뿜는다.
-특성 ‘고생물’ 사용 가능 (특수)
※이 아이템은 강화석 대신 사용이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강화석과는 혼용이 불가능합니다
팟- 하고 뿜어져 나오는 태양의 황금빛.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땅그랑!
파이몬은 삐딱하게 쓰고 있었던 왕관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것을 어, 어디서 났느냐!?]
방금 전까지의 그 무료하고 오만하던 태도는 간 곳이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