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4화 거인국(巨人國) (4)
<히드라 ‘성체(幼生體)’> -등급: S / 특성: 무한성장, 백전노장, 과식, 맹독, 고속재생, 마법 면역, 살금살금, 압궤, 만근추, 구두룡(九頭龍)
-서식지: 거인국, 용자의 무덤 107층
-길이: ?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신화 속의 뱀.
성장폭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거인국의 드넓은 필드를 지배하는 보스 몬스터.
하늘에 닿을 것처럼 크고 드높은 초승달 사구의 터줏대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르르르르……]
독성 가득한 침이 여덟 개의 턱 아래로 질질 흘러내린다.
부글부글 끓는 침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모래바닥에 구멍이 푹푹 뚫렸고 자욱한 독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 으아악! 이게 뭐야!? 몬스터야!? 지형지물이 아니고!?”
이산하가 기겁을 했다.
나름대로 많은 S급 몬스터를 상대해 봤던 그녀조차도 이렇게 놀랄 정도로 히드라는 거대했고 또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우주는 식은땀을 삼키며 마른침을 흘렸다.
“저게 히드라인가. 아빠조차도 끝끝내 정공법으로는 넘어서지 못한 S랭크 최악의 벽!”
“야, 너 뭔가 반대로 흘리고 있지 않아? 방금 뭘 삼킨 거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누나. 온다!”
이우주는 이산하의 멱살을 잡고 뒤로 빠졌다.
…콰쾅!
히드라는 여덟 개의 머리로 곧장 돌격해 왔고 방금 전까지 이우주와 이산하가 서 있던 자리를 일격에 초토화시켜 버렸다.
“……과연 전투본능만 남은 살인기계. 오로지 자신만을 제외한 모든 데이터를 말살 소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답군.”
이우주를 비롯한 네 사람은 재빨리 사구를 등지고 뛰었다.
모두가 직감한 것이다.
‘이 괴물과 정면승부 해서는 승산이 없다.’
아니, 승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생존 확률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아아아아악!]
여덟 개나 되는 머리들이 필드 전체를 조여 온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머리 하나가 입을 쩍 벌리고 날아들어 솔레이크의 등 뒤를 노린다.
“으윽! 이건 Danger! Must! 피해야!”
솔레이크는 샌드골렘 하나를 소환했지만 그것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히드라의 독액에 순식간에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그 뒤를 이어 몸통박치기 한 방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치이이이이익-
골렘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마치 뜨거운 스푼에 닿은 아이스크림 표면처럼 녹아내린다.
후두둑- 뚝- 뚝- 뚝-
히드라는 용암처럼 변해 녹아내리는 사구의 위로 여덟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빨 사이사이로 녹아내린 암석과 모래들이 즙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용암지대에서 싸우는 것 같네.”
이우주는 이를 악물었다.
지형은 히드라의 강력한 턱 힘에 깨물려 부서지기 전에 앞서 놈이 내뿜는 지독한 독기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뜨겁기도 뜨겁거니와 강력한 독성까지 퍼져 나가고 있어서 오히려 용암보다도 더욱 까다로웠다.
“……지금까지 봤던 지형 변화들 중에 가장 최악인데.”
“히드라. 무섭다. 최악의 S급.”
“이건 진짜 위험한데.”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지옥견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낑낑거리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이우주 역시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빠도 용자의 무덤에서 이 녀석을 만났었지. 그때는 정말로 위험했댔어. 코너까지 몰렸다가 꼼수를 써서 겨우 잡았다고 했었지. 피구처럼 금을 밟게 해서 룰 위반으로 죽였다고 했었나?”
하지만 이곳 거인국은 무법천지, 그런 평화적인 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깨갱!]
[캬아아악!]
[컹! 꺼어어어엉!]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를 노리고 슬금슬금 다가오던 지옥견들은 모조리 히드라에게 물려 죽는다.
하나하나가 만만하지 않은 지옥견들이라고는 해도 이곳에서는 평범한 일반 몹, 필드 보스에게 항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캥!]
가름 한 마리가 히드라에게 잡아먹힌다.
다른 개체들보다 덩치도 훨씬 큰 것이 거인국 밖으로 나가면 한 던전의 주인 정도는 너끈히 해 먹을 수 있었겠지만.
으드득- 으득- 뿌득! 우적우적우적……
히드라에게는 그저 한입의 식삿거리에 불과했다.
가차없이 죽어 나가는 지옥견들을 뒤로한 채 네 사람은 계속해서 도망쳤다.
“과연, 악마족이 점거한 땅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용 계열 몬스터답군. 생태계의 정점에 있을 만해.”
이우주는 뒤에 있는 모래의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간 수많은 악마들이 초승달 사구의 이 터줏대감을 어찌 해 보려고 했다가 실패했을 것이다.
“아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히드라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뎀1의 거인대왕 이스비브놉뿐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이제 없지.”
“그, 그러면 어떡해?”
“어떻게 하긴. 일단은…….”
이산하의 울먹임에 이우주는 눈을 빛냈다.
“일단은 아빠가 썼던 공략으로 잠시 시간을 벌어볼까?”
이우주가 향하고 있는 곳은 황무지 위에 높게 솟아 있는 버섯바위 숲이었다.
바람이 하단부를 깎아내 버섯과도 같은 모양이 된 바위들이 빼곡하게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지형.
타타타탁!
이우주는 이 암초숲으로 뛰어 들어왔다.
“히드라는 머리가 많아서 이렇게 좁고 빽빽한 곳에서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오오! 과연!”
“역시 Brain!”
“믿음직스러워!”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 역시도 이우주를 따라 암초숲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히드라는 바위숲에 들어오자 이동속도가 많이 줄었다.
이우주는 히드라의 앞에서 바위와 바위 사이를 오가며 시선을 교란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빠의 공략을 사용한다! 히드라의 목을 꼬이게 만들어서 매듭을 짓게 만드는 거야! 바위든 자기들끼리든 어디든 간에!”
머릿속에서는 오래 전, 용자의 무덤을 공략하던 아빠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때? 나의 십생크 매듭 솜씨가. 이 십생크야!’
십생크 매듭, 일명 줄임매듭.
긴 로프의 길이를 줄일 때 임시방편으로 사용하기 좋은 매듭이다.
이우주는 아빠의 몸놀림을 그대로 흉내 내며 히드라의 머리들을 이리저리 꼬이게 만들었다.
‘핫하! 이것은 스퀘어 노트 매듭! 이것은 오버핸드 노트 매듭! 이것은 보라인 매듭! 이것은 러닝 보라인 노트 매듭! 이것은 시트 밴드 매듭! 이것은 더블 시트 밴드 매듭! 이것은 그래니 매듭! 이것은 카우 히치 매듭! 이것은 클로브 히치 매듭! 이것은 피셔맨 노트 매듭! 이것은 라인 노트 매듭! 이것은 8자 매듭! 이것은 걸상 매듭! 이것은……!’
다양한 매듭법이 나올수록 히드라의 목 길이는 점점 짧아진다.
쉬이이이익!
지독한 독기를 뿜어내던 입이 어느덧 뚝 멎는다.
매듭이 지나치게 꽉 조여졌기 때문에 독기가 올라오다가 목젖 부근에서 걸린 것이다.
“좋았어! 이제 자기들끼리 엉켰으니 한동안은 풀지 못해! 여덟 머리들이 제각기 따로 놀려고 할 테니까…… 음!?”
하지만, 이우주의 예상은 빗나갔다.
츠츠츠츠츠츠……
여덟 개의 머리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와드드득!
매듭지어 엉켜 있던 머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뜯겨 나가 버렸다.
츠츠츠츠츠츠츠츠……
모조리 뜯겨 나간 여덟 머리들은 이내 구두룡 특성에 의해 16개의 머리로 변해 새로이 돋아났다.
그리고.
“…….”
“…….”
“…….”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의 시선은 여덟 머리들을 단숨에 뜯어내 버린 그림자로 향했다.
아홉 번째 머리.
다른 그 어떤 머리들보다도 거대한 머리가 꼬리 쪽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빅 헤드(BIG HEAD)’, 아홉 번째 머리.
모든 머리들 중 가장 강한 이 녀석이 모두의 앞으로 흉측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으악! 저게 뭐야! 사람 얼굴 같잖아! 징그러워!”
이산하가 화살을 쏘아 봤지만.
텅-
두개골처럼 단단한 비늘 표면을 맞고 맥없이 튕겨져 나갈 뿐이다.
“마, 말도 안 돼. 깡공격력만 3,500짜리 활인데…….”
그뿐인가? 유극두피 악령의 머리숱 투구와 봉시장사의 장갑까지 더해진 이산하의 공격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하지만 히드라 빅헤드는 정말로 강해서 그 정도의 수준으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듯했다.
더군다나.
…차악!
빅헤드가 나타난 뒤부터 작은 머리들은 눈에 띄게 일사분란해졌다.
방금 전에 뜯어 먹힌 여덟 머리들을 봐서인지, 새로 돋아난 열여섯 개의 머리들은 빅헤드의 명령에 따라 착착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망했다! 저 녀석들 이제 바위숲 사이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여! 빅브라더…… 아니 빅헤드가 완전히 쥐락펴락 하고 있잖아!”
이산하의 말대로였다.
빅헤드 하나의 완전한 지배와 통솔 하에 다른 머리들은 전처럼 허둥대지 않는다.
겨우겨우 자기들끼리 매듭을 짓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도 빅헤드의 명령에 의해 금세 풀려 버린다.
바위에 묶인 매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람에도 깎여 나가는 버섯 바위 따위는 빅헤드의 용트림 한 방에 모래알처럼 부서져 버렸으니까.
이신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끼리 단합 엄청 잘 되네. 마치 한 몸뚱이 같잖아…….”
“한 몸뚱이 맞다. 예전과는 다르다. 차원. 움직임. 기민하고 신속. 빅헤드의 통제. 압도적.”
“아까 전에는 그래도 8개의 머리가 제 잘난 맛에 설치는 감이 있어서 빈틈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안 보여. 매듭 공략도 안 통하겠는데?”
실로 완벽한 공방일체.
빅헤드의 통제 하에 움직이는 열여섯 개의 머리는 좁쌀만큼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겨우겨우 상대해 잘라 낸 머리는 계속해서 둘로 증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머리 역시도 빅헤드의 통제하로 들어가 그야말로 완벽한 콤비네이션을 보여 준다.
“제기랄! 빅헤드 녀석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히드라는 못 잡아! 그렇다고 빅헤드를 잡을 수도 없는 게 저놈은 엄청 강하니까…….”
이산하의 말대로였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난관.
……그러나.
“찾았다.”
이우주는 결국 발견해 냈다.
“아빠의 공략을 따라하다 보니 알게 되었어. 가능할 것도 같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공략법.”
아빠를 뛰어넘기 위한 아들의 도약.
그것은 아빠조차 감히 성공해 내지 못했던 초고난이도의 과업을 앞두고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우주는 빅헤드와 그 산하의 수많은 머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원 포 올(One For All)’이 아니라 ‘올 포 원(All For One)’ 그 자체이지?”
이윽고, 이우주의 입에서 단호하면서도 결연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런 너희들에게 참된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뭔지 알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