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76화 (976/1,000)

외전 102화 거인국(巨人國) (2)

이산하는 ‘서큐버스 퀸의 알현’ 주문서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있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일반적인 주문서는 찢었을 때 효과가 발동되는 1회용 구조이다.

꾸구구국……

하지만 이 주문서는 상당히 질겨서 어지간한 힘으로는 찢어질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이 주문서를 찢기 위해서는 뭐 특수한 가위가 필요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또 분량 노가다를 시키지는 않겠지?”

고민하고 있는 이산하에게 이우주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델라에게 주문서 사용법을 들었거든.”

“오? 어떻게 하는 건데?”

“간단해. 특수한 자세를 취하면서 특수한 시동어를 외치면 돼.”

이윽고, 이우주는 세 여자들에게 주문서를 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자. 먼저 태양이 있는 방향을 향해 똑바로 기립. 그 다음에는 발을 가지런히 붙여서 모아. 두 손은 양쪽 옆, 대각선 위로 쭉 뻗고.”

“……이, 이렇게?”

“이상한 자세. 집착한다. 역시 전직 서큐버스 퀸.”

“꼭 이런 모션을 취해야 하는 거야?”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 역시도 이우주를 따라 요상한 자세를 취했다.

모두가 지면 위에 Y자 모양으로 서 있는 자세가 되자 비로소 이우주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는 고개를 들고 태양을 바라봐. 그리고 외치는 거야.”

샛별 주제에 태양을 시기했던 악마.

태양을 향해 비뚤어진 열등감과 소유욕을 불태우고 있는 오만의 성좌.

용의 적대자 루시퍼.

이번 대격변의 메인 테마인 이 고정 S+급 몬스터를 향해, 네 사람은 힘차게 외쳤다.

“태. 양. 만. 세!”

Praise the sun!

∖∖[+]∕∕, ∖∖[+]∕∕,

∖∖[T]∕∕,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시동어를 외치는 순간, 눈앞에 있던 주문서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띠링!

<주문서가 작동됩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알림음과 함께.

…파앗!

모두의 몸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       *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이동한 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거대한 폭발이라도 있었던 듯 푹 패인 크레이터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곳.

잿가루와 유리 알갱이로 변한 지면의 흙 사이사이에는 그 흔한 잡초나 벌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띠링!

<히든 던전 ‘거인국(巨人國)’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

.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땅 ‘거인국’.

서큐버스 퀸의 주문서는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를 바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황량하네.”

이산하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말라죽은 나무뿌리 한 가닥조차도.

휘이이이잉-

그저 바싹 마른 칼바람만이 잿가루와 먼지를 풀풀 날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우주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바산(Bashan)’. 한때는 용과 악마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성했던 거인족의 나라지. 물론 지금은 오래 전에 멸망해서 사라지고 없지만 말이야.”

“오, 나도 안다. 20년쯤 전. 최후의 거인. 이스비브놉. 사탄에게 몸을 뺏겨 사망. 그 이후로 거인족. 완전 멸종.”

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설명을 마쳤다.

이윽고.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전설의 뒷페이지에 파묻혀 버린 이 망국의 영토로 첫 발을 디뎌 놓았다.

이우주가 말했다.

“안 그래도 거인국은 악마들의 침공으로 인해 한 번 멸망했었는데…… 그 뒤에 아빠가 사탄과 싸우느라 한 번 더 쑥대밭이 되었다고 들었어.”

아주 옛날에 유튜뷰에 올라간 동영상.

이우주는 아빠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개체값만으로 따지면 7대 악마를 통틀어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사탄과 1:1로 팽팽하게 맞붙어 싸우던 그날의 아빠를 말이다.

“그때의 아빠는 정말 엄청났지. 먼 옛날의 저화질 동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박력과 전율이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었어.”

이우주는 눈을 감은 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언젠가는 아빠의 벽을 꼭 넘어서 보이겠어.”

머릿속에서는 사탄을 쓰러트린 아빠와 그 너머로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알림음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세계 최초로 ‘사탄’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 세상 모든 악마들이 당신의 업적을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용들이 당신의 업적을 경외시합니다>

<거인국이 멸망했습니다>

<‘거인’이라는 종족이 완전히 멸종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화재들이 일시에 소화됩니다>

<불 속성 몬스터들의 공격력이 1랭크 하락합니다>

<분노조절장애 특성을 보유한 몬스터들의 스킬이 사라집니다>

<현 시간부로 월드맵에서 ‘거인국’은 진입불가지역으로 설정됩니다>

.

.

그때, 이산하가 이우주의 상념을 깼다.

“아, 그 동영상 나도 봤어. 아빠랑 드레이크 삼촌이랑 윤솔 이모가 사탄 잡을 때의 영상 말이지? 그거 완전 꿀잼이었지.”

발랄하게 말하던 이산하는 문득 턱을 쓰다듬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네. 분명 그 동영상에서 떴던 알림음이 이렇게 말했는데? ‘현 시간부로 월드맵에서 ‘거인국’은 진입불가지역으로 설정된다’라고. 그 뒤로 거인국은 플레이어 출입불가지역이 되었잖아? 근데 우리들은 어떻게 여기로 들어올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주문서가 있었다고 해도.”

“아빠가 뎀2의 세계관 속에 100%는 없댔어. 개발자들은 다양성의 보장을 위해서 늘 약간의 확률을 여백으로 남겨 놓는다고 들었거든.”

뎀2는 언제나 늘 다양성을 존중한다.

옳을 수도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옳지만 틀릴 수도 있다.

틀리지만 옳을 수도 있다.

판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옳지만 판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틀리지만 판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옳거나 틀리거나 판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참고로 이 역시도 아빠가 심록용 브라키오를 잡을 때 했던 말이지.”

“……너는 진짜 게임 오타쿠인지 아빠 오타쿠인지 모르겠다.”

이우주의 말에 이산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유령 군마를 타고 앞서 걷던 죠르디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오, 저기 지평선 너머부터는 크레이터가 끝나나 보군. 나무들이 보여. 불타 죽은 나무들이기는 하지만.”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걷던 곳은 사탄이 자폭하면서 만들어 놓았던 거대한 자국이었다.

이우주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의 폭발이 만들어 놓은 크레이터는 거의 미국의 국토만 한 면적이라고 들었는데. 주문서가 우리를 크레이터 정중앙에 떨궈 놓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우, 그러게. 그걸 걸어서 횡단하려면 몇 달은 걸렸겠다.”

이산하 역시도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고사목들의 숲을 보면서 말했다.

한편, 솔레이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폭발흔을 돌아보며 눈물지었다.

“……옛날. 이곳에서 파파가 돌아가셨었다.”

과거 사탄 레이드 당시 드레이크가 사탄과 함께 자폭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산하와 이우주 역시도 숙연해졌다.

“맞아. 아빠가 그랬어. 그때 드레이크 삼촌이 목숨을 버려 가면서 모두를 지켜 주지 않았다면 사탄 레이드는 실패했을 것이라고.”

“나도 영상으로 봤어. 정말 용감하셨지.”

둘의 말을 들은 솔레이크는 눈물을 훔쳤다.

“이곳에서 장렬하게 산화. 파파의 Last 모습. 잊지 못한다. 나를 키우느라. 파파는 늘 희생. 나의 영웅.”

“솔레이크…… 너는 효녀구나.”

“나도 보고 배워야겠어.”

이산하와 이우주는 그런 솔레이크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따르릉-

솔레이크의 옆으로 스크린 하나가 떴다.

외부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메시지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솔레이크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어, 파파. Today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 Why? 싫다. 오늘 친구들이랑 레이드. 캡슐방에서 밤 샐 것. 파파. 너무 단속 심하다. Like 꼰대. 맨날 통금 타령. No 개방적. 미국인답지 않다. 유교 탈레반. ……What? Today가 파파의 생일? 흠. 알겠다. 그렇다면 다르다. 얘기. 울지 마라. 그럼 자정이 되기 전에는 들어간다. 케이크 사 간다. 그럼 바쁘니까. 안녕!”

“솔레이크…… 너는 효녀구나…… 불꽃처럼 뜨거운 효심을 지닌 불꽃효녀…… 불효녀…….”

“나도 보고 배우지 말아야겠어.”

바로 그때.

“다들 스톱! 조심해!”

앞서 사주경계를 보던 죠르디가 깜짝 놀라더니 자세를 낮춘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의 시선이 죠르디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향했다.

“……!”

“……!”

“……!”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긴 곡선 하나가 보였다.

불의 궤적.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불길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선이 하늘의 저쪽 끝에서 반대쪽 끝을 향해 그어지고 있었다.

마차(馬車).

그것이 바싹 마른하늘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산하가 중얼거렸다.

“설마 유튜뷰 방송에서 본 그건가? 아빠가 처치했다던 아몬 후작, 그것이 모는 불의 마차가 거인국의 상공을 배회한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아몬 후작은 이미 죽었잖아. 그리고 저건 모양이 조금 달라.”

이우주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차가 그려내는 불의 궤적을 쫓았다.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야. 저 궤적은 외따로 떨어진 하늘의 구석에서 시작하고 있어. 저곳은 샛별이 뜨는 곳이야!”

지금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불의 궤적은 샛별이 뜨는 곳에서 시작해 해가 지는 곳으로 가고 있다.

“마치 태양을 흉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저것은 루시퍼의 마차가 틀림없어!”

“……잘 됐군. 저 마차를 쫓아가다 보면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겠지.”

이우주의 말을 들은 죠르디 역시도 서슬 퍼런 눈빛을 빛낸다.

바로 그때.

“저기.”

솔레이크가 모두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해맑은 표정으로 갑자기 퀴즈 하나를 냈다.

“루시퍼. 하니까 생각났다. 루시퍼는 샛별이라는 뜻. 샛별은. 우리말로. 개밥바라기 별. 다들 아나? 이게 무슨 뜻인지?”

“……갑자기?”

이산하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자 솔레이크는 어딘가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개밥바라기 별. 샛별. 저녁에 뜬다. 개가 배가 고파서 밥을 바랄 무렵에. 그래서 이름. 개밥바라기.”

“그래? 몰랐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이산하가 다시 한번 묻자.

“……저기.”

솔레이크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리고 솔레이크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산하, 이우주, 죠르디의 뒤에는.

[그르르르르르르……]

어느새인가 나타난 수많은 들개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개. 밥 바라는 듯?”

거인국에 오자마자 거한 환영인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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