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5화 금 따는 콩밭 (6)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3월 31일-
-번이 사라졌다.
“…….”
“…….”
“…….”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일지가 적힌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4월 10일-
-땅을 떼였다.
당연한 일이다. 있지도 않은 금줄을 잡겠다고 멀쩡한 콩들을 죄다 갈아엎고 구덩이만 파헤쳐 놓았으니.
농장주는 당장 짐을 싸서 꺼지라고 했다.
나는 구덩이로 내려와 짐을 챙겼다.
그 와중에도 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이고, 번이 도망갔구나. 그러게 왜 땅을 팔 때마다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모든 걸 다 번에게 떠넘겼어.”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로군.”
“쓰레기다.”
“이제 일지도 얼마 안 남았네.”
솔레이크가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4월 14일-
-번은 사라졌다.
피도, 싸운 흔적도 없다. 마치 하늘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나는 땅을 떼인 뒤에도 사흘간 남아 기다려 보았지만 번은 끝끝내 되돌아오지 않았다.
놈은 모든 짐을 내팽개쳐 놓은 채 달아난 것이다.
그 뒤부터는 필적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변해 있었다.
날려쓴 글자 하나하나에서는 지독한 광기가 느껴졌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4월 14일-
-번. 네놈은 선량한 농사꾼이었던 나를 꾀어내 황금의 저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말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너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잡히기만 해라. 죽여 버리리라.
땅을 떼인 것도, 아내가 떠난 것도, 내가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된 것도 모두 다 네놈 탓이다.
죽여 버리겠다.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네놈만은 반드시 잡아서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주리라!!!
“우와, 이 자식 드디어 미쳤구만.”
“엄청난 분노가 느껴지네.”
“끝까지 남 탓. 추하다.”
“아내가 떠난 것은 번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이윽고, 죠르디가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일지의 마지막은 비교적 평범한 필체로 되돌아와 있었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4월 30일-
-나는 이제 이 구덩이를 떠난다.
이 구렁텅이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려 한다.
땅도 잃고 콩도 잃고 아내도 잃고 친구도 잃은 채, 아무것도 파내지 못하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훗날 이곳을 파 내려올 멍청이들이 있을까 싶어 이 일지를 이곳에 묻어 놓고 간다.
만약 당신들이 금을 찾고 있다면 나는 시간낭비 하지 말라는 말 외에는 해 줄 말이 없다.
……그리고 번, 만약 네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나는 네가 좀 더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일지의 끝이었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혀를 끌끌 찼다.
“결국 우정의 끝에는 씁쓸함만 남았구만. 번은 그럼 튄 거야 결국?”
“으음…… ‘금 따는 콩밭’에서는 영식을 꼬드겼던 수재라는 친구가 도망가려는 마음을 품는 장면에서 소설이 끝나.”
“원래 투자할 때. 남의 말을 듣고 투자한다? 잘 되면 남 덕. 잘 안 되면 내 탓. 이 마인드가 중요하다. 그래야 인간관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반대로 한다. 쓰레기들.”
“다시 봐도 씁쓸하긴 하네.”
일지가 나왔다는 것은 이쪽을 계속해서 파 내려가다 보면 뭔가가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죠르디는 일지를 옆으로 던져 버린 뒤 계속해서 곡괭이질을 했다.
“나도 예전에 여기서 조금 더 파고 들어갔었어.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황금룡의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 물론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난이도가 너무 괴랄하게 높아서 실패했지만.”
“너 정도 레벨의 하이랭커가 솔플이 불가능할 정도면 정말 극악의 난이도인가 보군.”
“맞아. 무엇보다, 나는 저번 레이드에서 한번 실패하는 바람에 농장주 레글리에게 땅을 떼였어. 그래서 너희들의 명의를 빌어서 땅을 받은 거지.”
“이럴 때는 계정정보가 없는 편이 좋네.”
“맞아. 종종 의외의 곳에서 메리트를 찾는 편이지.”
이우주와 죠르디는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곡괭이질을 했다.
그때.
…퍽!
이산하의 삽 끝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오! 럭키! 뭔가 보인다! 역시 나야!”
운이 좋은 이산하가 제일 먼저 이변을 발견했다.
이산하의 삽 끝으로 보인 것은 불그죽죽하고 입자가 고운 황토였다.
지금까지 보였던 시커먼 흙덩이들과는 뭔가가 다르다.
“처음에 광부의 일지를 발견했을 때도 이런 흙이 나왔었지. 이 밑에 뭐가 있긴 있나 본데?”
이산하는 신나게 땅을 파헤쳤다.
그러자.
퍽! 퍼억! 퍼퍼퍽!
흙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졌다.
축축한 습기가 묻어나는 적색의 황토가 뿜어져 나온다.
“곱색줄이다! 정말 금광이 있나 봐! 알고 판 것이긴 한데 그래도 막상 보니까 엄청 기분이 묘하네 이거!”
“하디르에게는 아깝게 된 일이로군. 조금만 더 팠다면…….”
이산하의 외침에 이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는 순간.
…콰르릉!
별안간 지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골렘으로 흙더미를 떠받치고 있던 솔레이크가 구덩이 저 안쪽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북쪽으로 뻥 뚫려 있는 동굴이었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서둘러 흙더미들을 치우고 안쪽에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 속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이 발견한 것은…….
“세상에!”
엄청난 규모의 금맥(金脈)이었다.
번쩍번쩍 광채가 흐르는 순도 높은 금들이 동굴의 벽면 밖으로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과 백금들이 저 안쪽의 지하도를 온통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무너트리고 들어온 흙더미 너머에는 낡은 곡괭이와 해골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그 해골을 본 모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번. 이곳에 갇혔었구나.”
“끝끝내 나오지 못했나 보네. 하디르를 만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걸 보니 새삼 일지의 내용. 잔인하다. And. 슬프다.”
“친구들,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야.”
죠르디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해골만 남은 번의 시체를 한동안 뒤적거렸다.
“역시, 이곳에 재생성되어 있었군.”
이윽고, 죠르디는 번의 유해에서 아이템 하나를 루팅했다.
-<광부의 일기> / 재료 / S
광부 ‘번’이 남긴 금맥 탐사 일지이다.
그것은 하디르의 일지와 비슷한 느낌의 아이템이었다.
다만 하디르가 남긴 기록은 F급 판정을 받을 정도의 저등급 아이템이었으나 번이 남긴 기록은 무려 S급 취급을 받고 있었다.
<광부 번의 일지>
-날짜 모름--
-나는 이 구덩이 안에 갇혔다. 불의의 사고였다. 설마 하층의 지반이 이렇게나 약할 줄이야.
금줄을 잡은 것은 좋으나 그 소식을 이 흙더미 바깥으로 전할 방법이 지금의 내게는 없다.
부디 지상에 있을 나의 벗 하디르가 끝까지 나를 믿어 주기를, 나를 믿고 이곳까지 파 내려와 주기를, 나를 발견해 주기를.
제발.
“…….”
“…….”
“…….”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흙더미 밑 어둠에 생매장되어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였던 하디르가 얼마나 일찍 탐굴을 포기하고 떠나 버렸는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였는지 말이다.
“그런 것은 모르는 편이 더 낫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야.”
죠르디는 일지를 뒤로 한 장 넘겼다.
<광부 번의 일지>
-날짜 모름--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 깊은 굴속을 내 나름대로 돌아다녀 본 결과, 나는 이 깊디깊은 지저의 무저갱 속에 또 하나의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긴 시간 동안 이곳을 탐굴하며 발견한 특이한 지형이나 동식물들에 대해서 짧게나마 기록을 남겨 놓으려 한다.
일지는 상당히 두꺼웠고 기록된 내용들도 빼곡했다.
대부분은 미로처럼 되어 있는 지하굴의 지도와 그곳에 서식하고 있는 각종 기괴한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중간중간 번이 직접 그린 삽화가 들어 있기도 해서 앞으로의 탐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죠르디는 일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를 돌아보며 일지의 내용을 설명했다.
“이 일지는 밑에 있을 황금룡의 둥지로 통하는 길을 안내해 줄 거야. 이걸 소지하고 있으면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눈앞에 길이 보이거든. 만약 이 아이템을 줍지 않고 그냥 갔다가는 지저의 미로 속에 갇혀 버리게 돼. 참고로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한 채 지상으로 나가게 되면 일지는 자동으로 소멸되지.”
죠르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번의 유골을 다시 뒤져야 입수할 수 있어.”
“좋은 아이템이로군. 나도 시체를 발견하면 무조건 뒤져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현실에서는 모르겠지만 게임에서는 확실히 좋은 습관이지. 생존에 유리하니까.”
죠르디와 이우주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흙더미를 몇 번인가 뚫었고 사람 하나가 겨우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바위굴을 또 몇 번인가 통과했다.
야광 버섯들이 모여 있는 군락지를 지나 무너지는 토사와 암석들의 샤워를 피해 냅다 달렸다.
때로는 무저갱의 바닥에 생겨나 있는 깊은 호수를 건넜고 각도가 90도를 넘어 거의 바닥과 수평으로 되어 있는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어우, 아빠의 공략 동영상에서 봤던 ‘플로이드의 무덤’만큼이나 빡센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대멸종의 어머니들(Mothers of All Mass Extinctions)’이 봉인되어 있던 지하대분묘에 비할까.”
“좁다. 춥다. 어둡다. 힘들다. 최악의 탐굴 난이도.”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앗! 보인다! 저기야! 드디어 발견했다!”
길고 고된 탐굴 끝에 금줄을 잡은 광부처럼, 흥분에 가득 찬 죠르디의 탄성이 좁은 굴 안으로 울려 퍼졌다.
“……!”
이윽고.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의 앞으로 환한 빛이 비친다.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는 황금의 빛.
그것은 모두의 어깨를 육중하게 내리누르고 있던 무저갱의 어둠을 한 번에 걷어내 버릴 정도로 밝은 것이었다.
<미다스의 탑> -던전 등급: S
-무저갱 밑에 파묻혀 있는 황금의 탑.
과도한 욕심을 부린 광부들의 종착지이다.
드디어 ‘황금룡 아르파닉’의 서식지를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