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4화 금 따는 콩밭 (5)
-<광부의 일기> / 재료 / F
광부 ‘하디르’가 남긴 금맥 탐사 일지이다.
어디서 많이 본 아이템이 떨어졌다.
황금룡의 던전으로 향하는 첫 이정표.
“뭐야? F급 아이템? 잡템이잖아?”
“일지 아이템은 보통 그 자체의 등급은 낮지만 안에 꽤나 중요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금을 찾기 위해 파던 구덩이. 그 중간에서 발견된 F급 아이템. 뭔가 수상하다. 가치 없는 장소로 위장된 듯한.”
“눈썰미 좋네. 어서 열어 보자고.”
죠르디는 예전에 이미 한번 겪었던 과정이니만큼 능숙하게 일지를 회수했다.
이윽고.
펄럭-
일지의 겉장이 넘어가며 흙과 습기에 누렇게 빛바랜 페이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이 안에 금이 있는 것 같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가 발견한 일지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오, 예전에 이 땅을 팠었던 사람이 있었군.”
“이건 분명히 고전게임인 ‘엘 더 스X롤’ 시리즈에서 오마쥬해 온 게 틀림없어. NPC 이름이랑 상황이 거의 똑같잖아.”
“그 게임 나도 안다. 거의 똑같고 미묘하게 다르다. 이거 표절?”
“일단 페이지를 넘겨 보자고.”
모두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가운데 일지의 흙 묻은 페이지가 넘어간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2월 29일-
-나는 본디 금전에는 이력이 없었다. 그리고 흥미도 없었다.
다만 밭고랑에 앉아서 땀을 흘려 가며 꾸벅꾸벅 커피콩이나 딸 줄만 알았다.
……그날도 그랬다.
혼자 밭고랑에 앉아서 김을 매며 잘 열린 커피콩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옛 소꿉친구였던 번이었다.
“번이라. 이것도 ‘엘 더 스크X’에 나오는 NPC이름이잖아. 그나저나 왜 온 거지?”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자고 얼른.”
“뭔가 NOT 좋은 예감.”
“스포는 안 할게. 나는 이미 한번 봤던 거라.”
이산하는 흙 묻은 페이지를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3월 21일-
-번은 콩 농사는 안 짓고 늘상 금광판으로만 돌아다니던 친구였다.
녀석은 내게 말했다.
이 산 너머 큰 골에 광산이 있다고 한다.
광부를 삼백여 명이나 부리는 노다지판인데 매일 소출되는 금이 수백 돈을 넘는단다.
그런데 그 줄맥의 지류들 중 하나가 큰 산의 허리를 뚫고 내 콩밭의 밑으로 뻗어 나왔다는 것이었다.
“오! 나 같으면 한다! 콱 질러! 못 먹어도 고!”
“……나는 안 해. 불확실한 금보다는 확실한 콩 쪽을 고르겠어.”
“산하. 한방인생. 우주. 꼼꼼쟁이. 나는 선호한다. 성실한 남자를.”
“다음 페이지로 얼른 가 보자고.”
이번에는 이우주가 흙 묻은 페이지를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4월 10일-
-나는 일단 번의 제안을 거절했다.
본디 금광이라는 것은 칼 물고 뜀뛰는 것과도 같다. 잘 되면은 모르겠지만 안 되면 신세만 조핀다.
주변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번은 그 뒤로도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막걸리 한 병과 떡을 들고 와서는 일꾼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둥 남들은 금을 캐서 논을 사고 밭을 사서 팔자를 고쳤다는 둥 지껄여 댔다.
“오, 그래도 나름 자제력이 있는 친구였네. 쉽지 않은데~ 골드러시의 유혹~”
“유혹이 대단하겠지. 하지만 금광이라는 게 칼 물고 널뛰기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네.”
“일확천금. 모든 인류의 숙원. 비트코인과 주식, 부동산, 로또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뻔하지 뭐.”
솔레이크 역시도 흙 묻은 페이지를 넘긴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4월 14일-
오늘도 번이 떡과 술을 들고 찾아왔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보니 내 생각도 적잖이 바뀌었다.
1년 내내 죽어라 고생하고 소작료 내고 세금 내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끽해야 콩 몇 섬.
이것으로는 올 봄에 보낼 비료값, 품삯, 빚해 빚진 돈을 갚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차라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사내자식이 한번 해 봄직도 했다.
마침 아내가 옆에서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있기도 했고.
“흐음. 결국 하기로 했구나. 어떻게 됐을까?”
“누나는 교과서 안 봤어? ‘금 따는 콩밭’이라는 소설 말이야.”
“한방인생. Almost. 끝이 안 좋다.”
“한번 봤던 내용이라 그런가 더 씁쓸하군.”
죠르디는 혀를 차며 흙 묻은 페이지를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5월 15일-
-번의 제안에 따라 본격적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르끼하다.
밤과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겉으로 황토 장벽으로 앞뒤 좌우가 콕 막힌 좁직한 구뎅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브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곡괭이는 뻔질 흙을 이르집는다. 암팡스러이 내려쪼며 퍽 퍽 퍼억 이렇게 메떨어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 하고 벽이 헐린다.
바닥에서 물이 스미어 무르팍이 흔건히 젖었다.
굿엎은 천판에서 흙방울은 내리며 목덜미로 굴러든다.
어떤 때에는 웃벽의 한쪽이 떨어지며 등을 탕 때리고 부서진다.
“뭔가 우리가 땅을 팠을 때랑 비슷하네.”
“훨씬 더 처절해 보이기는 하는군.”
“빨리. Next 페이지.”
“오케이, 넘길게.”
이산하가 흙 묻은 페이지를 후다닥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8월 31일-
-번의 말을 듣고 땅을 판 지 어느덧 반년 정도가 흘렀다.
당연히 올해 농사는 망했다.
멀쩡하게 잘 크고 있었던 콩들을 모두 흙더미 속에 뭉개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미친놈 보듯 한다.
오늘 오전에는 농장주가 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갔다.
내년부터는 땅을 빌려 쓸 수도 없게 되었다.
아내가 요즘 많이 운다.
“…….”
“…….”
“…….”
“…….”
모두의 침묵 속에서, 이우주가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긴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6년 12월 31일-
-벌써 올해가 다 갔다.
금은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번은 부쩍 말수가 줄었다.
요즘은 땅도 건성건성 파고 담배만 뻑뻑 피워 댄다.
아내가 더 이상 양식을 꾸어 올 수 없다고 한다.
옆집 보기가 부끄럽다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서 그만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아내는 죄가 없는데. 그랬어서는 안 되는데.
“이 새끼 아주 개막장이네! 왜 와이프를 때려! 지가 잘못해 놓고서!”
“용서가 안 되는 타입이네.”
“나였으면. 같이 팼다. 남편. 우주는 나중에 그러면 안 된다. 나한테.”
“얜 또 뭐 하는 김칫국이야. 페이지나 넘겨.”
솔레이크가 대표로 페이지를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1월 29일-
-농장주가 와서 땅을 빼앗으려 한다.
계약상으로는 아직 두 달, 딱 두 달이 남았다.
나와 번은 그때까지 최대한 땅을 파 보기로 했다.
만약 그때까지 금이 나오지 않는다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요즘 땅을 파고 있는 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번은 담배도 피지 않고 쉬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땅에 고개를 처박고 일만 한다.
아내는 이제 울지 않는다.
그저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눈으로 하늘만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내가 잘해야지. 내가 잘해야……
“어유. 내 가슴이 다 답답해지네.”
“물린 사람은 이렇게 무섭구나.”
“마치 코인충을 보는 듯하다.”
“이래서 몰빵투자를 하면 안 된다는 거지.”
죠르디는 차분한 기색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2월 22일-
-이제 딱 한 달 정도만이 남았다.
오는 3월 21일이 되면 이 땅의 권리를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다.
혀가 타들어 가는 듯하다.
나는 이제 땅을 파지 않는다.
그저 혼자서 땅을 파고 있는 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구덩이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의 일과다.
여차하면 저놈을, 나를 꼬시고 충동질한 저 악마 놈의 뒤통수에 이 곡괭이를 꽂고 나도 죽으리라.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하고 떡을 만들 쌀과 신에게 바칠 술을 조금 빌려 오라고 했다.
“아니. 당장 먹을 죽도 없으면서 무슨 제사를 지낸다고 떡이랑 술을 가져오래? 미쳤어? 그리고 필요하면 지가 빌려 오든가, 왜 아내를 시켜. 진짜 주제 모르는 거 선넘네. 줘패버리고 싶네.”
“……제사를 지낸다고 그게 되나. 쯧쯧-”
“단타충의 흔한 최후. 제대로 물렸다.”
“페이지 넘겨 봐. 더 속 터질걸?”
이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광부 하디르의 일지>
-바이어스력 7897년 2월 29일-
-아내가 아무것도 빌려 오지 못했다.
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떡과 술이 필요한데 그것을 만들 쌀을 동네의 그 누구도 빌려 주지 않았단다.
콩밭에서 금을 딴다는 숙맥도 있느냐면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정말 그 말을 듣고 온 것일까? 혹시 본인의 생각을 얘기한 것이 아닐까? 동네 사람들의 입을 빌어 나를 업신여기던 제 속마음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나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아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허리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내 모든 울분과 억울과 비참함이 모두 아내 때문인 양, 그렇게 마구 분풀이를 했다.
옆에 있던 번은 말리지를 않고 조용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흙을 파기 시작했다.
옆 밭에서 농꾼들이 부르는 노동요 소리가 흥겹다.
“진짜 개막장이네. 뭐 이런 못난 새끼가 다 있냐. 현대로 따지면 지가 주식이나 코인 같은 데 전 재산 넣어 놓고 잘 안 되니까 아내 패는 거 아냐!”
“할 말이 없군.”
“죽일 놈. 친구란 Shake it도. 똑같다.”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슬슬 일지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이우주가 일지의 끝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
“……!”
“……!”
“…….”
충격적인 반전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