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55화 (955/1,000)

외전 81화 금 따는 콩밭 (2)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이우주는 손뼉을 쳤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분명 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우주는 과거 영국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로얄블러드 길드를 이끄는 튜더 총수의 집무실, 그 넓고 세련된 공간에 걸려 있었던 커다란 가족사진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은발머리의 소녀.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얼마 전까지 퀘스트를 수행했던 뷰티 헤어살롱 ‘The Gift of the Magi’였다.

‘로얄 블러드 길드…… 아버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꼭 성과를 내서…… 조만간 1급 정보원으로 승급…… 절대 초심을 잃지 말고…… 일일퀘스트부터 메인퀘스트까지 하나하나…… 게임은 완벽하게…… 철저하게…… 3차 대격변까지 남은 시간은…… 이대로라면 성장치가 미달…… 일일퀘를 하나 더 늘려야…… 그러려면 잠자는 시간을 조금 줄여야 하겠…….’

튜더와 비앙카의 외동딸 튜앙카.

그녀가 이곳 커피콩 밭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튜앙카의 얼굴을 알아본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가 각각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아니. 예쁘고 돈 많은 애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일일퀘를 해? 이거 경험치도 잘 안 주는데.”

“부자. 엘리트. 인플루엔서. 쵸-유명 스트리머. 뎀2의 하이랭커. Why 콩밭 노가다?”

“뭘 노리고 있는 것이지?”

세 여자의 질문에 튜앙카는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처음 계정을 만들었을 무렵 했던 퀘스트가 바로 이 퀘스트다. 그래서 나는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이곳에 와서 초심을 되찾고는 하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디뎌 놓았을 때의 그 열정과 감격을 되살리기 위해서 말이야.”

미미하고 소소한 일일퀘스트부터 끝판왕급 메인퀘스트까지, 튜앙카의 일상은 거의 초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져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 굳이 시간을 내서 참가할 만큼 튜앙카에게 이 커피콩밭 일일퀘스트는 의미가 있는 퀘스트였다.

[젊은 것들이 노오오오오오력을 해야지! 맨날 해이하게 늘어져 있으면서 복지 복지 타령만 해서 되나! 어!? 열정! 열정 몰라! 열정이 곧 페이야! 좀 더 근성을 보여 보란 말이야!]

“맞는 말이다! 나는 요즘 근성과 노력이 부족했어! 여기서 충전해 가겠다! 하압!”

농장주 레글리와 튜앙카는 나름대로 상성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니, 튜앙카가 보여 주는 근성과 열정은 오히려 농장주 레글리마저 머쓱한 표정으로 채찍을 거두게 만들 정도였다.

[요,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기특한 청년이구만. 그, 근데 조금은 쉬어 가면서 하는 게. 그러다 병나. 우리는 산재처리도 안 되는데……]

“아니! 이렇게 나약한 근성으로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더 열심히 해야 해!”

튜앙카는 손을 샥샥 움직이며 콩을 따고 있었다.

초 단위로 기록을 재면서, 전의 기록들과 비교해 가면서,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채찍질을 가한다.

“……야, 꼭 너 보는 것 같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잖아.”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는 이산하의 말에 이우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산하. 우주. 이러고 있을 때가 No. 이대로 가면 일일퀘 보상 다 뺏긴다.”

“그래! 이 일일퀘를 깨서 농장주 부부에게 인정을 받아야 소작을 지을 땅 한 필지를 불하받을 수 있다고! 그래야 히든 퀘스트를 발견할 수 있어!”

솔레이크와 죠르디가 다급하게 외친다.

정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옆 필지에 있는 모든 커피콩을 튜앙카에게 빼앗길 것이다.

그랬다가는 일일퀘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아르파닉과 관련되어 있는 히든 퀘스트 역시도 물 건너가겠지.

무엇보다도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레글리의 커피콩 농장 일일퀘는 목표 달성 실패 시 며칠간 수행 제한 패널티가 걸리니까 말이다.

이산하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우, 우리도 열심히 하자!”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콩을 따고 있는 튜앙카의 기세는 가히 일당백, 저편에 있는 네 명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그것을 본 이산하는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아니, 뭔 놈의 일일퀘를 저렇게 목숨 걸고 해!?”

“무슨 소리. 원래 게임은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어. 특히나 후발주자들은 말이야!”

튜앙카는 이산하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이산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게임은 즐겁게 하려고 하는 건데! 그렇게 힘들고 빡세게 하면 본말전도잖아! 대충해 대충!”

“……대충?”

그러자 튜앙카의 시선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산하를 향해 고정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콩을 따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벌레가 있다. 그것이 뭔지 아나?”

“엥? 뭐야. 모르겠는데?”

“바로 대충(蟲)이다.”

영국인답지 않은 언어유희를 구사한 튜앙카는 이산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이 제일 싫다.”

“미스 튜앙. 대충의 충은 벌레 충이 아니다.”

“……넌 뭐야. 그냥 비유적 표현이니까 넘어가.”

튜앙카는 슬쩍 끼어들려는 솔레이크를 밀어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뭔가를 할 때 즐겁게 하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내어 보지 못한 루저들이나 품을 법한 환상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어떠한 사명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어떤 엘리트 체육인이 말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했다. 시합에 나가지 못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이 내 직업이 됐다. 성과를 내야 했고 팬들의 응원에 보답해야 했다. 그것은 죽을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정서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나 늘 잘해야 했고 성과를 보여야 했다. 이제는 즐겁지 않았다. 쉴 때나 잘 때, 심지어 가족들과 있을 때에마저 압박이 느껴졌고 심각한 수준의 공황장애까지 왔다. 하루에도 십수 시간 씩 연습을 할 때마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나를 전설이라 불렀지만 사실 나는 지독한 벌레였을 뿐이다. 연습벌레.’…… 라고.”

튜앙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이었다.

“나는 게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상 정말로 잘해야 한다. 피터지게 해야 한다. 성과를 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응원해 주는 팬들에 대한 예의고 나아가 나를 이렇게 지원해 주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보답이다.”

“…….”

“그러니 게임을 즐기면서 하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게임은 미친 듯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극도로 정적인 길 위에서 나 자신과 끝없이 투쟁해야 하는 과업인 것이다.”

“…….”

튜앙카는 말없이 서 있는 이산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즐겁다? 그렇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지. 타고난 천재이거나, 아니면 듣기 좋은 말이나 늘어놓으며 정신 승리를 하는 게으른 루저. 즐기면서 하라고 지껄이는 인간들 중의 99%는 후자에 속할 것 같은데. 과연 너는 어느 쪽일까?”

“이익!”

이산하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뭔가 반박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더 열 받는 것은 옆에 있는 동생이 적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지. 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겠어. 이해는 돼.”

“야! 넌 또 뭔 헛소리야! 게임은 그냥 재밌자고 하는 건데! 본디의 목적에 충실해야지!”

“나는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평생 아빠의 그림자에 가려 살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만약 게임을 못해 봐. 아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게 되잖아. 호부견자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저 사람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어우! 말이 안 통해!”

이산하는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두들긴다.

그러는 동안에도 튜앙카는 재빠른 솜씨로 콩을 수확하고 있었다.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샥-

튜앙카의 자루에 쌓이고 있는 커피콩의 양은 점차 늘어난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확량에서 처참하게 지고 말 것이다.

“크윽! 저 여자. 너무 빠르다. 콩 먹고 밥만 땄나?”

“바뀌었잖아. 밥 먹고 콩만 땄나겠지. 빌어먹을…… 아이템만 쓸 수 있었어도!”

솔레이크와 죠르디 역시도 분발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콩 따는 속도에서부터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다.

그때.

“안 되겠다. 양으로는 승부가 안 되겠어.”

이우주는 튜앙카의 자루 속에 쌓이고 있는 막대한 양의 커피콩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방법이 있어?”

“우주.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빛.”

“하지만 무슨 수로? 수확량이 저렇게 차이가 나는데.”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가 물었다.

이에 이우주는 잠깐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양으로 안 되면 질로 승부를 봐야지.”

“질로? 어떻게?”

“…….”

이산하의 질문에 이우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몇 가지의 동영상이 떠오른다.

과거 아빠가 펼쳤던 기상천외한 공략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독특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뿌리 깊은 유사과학이 하나 있지.’

‘그것은 바로 식물 역시도 감정을 느끼고 그에 따라 성장 결과가 다르게 발현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어떤 언어를 듣느냐,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고 딱히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이 아이템에는 그 알 수 없는 이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그것은 심록(深綠)의 용 브라키오 공략 당시의 영상.

“…….”

이윽고, 이우주는 막 수확한 커피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먼 옛날 아빠가 했던 대사를 그대로 입에 담았다.

“X X 씨발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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