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36화 (936/1,000)

외전 62화 후예사일(后羿射日) (6)

옛날 옛적 하늘에는 태양이 열 개나 있었다.

태양이 너무 많아서 세상은 늘 뜨거웠고 이에 사람들이 살 수가 없었다.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영웅은 열 발의 화살을 가지고 태양을 쏘아 떨어트렸다.

화살 한 발에 하나의 태양.

하지만 태양이 모두 사라지면 이 또한 큰일이 날 것이기에 영웅의 추종자들 중 하나가 화살 한 발을 몰래 숨겼다.

그러자 태양은 하나만 남게 되었고 비로소 세상은 안정되었다고 한다.

…….

……하지만 세상을 안정시킨 영웅의 최후는 비참했다.

영웅은 믿었던 아내와 제자에게 연달아 배신당했다.

아내는 영웅을 남겨 둔 채로 혼자 보물을 챙겨 달의 궁전으로 달아났으며 제자는 영웅의 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후예사일(后羿射日)』 신화 中-

*       *       *

동영상은 슬픈 BGM과 함께 점차 까맣게 점멸해 간다.

-Fly me to the moon

나를 달로 보내주세요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저 별들 사이를 여행하게 해 주세요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 on Jupiter and Mars

목성과 화성의 봄을 내게 보여 주세요

-In other words, hold my hand

다시 말해, 내 손을 잡아주세요

-In other words, baby kiss me

다시 말해, 내게 입 맞춰 주세요

-Fill my heart with song

내 마음을 노래로 채워 주세요

-And let me sing forevermore

영원히 노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You are all I long for, all I worship and adore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에요

-In other words, please be true

다시 말해, 언제나 진실해 줘요

-In other words, I love you

다시 말해, 그대를 사랑해요

고전 명곡인 ‘Fly me to the moon’이 흘러나오며 동영상의 재생이 멈췄다.

-띠링!

<‘후예사일(后羿射日)’의 영상이 끝났습니다.>

기나긴 재생 시간이 종료된 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우주를 제외한 모두는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심지어 죠르디마저도 고개를 돌린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으아아앙! 봉몽 이 개새끼! 개나쁜새끼! 이 새끼 때문에 애꿎은 커플이 오해로 갈라졌잖아!”

“더 고통스럽게! More painfully하게 죽였어야 했다! 너무 편히 리타이어 시켜 줬음!”

“짝사랑으로 사연 팔아 봤자 하나도 공감 안 된다. 미친 놈. 여자의 적!”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얼마 전에 잡은 ‘데스나이트 봉몽’을 향해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하지만 이우주는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하게 게임의 스토리를 정리했다.

“……뭐, 일단 ‘태양룡 바이어스’의 히스토리를 알 수 있게 된 것을 이득이라고 봐야겠지.”

“야! 너는 이 슬픈 이야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우주! 냉혈한! Cold blooded!”

“너. 머더러인 나보다도 감성이 메말랐군.”

이우주는 세 여자의 거센 항의를 전부 무시한 채 히든 퀘스트들의 스토리을 정리했다.

후예와 항아의 사랑.

봉몽의 배신.

데스나이트가 되어 태양빛을 피해 숨어 살던 봉몽.

달에 갔다가 하해로 떨어져 흑해의 무영왕이 되어 버린 항아의 사념.

그리고 겨우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던 새끼 태양룡 바이어스.

인과율이 직조해 낸 이 모든 설정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일이다.

“후예와 항아, 봉몽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지. 후예는 죽었고 항아는 흑해의 무영왕이 되었다가 우리에게 사냥당했으며 봉몽 역시도 데스나이트가 되어 마몬 씨와 얽혔다가 결국은 우리에게 잡혔으니까. ……하지만.”

이우주는 고개를 돌려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를 바라보았다.

“아직 핵심이 남았어. ‘태양룡 바이어스’. 그놈은 후예에게서 살아남아 오랜 시간 동안 힘을 길렀고 현재는 최강의 용으로써 세계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지. 그놈의 히스토리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야. 이제 우리는 마지막 태양룡을 잡으러 가야 해.”

그리고 그 길고 험난한 여정을 도와줄 단서가 지금 이우주의 손안에 있었다.

-<‘항아(嫦娥)’의 사념이 담긴 월궁함> / 재료 / S

월궁(月宮)에 존재하는 비밀의 함.

누군가의 사념이 봉인되어 있다.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흑해의 무영왕 속에 갇혀 있던 항아의 사념이 사라지며 남긴 아이템.

그것은 항아의 기억 속에서 봉몽이 뒤졌던 상자이기도 했다.

이윽고, 이우주는 열쇠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월궁함의 부러진 열쇠> / 재료 / S

월궁(月宮)에 존재하는 함의 열쇠.

두 조각을 합쳐 원래의 모양으로 복구시켰다.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상자를 잠그고 있는 자물쇠의 구멍으로 열쇠는 자신의 몸을 꼭 맞게 채워 놓는다.

이윽고, 상자가 열리며 안에 든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딸깍!

상자의 내부를 확인한 이우주의 두 눈이 커졌다.

안쪽에는 긴 실타래 같은 것과 아홉 개의 황금빛 구슬이 들어 있었다.

-<항아의 머리카락> / 재료 / S

항아가 살아생전에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

태양을 향한 올곧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오래된 태양룡의 용옥(龍鈺)> / 재료 / S

금빛 비늘을 지닌 용의 심장.

한때는 막대한 마나가 응집되어 커다란 구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대기 중에 희석되어 결국에는 이렇게 작은 구슬의 모양이 되었다.

이우주는 우선 아홉 개의 구슬에 주목했다.

“……이건 태양룡의 심장이군. 너무 오래되어서 먹어도 그다지 효과는 없겠지만.”

하지만 태양룡을 사냥했다는 상징성이 있는 아이템이니만큼 그 값어치는 상당하다.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는 히든 피스였다.

“이 구슬을 가장 비싸게 쳐줄 녀석을 하나 알고 있기는 하지.”

이우주는 지금도 시시각각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아홉 개의 구슬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다음은 항아의 머리카락이었다.

이 아이템에 관심을 보인 이는 바로 이산하였다.

“오? 엄청 질기고 쫀쫀한 실타래네. 어쩌면 내 활의 활시위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이산하는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불완전한 용골궁(龍骨弓)> / 양손무기 / S

초심해에 서식하는 아룡(亞龍)의 척추를 엮어 만든 활.

현재는 활시위가 없어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공격력 +2,500

-화염 속성 공격력 +500

-얼음 속성 공격력 +500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시위가 없어 완전하지 못한 활.

하지만 시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등급이 S랭크로 책정되어 있으며 붙어 있는 깡 공격력이 2,500씩이나 된다는 것은 이 활의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뜻한다.

“……자동으로 융합은 안 되네. 내가 인생을 너무 편하게 살려고 했나?”

이산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작소에 가서 항아의 머리카락을 활시위로 따로 가공한다면 융합도 가능하겠지. 어쩌면 재미있는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헤헤-”

그렇게 해서 항아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해는 이산하의 소유가 되었다.

이우주는 모든 레이드가 마무리된 뒤 암초 위에 섰다.

그리고 이제는 평화롭게 찰랑이는 해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태양룡 바이어스의 과거를 잘 알게 되어 다행이야. 이런 히스토리를 모른 상태로 아빠는 바이어스를 강제로 잡아 버렸지. 그래서 정식 공략으로 인정을 못 받은 거였어. ……사실 어찌 보면 이런 히든 퀘스트나 떡밥 아이템들 없이도 깡으로 태양룡을 잡은 게 더 대단한 건데.”

그 당시에는 초국적기업 데우스 엑스 마키나 주식회사의 전대 총수가 불법적으로 게임 내에 간섭하는 바람에 사고가 벌어졌었다.

이렇게 풍부하고 다양한 파생사(派生史)를 가진 고정 S+급 몬스터가 그저 공격과 살상만을 반복할 뿐인 기계로 등장했다는 것은 게이머들에게 있어서도 큰 손실이자 불행이었다.

“……아마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 역시도 마찬가지였겠지.”

이우주는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제부터 사냥할 태양룡 바이어스와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는 제대로 된 공략 절차를 밟아서 잡겠어. 아빠도 하지 못했던 과업을 완수할 절호의 찬스야.’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빠를 포함해 지난 수십 년 뎀 역사상 아무도 해내지 못한 공전절후의 업적.

이우주는 그것에 직접 맨몸으로 부딪쳐 가며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 도전하는 수십억 인파들 중 가장 처음으로 태양룡의 히스토리를 본 파이오니아.

분명 다른 어딘가에서도 태양룡의 다른 히스토리가 남겨 놓은 파편들을 추적하는 이들이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이 히든 퀘스트를 완료한 이는 여기의 네 사람이 최초였다.

“가자. 다음 스테이지로.”

이우주는 자부심을 담아 힘 있게 말했다.

활시위를 제작하기 위해 조합소를 알아보고 있던 이산하가 고개를 들었다.

“요이, 동생. 어딜 가자는 거야? 유토러스 마을로 돌아가자고?”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아이템을 처리해야지.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는 아이템 같으니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팔아 치울 생각이야.”

이우주는 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오래된 황금룡의 용옥’ 아홉 개를 흔들어 보였다.

레이드가 끝나고 나온 아이템을 팔아서 군자금을 확보할 심산인 듯했다.

이산하가 물었다.

“에엥? 그거 팔게? 조금 아까운데. 일단 인벤토리나 창고에 키핑해 두는 건 어떨까? 나중에 어딘가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름 용을 잡아야 얻을 수 있는 재료 아이템인데.”

“이건 제한시간이 다 지나면 소멸하는 아이템이야. 우리가 상자를 연 시점에서 바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어.”

이우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이 아이템을 연구할 만한 시간이 없어. 그리고 이건 오히려 팔았을 때 더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일 거야. 내게 생각이 있으니 믿어 줘.”

평소 레이드 보상으로 떨어진 아이템을 잘 팔지 않는 이우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솔레이크가 물었다.

“우주. 그것 어쩌려고 그러나? 판다고 한다면 shop에 팔 건가? NPC마다 희망소비자가격 천차만별. 소비자가 한 번도 희망한 적 없는 가격. 조심해야 한다.”

“아니. 상점에는 안 팔 거야. 이런류의 재료 아이템들은 거래되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니까. 어떤 상인 NPC가 가격을 제일 많이 쳐줄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는 조금 무리지.”

그러자 죠르디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NPC에게 파는 것은 바보짓이야. 차라리 경매장에 올려서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경합을 시키는 편이 나아. 내가 잘 아는 블랙마켓이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 줄 수도 있지. 그쪽은 조금 구린 루트이기는 하지만 세금이 아예 0%라서 상당히 메리트가 있거든.”

“아니. 플레이어들에게도 안 팔 거야.”

그러자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게임에서 거래를 할 수 있는 대상은 딱 둘뿐이다.

NPC(Non-Player Character). 그리고 플레이어(Player).

그 둘을 제외한다면 남은 부류는 딱 하나.

몬스터(Monster).

이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이 구슬을 가장 비싸게 쳐줄 녀석을 하나 알고 있다고.”

이우주의 미소에서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은 이산하, 솔레이크, 그리고 죠르디마저 몸을 움찔했다.

“바, 방금 봤어? 쟤 웃는 거? 꼭 우리 아빠를 보는 것 같앴어.”

“우주. 변태 같다. 약간 무섭.”

“……뭐, 나쁘진 않네.”

“?”

“?”

“……왜. 뭐.”

이윽고, 네 사람은 유령 군마의 위에 탑승했다.

죠르디는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이산하와 솔레이크에게 생색을 냈다.

“특별히 태워 주는 줄 알아라. 물론 뱃삯은 받겠지만.”

“와, 더럽게 쩨쩨하네 진짜! 왜 내 동생한테는 생색 안 내고 우리한테만 그러냐!?”

“죠르디. 우주. 쳐다보는 시선. 수상하다. 꿈 깨. 우주는 이미 나의 것.”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빽빽 소리치는 것을 무시한 채, 죠르디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한편.

죠르디의 앞에 탄 이우주는 유령 군마의 말머리를 잡은 채 저 높이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았다.

‘아들아,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 볼 가치가 있단다.’

하얗게 피어나는 포말꽃 사이로 아빠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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