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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934화 (934/1,000)
  • 외전 60화 후예사일(后羿射日) (4)

    아홉 개의 태양이 떨어진 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아아아아악!]

    호숫가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거대 구렁이 ‘파사(巴蛇)’가 격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한참 동안이나 꿈틀거리던 그것은 이내 물가의 한 기슭에 고개를 처박고는 그대로 죽어 버렸다.

    찢어진 가죽을 뚫고 불거져 나온 척추뼈가 마치 구릉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

    몸 바깥으로 굴러 떨어진 심장은 아직도 뜨겁고 비린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드넓은 호수가 피로 물들어 온통 시뻘겋게 변해 버릴 만큼 구렁이의 몸은 커다랗다.

    그리고 이 커다란 뱀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는 궁사가 한 명 있었다.

    “드디어 동정호의 괴물을 처치했군.”

    봉몽.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완연한 성인 남자가 된 그는 피로한 표정으로 뱀의 대가리 위에 몸을 뉘였다.

    과거, 아홉 태양을 떨어트린 궁수 후예를 스승으로 삼은 봉몽은 그를 따라다니며 수없이 많은 괴물들을 사냥해 왔다.

    인간을 도와 세상을 안정시키는 일.

    봉몽은 스승의 뒤를 쫓으며 부지런히 궁술을 배웠고 이제는 그 역시도 세상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봉몽은 방금 호숫가의 사람들을 괴롭히던 거대 구렁이를 쓰러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스승님께 비하면 아직 멀었다. 마지막에는 화살이 빗나가는 바람에 몽둥이까지 꺼내들어야 했으니.”

    봉몽은 뱀의 피가 묻은 나무 몽둥이를 내려다보았다.

    복숭아나무를 깎아 만든 이 몽둥이는 화살이 빗나가서 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했을 때를 대비한 비상용 무기였다.

    봉몽은 거대 구렁이 파사와 접전을 벌이는 동안 몇 번인가 오발을 쐈고 그때마다 이 몽둥이를 휘둘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승님이었다면 분명 화살 한 대로 저 구렁이를 잡았겠지.”

    척추뼈가 구릉을 이룰 정도로 큰 뱀이라고 해도 어찌 태양룡에 비하랴?

    그런 태양룡조차도 단발에 쏘아 떨어트렸던 스승이다.

    봉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렸을 적 잡았던 작은 도마뱀과 눈앞에 있는 이 구렁이는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스승이 쏘아 떨어트렸던 태양룡들의 거체에 비하면 말이다.

    “이대로 가면 스승을 뛰어넘기는커녕 비슷한 경지에도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최고의 궁수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열망이 봉몽의 가슴 속 저변에 깃들어 있었다.

    “……‘그 녀석’의 눈에도 들 수 없겠지. 평생.”

    철이 든 이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

    봉몽은 활과 화살, 몽둥이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되었건 간에 그에게는 아직 돌아갈 곳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으니까.

    *       *       *

    달빛이 쏟아지는 푸른 초원 위, 그림 같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봉몽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그는 마루에 앉아 달빛을 쬐고 있는 여인 한 명을 보았다.

    어느새 성숙하게 자란 항아.

    그녀는 봉몽이 도착한 줄도 모른 채 마루 위에 앉아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상아를 깎아 만든 상자 하나를 쓰다듬으면서.

    “……뭐하냐?”

    봉몽은 퉁명스럽게 틱 물었다.

    그러자 항아는 깜짝 놀라더니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너였어?”

    “응. 방금 돌아왔다.”

    “동정호에 나타난다는 구렁이는 퇴치한 거야?”

    “당연하지. 난 최고의 궁수가 될 몸인걸.”

    “하여튼 허풍은.”

    항아는 봉몽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봉몽은 돌아서며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허풍 아냐.”

    “……뭐?”

    “…….”

    잘 듣지 못한 항아가 반문했지만 봉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왜 맨날 밤마다 혼자 달빛을 쬐고 있냐? 청승맞게.”

    “……오늘따라 유난히 그분 생각이 나서.”

    항아는 달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봉몽도 잘 알고 있었다.

    후예.

    항아의 연심이 향하는 대상이자 봉몽의 스승이기도 한 존재.

    그는 봉몽을 단련시킨 뒤 세상을 어지럽히는 괴물들을 사냥하라 명령했고 자신 역시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아는 오늘도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 후예를 기다리며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있어 태양이야. 신앙과도 같아.”

    “……그럼 태양을 볼 일이지.”

    “밤이 되면 태양이 안 뜨잖아. 그러니까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을 보는 거야.”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난다.

    오로지 태양만을 바라보며, 태양의 곁을 맴도는 존재.

    태양이 없으면 결코 빛날 수 없는, 존재할 수도 없는 외로운 별.

    그래서 항아는 달을 좋아했다.

    자신을 닮았다는 이유로.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바라봐. 그래서 그분이 외출하시고 집을 비우실 때면 내가 집을 지키며 기다리지. 진짜 달과 비슷하지 않아? 달은 해의 기운을 받아서 살고 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빈자리인 밤을 지키잖아.”

    “……나는 안 기다렸고?”

    “응? 아아, 물론 너도 기다렸지. 이제 하나뿐이 남지 않은 소중한 동향 친구인걸.”

    항아의 대답에 봉몽은 속에서 무언가가 끓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

    증오, 배신감, 질투, 소유욕, 존경, 사랑, 애정, 슬픔, 배덕감, 그리고 지독한 자기혐오.

    이 모든 것들이 울화처럼, 천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윽고 봉몽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는 뭐냐?”

    “응?”

    항아가 고개를 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봉몽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이 태양이고 네가 달이면. 그러면 나는 뭐냐고.”

    “……? 잘 이해가 안 돼. 네가 왜 뭐여야 해?”

    항아가 묻자 봉몽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왜 뭐여야 하냐니! 당연히……!”

    하지만 뒤에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봉몽은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이윽고, 봉몽이 말했다.

    “나는 봐 주지 않는 거냐?”

    “…….”

    “스승님의 위대함은 인정한다. 그분은 태양이자 신이지. 그래. 숭배하는 마음이 들 수 있어.”

    “…….”

    “하지만 너는? 너는 그저 한낱 비루한 인간일 뿐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신을 사랑하고 그 옆에 있겠다는 거냐!”

    봉몽의 외침에 항아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줄게. 구렁이를 퇴치하느라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자.”

    “아니! 너는 인간이야! 한낱 인간이라고! 인간은 인간끼리 만나야 해! 바로 나 같은!”

    씩씩거리는 봉몽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기분 탓일까?

    그에게서는 비린 냄새가 났다.

    구렁이를 죽일 때 뒤집어썼던 피 냄새.

    뱀의 심장이 그에게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을 폭발시키라고.

    “너는 숭배와 사랑을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맺어져야 할 대상은 스승님이 아니야. 바로 나지! 지난 세월 동안 한결 같이 너만을 바라봐 온 나라고!”

    “…….”

    봉몽이 뿜어내는 뜨거운 기운을 피해 항아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문득, 봉몽은 항아가 등 뒤에 숨기고 있는 흰 상자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그건 뭐지? 스승님이 안 계실 때면 늘 그 상자를 끌어안고 쓰다듬던데.”

    “……네가 알 것 없잖아.”

    항아는 싸늘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그녀는 봉몽을 향해 말했다.

    “지금껏 동향 사람이고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여서 좋게 봤었는데, 내 실수였구나.”

    “…….”

    “이 집을 떠나. 너의 활솜씨라면 분명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항아의 말에 봉몽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토록 단호하고 차갑게 내쳐질 줄이야.

    그렇다면 그동안 품어 왔던 마음은.

    어린 시절 산과 들을 함께 뛰놀며 쌓았던 유년 시절의 추억들은.

    크면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막연하게 그렸던 미래는.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봉몽의 머릿속에 항아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아! 그래도 대단해, 아홉 마리나 잡다니! 역시 우리 마을 제일의 명궁이야.’

    ‘그렇게 해서 나한테 시집오겠냐!?’

    ‘누가 너한테 시집간대!?’

    ‘그럼 이 마을에서 또래는 너랑 나밖에 없는데 어떡하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곧 내 마누라가 될 여자인데 내가 지켜 줘야지.’

    ‘어휴. 빨리 가기나 해.’

    ‘도망치자.’

    ‘……하지만 도망치면 어디로 갈 수 있겠어.’

    ‘어디로든. 여기만 아니면 돼. 너 하나쯤은 내가 지켜 줄 수 있어. 나 못 믿냐?’

    머릿속에 지금껏 그녀와 함께했던,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 둘만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항아는 이런 회상이 무색하게끔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한 치의 미련도 없는 태도로 최후의 선을 그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봉몽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것이 자기가 볼 수 있는 항아의 마지막 얼굴임을.

    그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저 목소리조차 다시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핏- 쿠르르륵!

    속에서 터져 나온 천불이 그의 시야를 까맣게 불태웠다.

    …….

    …….

    …….

    퍼뜩.

    봉몽은 정신을 차렸다.

    검게 죽었던 시야가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걸까?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환하게 빛나던 달은 어느덧 먹구름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항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봉몽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손은 이미 피로 범벅이다.

    복숭아나무를 깎아 만든, 얼마 전 동정호에서 때려죽였던 구렁이의 피로 얼룩진 복숭아나무 몽둥이가 봉몽의 눈에 들어왔다.

    “……내, 내가 왜 이걸 쥐고 있지?”

    손발과 함께 목소리마저 덜덜 떨린다.

    그때.

    달그락-

    옆에서 난 작은 소리에 봉몽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루 위, 항아가 늘 쓰다듬곤 하던 상자가 쓰러진 채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황금빛 화살 한 대가 고이 수납되어 있었다.

    ‘다 죽이면 안 돼요. 이 정도만 해도 물값으로는 충분하니까…….’

    과거, 항아가 후예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미처 쏘아지지 못하고 남은 최후의 화살이었다.

    그리고 화살의 옆에는 아홉 개의 황금색 구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태양룡의 몸에서 뽑아낸 ‘용옥(龍鈺)’, 다른 말로 드래곤 하트라 불리는 마나의 결정체.

    항아는 늘 그것들을 곁에 두고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봉몽은 또다시 되살아나는 질투심의 겁화에 시야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저벅-

    사립문 밖으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봉몽은 전신에 난 털이 빳빳하게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스승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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