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31화 (931/1,000)
  • 외전 57화 후예사일(后羿射日) (1)

    옛날 옛적 하늘에는 태양이 열 개나 있었다.

    태양이 너무 많아서 세상은 늘 뜨거웠고 이에 사람들이 살 수가 없었다.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영웅은 열 발의 화살을 가지고 태양을 쏘아 떨어트렸다.

    화살 한 발에 하나의 태양.

    하지만 태양이 모두 사라지면 이 또한 큰일이 날 것이기에 영웅의 추종자들 중 하나가 화살 한 발을 몰래 숨겼다.

    그러자 태양은 하나만 남게 되었고 비로소 세상은 안정되었다고 한다.

    -『후예사일(后羿射日)』 신화 中-

    *       *       *

    <이산하>

    LV: 70

    <이우주>

    LV: 60

    <솔레이크>

    LV: 71

    세 사람의 레벨이 급격히 상승함과 동시에.

    -띠링!

    <세계 최초로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흑해의 무영왕’이 죽었습니다. 하해의 어둠이 저변의 아래에 봉인됩니다.>

    <히든 퀘스트 ‘그림자를 빼앗긴 사나이’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

    이우주는 몇 개인가의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한 번 더 반복해서 읽었다.

    귀로 들은 알림음과 눈에 보이는 자막들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은 뒤에야 비로소 실감이 든다.

    “이스마엘 씨의 히든 퀘스트…… 완료해서 다행이다.”

    이우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했을 사냥을 가능케 했던 키 아이템 ‘살인자의 백과사전’.

    이것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던 핵심 재료 아이템을 이우주는 아직 똑똑히 기억한다.

    -<흑해의 무영묵(無影墨)> / 재료 / S

    그림자 없는 이가 토해낸 검고 음흉한 속내.

    흑해의 무영왕을 잡아야 얻을 수 있는 이 재료 아이템을 이스마엘로부터 외상으로 넘겨받았기에 이번 레이드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라면 애초에 엘리뇨와 라니냐를 잡지도 못했겠지. 감사합니다 이스마엘 씨…… 부디 그림자를 되찾고 편히 쉬시길.”

    이우주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그림자를 되찾고 기뻐하고 있을 이스마엘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다음 차례는 아이템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우주는 자신의 손으로 새롭게 들어온 황금빛 작살을 살펴보았다.

    -<태양살(太陽殺)의 화살> / 한손무기 / S

    불을 찢는 힘이 담겨있는 파사(破邪)의 화살.

    원래는 열 발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발 밖에는 남지 않았다.

    -공격력 +5,000

    -특성 ‘관통(貫通)’ 사용 가능 (특수)

    -특성 ‘반정(反正)’ 사용 가능 (특수)

    -특성 ‘곤장형(棍杖刑)’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십시일반(十矢一反)’ 사용 가능 (특수)

    -특성 ‘후예사일(后羿射日)’ 사용 가능 (특수)

    화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서 고래잡이용 작살처럼 보이는 외형.

    크기 또한 한손무기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게 열 개 중에 한 개라고? 원래 이런 게 아홉 개나 더 있었다는 건가?”

    이우주는 화살을 들어 보았다.

    굵고 길 뿐만 아니라 무게 또한 육중하다.

    “……이건 누나의 힘으로도 못 당기겠는데.”

    화살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강인하고 억세서 어지간한 활로는 발사는커녕 시위에 걸고 장전하는 것조차도 힘들 듯했다.

    장력을 어마어마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쏠려면 엄청나게 강한 활이 필요하겠네. 무지하게 억센 시위와.”

    이우주는 얼마 전에 이산하가 엘리뇨와 라니냐를 잡고 얻은 활 하나를 떠올렸다.

    -<불완전한 용골궁(龍骨弓)> / 양손무기 / S

    초심해에 서식하는 아룡(亞龍)의 척추를 엮어 만든 활.

    현재는 활시위가 없어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공격력 +2,500

    -화염 속성 공격력 +500

    -얼음 속성 공격력 +500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S급 활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형편없는 스팩.

    하지만 이 활에는 ‘융합’ 특성이 붙어있기에 아직 성능이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활시위를 따로 구해서 융합시킨다면…… 어쩌면 그때는 이 화살을 장전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한편. 이우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살인자의 백과사전’이었다.

    이스마엘에게서 외상으로 받은 잉크로 기록한 내용이 새로운 페이지에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살인자의 백과사전> / 마도서 / S

    죽은 자를 위한 죽인 자의 기록.

    사냥했던 대상의 살아생전 모습, 특징, 습관 등이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저장되어 있다.

    <현재 기록: ‘엘리뇨/홍해(紅海)’, ‘라니냐/용권(龍卷)’, ‘흑해의 무영왕/그림자 분신’>

    -특성 ‘살인자의 기억법’ 사용 가능 (특수)

    사실 현 시점에서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림자 분신!”

    이우주는 이 특성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흑해의 무영왕과 싸우면서 그림자가 가진 힘을 여실히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림자에게 이런저런 역할을 분산시킨다면 뭐가 됐든 효과를 두 배로 볼 수 있겠군. 체력 소모가 크기는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

    이우주는 크게 만족했다.

    흑해의 무영왕을 잡고 얻은 특성은 엘리뇨와 라니냐를 사냥했을 때 얻었던 특성들보다도 훨씬 더 범용성이 좋았다.

    그 어떤 특성과도 연계시킬 수 있었지만 특히나 ‘롤모델’ 특성과의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았다.

    이우주가 싱글벙글 웃고 있을 바로 그때.

    “어라? 우리는 이게 다야?”

    “흑흑. 거지몹이었다. 이 자식.”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산하의 손에 떨어져 있는 큼지막한 상자 하나.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죽을 고생을 한 결과로 받은 게 고작 이 상자 하나라는 사실에 크게 실망해야 했다.

    ……그러나.

    이 아이템의 상태창을 본 순간, 두 여자의 눈에서 실망의 기운은 싹 사라졌다.

    -<‘항아(嫦娥)’의 사념이 담긴 월궁함> / 재료 / S

    월궁(月宮)에 존재하는 비밀의 함.

    누군가의 사념이 봉인되어 있다.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그것은 달에 있다는 보물상자.

    그동안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대상이었다.

    “뭐야 이게, 미믹도 아니고. 열쇠 아이템이 없으면 열 수 없는 것 같은데…… 너희들 열쇠 갖고 있어?”

    죠르디는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리들 빵싯빵긋 웃고 있을 리가 있나.

    이윽고, 이산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월궁함의 부러진 열쇠> / 재료 / S

    월궁(月宮)에 존재하는 함의 열쇠.

    두 조각을 합쳐 원래의 모양으로 복구시켰다.

    -특성 ‘융합’ 사용 가능 (특수)

    그것은 엘리뇨와 라니냐를 잡고 얻은 열쇠조각 B와 튜더에게서 넘겨받은 열쇠조각 A를 융합한 결과물이었다.

    이우주는 함과 열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함의 주인은 ‘항아’라는 인물이었나 보네.”

    “어? 항아라면 흑해의 무영왕의 상태창에서 봤던 그 이름 아니야?”

    “맞다. 그 몬스터의 설명에 그런 이름. 존재했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흑해의 무영왕의 거대한 사체를 돌아보았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채 시커먼 그림자를 증발시키고 있는 거구의 해파리.

    <흑해의 무영왕 ‘항아(嫦娥)’> -등급: S / 특성: 어둠, 대심해, 불로불사, 살금살금, 1:1, 그림자 밟기, 그림자 분신, 적란운(積亂雲), 발전, 지진해일, 사념, 후예사일(后羿射日)

    -서식지: 하해(下海)의 저변

    -크기: ?

    -악의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사념의 집합체. 그림자의 왕.

    태고 시절부터 퇴적되어 온 이 거대한 사념은 닿는 그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리며 여기까지 왔다.

    놈의 상태창에는 틀림없이 ‘항아’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에요.’

    강력한 사념을 뿜어내던 그녀가 바로 이 함의 진짜 주인, 월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리라.

    바로 그때.

    츠츠츠츠츠……

    흑해의 무영왕의 사체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그림자가 네 사람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의 귓가에 알림음이 떴다.

    -띠링!

    <흑해의 무영왕이 죽었습니다.>

    <하해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 거대한 해파리는 죽는 순간 뱃속으로 삼켰던 오래 전의 사념을 토해 놓았습니다.>

    <‘항아의 사념’이 오래 전의 기억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월궁항아(月宮嫦娥)’의 트레일러 영상을 시청하시겠습니까?>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각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시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

    “어쩌면 다음 행보 때 필요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YES. 본다.”

    “……어? 나까지 봐도 되는 거야?”

    어느새 파티로 묶인 네 사람은 아무런 이견 없이 ‘수락’ 버튼을 연타했다.

    이윽고, 트레일러 영상(trailer film)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늘 이 세계의 주인공인 ‘플레이어’가 철저한 제 3자이자 엑스트라, 관객으로 전락하게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       *       *

    검은 화면이 끝없이 지속된다.

    영체(靈體) 상태로 둥둥 떠다니던 이산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아, 언제까지 검은 화면만 보여줄 거야? 지겨워 죽겠네.”

    “벌써 3시간. 넘었다. boring. 지겨워.”

    “……이번만큼은 너희들 의견에 동의다.”

    솔레이크와 죠르디 역시도 같은 의견을 내비치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봐. ‘항아의 사념’이 보고 겪었던 것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이우주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화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꽈쾅!

    터져나오는 굉음이 온통 암흑뿐이었던 시야를 산산조각으로 깨트린다.

    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발록 한 마리가 내지른 주먹에 의해 달이 파괴되고 있었다.

    “아빠다!?”

    이우주가 소리쳤다.

    항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기억에는 분명 아빠가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나오는 장면은 짧았다.

    와지지지지직-

    달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똥별처럼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이내 차갑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이후 또다시 검은 화면이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꾸르륵- 쿠르르륵-

    어둡고 차가운 해류만이 피부를 타고 흐른다.

    항아의 사념은 달에서 떨어져 심해를 하염없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끝에 눈앞에 작은 해파리가 보인다.

    보글보글보글……

    희미한 빛을 흘리며, 이 작은 아기 해파리는 눈앞을 동동 떠다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빠른 속도로 감아지는 화면에 따라 해파리의 크기는 점점 쑥쑥 커졌다.

    이윽고, 사념은 해파리의 몸 안에 깃들게 되었다.

    그리고 또 긴 암흑.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로소 눈앞에 익숙한 광경이 재현되었다.

    ‘으엑! 개징그러워! 뭐 저렇게 생겼어!?’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하다. 불쾌한 골짜기. 기괴해.’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얼마든지 때려 봐라!!!’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이산하, 솔레이크, 이우주, 그리고 죠르디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천신만고 끝에 네 사람은 흑해의 무영왕, 이 동영상의 1인칭 화자를 쓰러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에요.’

    그리고 이내, 흑해의 무영왕이 몸속에 간직하고 있던 달의 파편이 환하게 빛난다.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달.

    달에 서서 태양을 향해 보내는 찬가.

    네 사람이 트레일러 영상의 마지막을 확인하는 순간.

    -띠링!

    <‘월궁항아(月宮嫦娥)’의 트레일러 영상이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본편의 동영상 ‘후예사일(后羿射日)’이 시작됩니다.>

    <본 동영상은 [SKIP] 할 수 없습니다.>

    .

    .

    기묘한 알림이 떴다.

    강제로 시청할 수밖에 없는 동영상.

    그것이 시작되자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르륵!

    동영상이 재생되자마자 뜬 화면은 온통 불타고 있는 세상이었다.

    산천초목은 불타고 강과 호수는 말라붙었으며 바다는 끓는다.

    온 세상이 뜨겁게 작렬하고 있었다.

    휘이잉-

    하늘 위로 거대한 용이 날아간다.

    태양룡 ‘바이어스’.

    골드 드래곤 족의 제왕.

    용족의 최고 존엄.

    먼 옛날, 아빠가 미처 완전히 잡지 못했던 고정 S+등급의 몬스터.

    “뭐, 뭐지!? 바이어스가 왜 지금 나와!? 벌써 확장팩이 시작된 건가!?”

    “아니야. 이건 과거잖아.”

    “아마도 태양룡 바이어스의 과거?”

    “놀라운 일이…… 헉!?”

    하지만 네 사람에게는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휘이이이잉-

    뜨거운 기류가 일며, 태양룡이 가르고 날아간 하늘 위로 아홉 개의 비행운이 더 새겨진다.

    고정 S+급 몬스터 태양룡(太陽龍).

    그것이 무려 열 마리씩이나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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