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6화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3)
…콰쾅!
흑해의 무영왕이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지금 그 위압감은 전만 못했다.
이우주는 과거 아빠가 씨어데블의 쓰나미 공격을 피했던 암초 위에 선 채 말했다.
“옛날의 아빠는 이곳에서 A+급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었지.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다!”
그 외침을 들은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산하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혹시 아빠가 씨어데블 잡을 때 썼던 버그 말하는 거야? 그 동영상이라면 나도 봤는데…… 그건 지금 상황에서는 못 쓰는 버그야! 그리고 애초에 그 버그는 바로 패치되어서 사라졌다고!”
“음. 누나치고는 정확한 지적이군. 하지만 내가 이곳을 최후의 전장으로 고른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야.”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아빠의 과거 행적이 재현되고 있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A+급 몬스터 씨어데블의 초필살기, 혼신의 힘을 담은 궁극 특성의 발현.
꿀렁- 꿀렁- 꿀렁- 꿀렁-
마치 이 세상이 통째로 떠오르는 것 같아 보이는 쓰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늘에 닿을 듯 융기하는 바다.
거대한 해일.
높이 1,500m, 길이 445.8km의 쓰나미.
그것은 A+급 몬스터가 자신의 체력과 스테미나를 거진 다 소모해 가며 터트리는 자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씨어데블이 리젠되는 좌표는 항상 이 파도를 중심으로 정해지지. 그 좌표값에서 왼쪽 대각선으로 7시 방향, 거리는 약 15미터. 그곳에는 99%가 넘는 확률로 이 암초가 존재해.”
이우주는 자신이 딛고 있는 암초를 발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과거에는 이 암초가 모든 해수 데미지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버그가 있었어.”
머릿속에 아빠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귓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그 믿음직한 음성.
‘그리고 놀랍게도! 이 암초 위에 서면 모든 공격이 자동으로 피해지지!’
그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루고 있는 지형들 중 ‘바다 지형’의 정의가 어디까지인지 구분하기 위한 범위, 즉 개념의 조작적 정의가 한계하는 바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게임 설정상 바닷물은 ‘바다 지형’에만 존재한다.
당연히 해수로 인한 ‘지형 데미지’ 역시도 그렇다.
‘바다 지형’은 ‘바닥과 수면의 간극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지형’으로 일괄 정의, 인식된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 근방의 모든 지형은 바다 지형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오직 이 암초 하나만큼은 ‘바다 지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암초의 정상과 수면과의 간극이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이 드넓은 해수면의 표면적 중 유일하게 이 암초의 끝부분만이 육지 지형으로 인식되었어.”
그렇다. 이 암초는 월드맵의 시스템 규정상 ‘육지 지형’으로 인식되는 장소.
고로 바다 지역에만 적용되는 해일의 지형 데미지도 이 부분만은 빗겨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옛날 옛적의 일.
이산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 버그라면 나도 알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 버그는 아빠에게 발견된 지 3년 뒤, 지형 밸런스 패치 때 수정되어 사라졌단 말이야! 그리고 흑해의 무영왕은 해수로 인한 지형 데미지가 아니라 그림자로 인한 속성 데미지를 주잖아? 그런데 어떻게…….”
“말했잖아.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 암초 위에 서 있다고. 아빠의 공략과는 공교롭게도 위치만 겹쳤을 뿐, 이것은 엄연히 전혀 다른 공략이야.”
이우주는 암초를 발로 디딘 채 말을 이어나갔다.
“라하이나 눈(Lahaina Noon) 현상이라고 들어봤어?”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두 눈만 끔뻑거린다.
“……뭐? 뭔 눈? 그게 뭐야?”
“우주. 한영키 안 눌렀나? 알아듣지 못할 말.”
“처음 들어 보는 현상이다.”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해 주었다.
“‘라하이나(La haina)’는 하와이언어로 ‘잔인한 태양’이라는 뜻이지. ‘그림자가 사라지는 정오’를 뜻하기도 해. 하와이에서 매년 2회 정도 발생하는 현상으로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싹 다 사라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 마치 포토샵으로 지워 버린 듯 말이야.”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해?”
“물론 실제로 있는 현상이야. 지구와 태양이 딱 마주보는 거리에서 태양을 정확히 정수리 꼭대기 위에 두고 있으면 그림자가 안 생기잖아. 바로 그런 원리야.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지구는 올곧은 형태로 회전하지 않고 항상 23° 26′ 22″도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는데 이 때문에 태양빛이 수직으로 입사하는 곳이 한정적이게끔 되지. 세계지도를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어. 보통 일반적인 세계지도는 적도의 상, 하로 선이 하나씩 그려져 있는데 이 중에 위도 23° 26′ 22″선을 가리키는 것을 ‘회귀선’이라 하고, 적도 이북에 위치한 선은 북회귀선, 이남에 위치한 선은 남회귀선이라고 부르지. 태양의 남중고도가 90°가 될 수 있는 한계선이야. 따라서 두 회귀선 사이의 지역은 매년 태양의 남중고도가 90°가 되는 시기를 맞이해. 남북 회귀선 사이의 지역에서 태양의 남중고도와 지상이 정확히 90도로 마주 보게 되는 일이 생기면 태양빛이 정확하게 수직으로 직사되기 때문에 모든 그림자가 사라져 버리게 되지.”
이우주는 눈을 반짝이며 태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뎀2에서도 마찬가지야. 낮 12시가 되면 이 암초 위를 중심으로 반경 수 킬로미터 안의 그림자값이 0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그것 역시도 1년에 딱 2번 있는 날이야. 내가 몇 번이나 좌표값을 계산해 봐서 알아. 지난 7년간 공부하면서 정확히 14번의 라하이나 눈 현상이 일어났고 그 다음 차례가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이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 가장 가깝게 위치한 순간.
츠츠츠츠츠츠……
주변에 있던 모든 그림자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게임의 각종 수많은 수치들 중 그림자가 차지하는 값이 일시적으로 0이 되는 것은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딱 하나, 그림자를 주 무기로 삼는 필드보스 ‘흑해의 무영왕’에게는 그 변화가 매우 치명적이고도 뼈아픈 것이었다.
이우주의 머릿속에 쓰나미를 향해 울부짖던 아빠의 포효가 울려 퍼진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얼마든지 때려 봐라!!!’
마치 아빠 사자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새끼 사자처럼, 이우주 역시도 흑해의 무영왕을 향해 외쳤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얼마든지 때려 봐라!!!”
거대한 그림자의 해일이 일어났지만 이우주가 서 있는 암초 위에 닿는 즉시 그것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세이프 존(Safe Zone)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파츠츠츠츠츠츠……
흑해의 무영왕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그림자, 사념의 집합체들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에 닿아 급속도로 소멸해 간다.
이우주가 외쳤다.
“라하이나 눈 현상은 지속시간이 짧아! 그 안에 승부를 내야 해!”
“라져!”
마지막 말만큼은 모두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들은 막간을 이용해 마신 포션으로 체력을 회복했고 이내 눈앞에 있는 거대한 해파리를 향해 가차 없이 딜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수압 차와 기온 차, 그리고 작렬하는 햇빛에 의해 한껏 흐물흐물해진 해파리의 살점은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 나갔다.
…퍼펑!
이우주 역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퍽!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라니냐의 용오름이 흑해의 무영왕을 사납게 후려갈긴다.
“1만 콤보 스타트!”
이우주는 놀라운 속도로 흑해의 무영왕에게 딜을 박아 넣었다.
퍼퍼퍼퍼펑!
투명한 살점 속에 고여 있던 진득한 어둠들이 빠져나간다.
하늘에 가득 끼어 있던 먹구름 역시도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그때.
파앗!
먹구름이 흩어지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태양빛이 이우주의 전신을 비추었다.
동시에.
-띠링!
예기치 못했던 알림음 하나가 이우주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아이템 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먹구름을 뚫고 새어 들어온 햇살은 이우주의 손안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긴 형상을 이루었다.
이윽고, 황금빛 광채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굵고 긴 작살 하나가 이우주의 손에 들렸다.
-<태양살(太陽殺)의 화살> / 한손무기 / S
불을 찢는 힘이 담겨있는 파사(破邪)의 화살.
원래는 열 발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발 밖에는 남지 않았다.
-공격력 +5,000
-특성 ‘관통(貫通)’ 사용 가능 (특수)
-특성 ‘반정(反正)’ 사용 가능 (특수)
-특성 ‘곤장형(棍杖刑)’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십시일반(十矢一反)’ 사용 가능 (특수)
-특성 ‘후예사일(后羿射日)’ 사용 가능 (특수)
너무나도 커서 마치 작살처럼 보이는 화살.
A+등급의 무기였던 ‘태양살의 몽둥이’와 ‘태양살의 화살촉’이 융합하여 생겨난 신무기였다.
S등급으로 랭크업한 동시에 ‘융합’ 특성이 사라지고 ‘관통’ 특성이 붙은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다.
특성: <관통(貫通)>
↳ 무조건 하나 이상의 적을 꿰뚫고 전진합니다.
이우주는 새로 얻은 무기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흑해의 무영왕의 그림자가 봉인되어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승부를 내야 했다.
…쿠르륵!
이우주는 살인자의 백과사전을 꺼내 들었다.
페이지 안에 기록되어 있는 특성들은 두 개.
엘리뇨의 ‘홍해’와 라니냐의 ‘용권’이다.
이우주는 그 두 개의 특성을 동시에 발현시켰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이윽고, 이우주의 몸이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으로 붉은 회오리가 사납게 몰아쳤다.
“다들 떨어져!”
이우주의 오더에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야아아아압!”
이우주는 흑해의 무영왕을 향해 모든 힘을 쏟아 냈다.
1%…… 12%…… 21%…… 36%…… 47%…… 59%…… 78%…… 83%…… 91%……
롤모델 특성 역시도 점점 개화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우주는 아빠가 씨어데블을 향해 외쳤던 마지막 대사를 똑같이 따라 외쳤다.
“흑해의 무영왕! 넌 내 꺼야!”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명대사와 함께.
퍼억!
이우주의 막타가 작렬했다.
츠츠츠츠츠츠……
‘살인자의 백과사전’이 흑해의 무영왕에게서 힘 하나를 빼앗음과 동시에.
-띠링!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의 귓가에도 알림음이 떴다.
-띠링!
<세계 최초로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
<‘흑해의 무영왕’이 죽었습니다. 하해의 어둠이 저변의 아래에 봉인됩니다.>
<바다 밑에 갇혀있던 모든 사념들이 천천히 흩어집니다.>
<하해를 떠돌던 망령들이 해파리들의 몸에서 빠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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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세계 최초로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림자를 빼앗긴 사나이’를 완료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처치 1/1>
<시추꾼 이스마엘이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았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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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여정의 끝.
‘하해(下海)의 무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