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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929화 (929/1,000)
  • 외전 55화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2)

    죠르디 번디베일.

    그녀는 유령 군마의 위에 탄 채 하늘에 우뚝 서서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로 봉몽 때의 빚은 갚은 거다. 진짜로.”

    도와준 것이 아니라 빚을 갚은 것임을 거듭 확인하는 그녀의 귀 끝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는지는 역광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번쩍!

    죠르디의 칼이 다시 한번 허공을 날았다.

    그녀는 유령 군마를 몰아 상공을 달리며 거대한 적란운을 베어 가르고 있었다.

    두껍게 깔린 먹구름이 쪼개지며 그 균열 틈으로 정오의 쨍쨍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륵!

    흑해의 무영왕이 반응을 보인다.

    태양빛에 닿은 촉수가 불판에 내던져진 오징어처럼 돌돌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던 촉수들이 말려들며 생긴 빈틈으로 죠르디가 내려왔다.

    [푸히잉!]

    유령 군마는 입으로 이산하와 솔레이크를 한번에 물고 위로 올라갔다.

    물론 이우주는 죠르디가 직접 손을 뻗어 공주님처럼 안아든 뒤였다.

    “야! 왜 나랑 동생이랑 차별하냐!”

    “이 말…… 해골만 남은 주제에 침 뚝뚝. Wet. 너무 흥건하다.”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죠르디는 말을 몰았다.

    “가자!”

    그녀는 바다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우주가 물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하지만 이런 망망대해를 배 하나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우주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고 할 때.

    부우우웅- 철썩!

    바로 뒤에서 거대한 촉수가 휘둘러졌다.

    흑해의 무영왕은 태양빛을 받으면서도 추격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집요하게 등 뒤를 노리는 촉수에 죠르디는 이를 악물었다.

    “유령 군마의 체력이 부족해. 오래는 못 버텨. 너라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의외로 신뢰라는 감정이 느껴지는 죠르디의 목소리에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마침 방향이 딱 좋군. 이대로만 직진해 줘.”

    “……말했다. 오래는 못 버틴다고.”

    이우주의 말을 들은 죠르디는 그걸로 됐다는 듯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다.

    “이랴!”

    고삐가 바짝 당겨졌고 유령 군마는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콰쾅!

    말이 질주한 직후의 수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깨져 나간다.

    흑해의 무영왕은 심해에 있었을 때보다 더욱 더 거대해진 몸으로 네 사람을 뒤쫓고 있었다.

    뒤를 흘끗 돌아본 죠르디는 죄다 부서지고 박살나 거칠게 요동치고 있는 해수면을 보고 핼쑥한 낯빛을 띠었다.

    “진짜 존나 쎄 보이네. 저런 걸 잡을 생각을 했단 말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냐?”

    “‘여벌의 목숨’ 특성은 없는데. ‘여벌의 심장’이라는 특성은 옛날에 아빠에게 있었지만.”

    “……그런 뜻이 아니잖냐. 너도 참 어지간히 게임 덕후구나.”

    죠르디는 말고삐를 더더욱 바짝 당겼다.

    실시간으로 부서지고 있는 해수면, 굉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주변으로 거친 해일이 몰아친다.

    죠르디는 혀를 내둘렀다.

    “칼을 휘두를 틈도 안 주는군. 보아하니 ‘대심해’ 특성을 가진 놈 같은데 그걸 감안하면 저번에 상대했던 데스나이트 봉몽보다도 강해 보여. 어떻게 잡을 생각이야?”

    “그건…….”

    이우주가 막 입을 열려 할 때.

    쿠오오오오오!

    마침내 거대한 촉수 하나가 네 사람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하늘에서 수면 위로, 마치 심판의 망치처럼 떨어져 내리는 촉수 다발.

    하지만 그것은 이산하의 화살이 막아냈다.

    “야잇! 받아라! 이 물렁살 놈아!”

    쏘아져 나간 화살이 촉수의 끝을 파괴했다.

    퍼펑! 철푸덕! 철푸덕! 철푸덕!

    산산조각 난 해파리의 살점이 해수면 위로 떨어져 내리며 무수한 파문을 만들어 낸다.

    [자신이 들어가 누울 관 하나쯤은 마련해 오는 것이 좋아.]

    [언제나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죽음을.]

    [……하느님의 영역은 여기까지.]

    [짐승에게 복수를 하겠다니…… 미친 짓이야. 하지만 그 또한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짐승이리니.]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그럴 때마다 끔찍한 절규와 단말마들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단연코 가장 강력한 사념이 깃든 목소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에요.’

    달에 처음으로 간 튜더가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

    분명 달에 봉인되어 있었던 누군가의 커다란 사념이 해저를 떠돌던 거대한 해파리에게 먹힌 결과이리라.

    퍼펑! 퍼퍼펑!

    이산하는 계속해서 화살을 발사해 해파리에게 딜을 넣었다.

    “핫하! 저 자식! 막상 해수면 위로 꺼내 놓고 보니 완전 물렁살이야! 딜 넣으면 넣는 대로 다 박혀! 저렇게 살점 부서지는 것 좀 봐! 게다가 몸뚱이도 커서 쏘면 쏘는 대로 다 맞네! 야호! 사장님 나이스 샷!”

    하지만 흑해의 무영왕이 물렁물렁하고 흐물흐물한 몸을 가졌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풍덩! …풍덩! …풍덩! …철푸덕! …철푸덕! …철푸덕!

    터져나간 살점이 잘게 흩어져 수면 위로 떨어질 때마다.

    파치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포가 끓었다.

    그리고 그 작은 살점들 중 하나가 이산하의 손등에 떨어지자.

    “끄아아아앗뜨거!?”

    이산하는 들고 있던 시위를 놓치고 말았다.

    흑해의 무영왕의 전신은 어느새부터인가 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펄펄 끓는 증기에 의해 전신이 삶아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우주는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압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 물이 끓는 것은 맞지만…… 그걸 설마 몬스터의 몸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해파리 계열 몬스터의 몸은 95%가 물이라서 그런 건가.”

    대기권 밖으로 맨몸이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 노출된 비행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침이 끓는 기분’이었다고 말이다.

    “심해의 무시무시한 수압에 적응된 액체가 갑작스럽게 해방되니 저온에서도 끓을 수 있지. 당연히 거대한 몸 내부에서 충격파가 발생하고 전신이 삶는 것처럼 뜨거워질 수밖에.”

    말 그대로였다.

    흑해의 무영왕은 펄펄 끓는 내장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네 사람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으윽! 화살을 쏠 때마다 사방으로 끓는 육체 파편이 튀어서 딜 넣기가 애매해!”

    “쳇. 그렇다면 칼은 더 심하겠군.”

    “내 골렘의 에너지. 방전. 기동에는 more 시간 필요!”

    이산하, 죠르디, 솔레이크 모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쿠-오오오오오오오!

    흑해의 무영왕은 더욱 더 엄청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투명한 몸속에서 빠져나온 진득한 어둠.

    수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칠흑이 파도처럼 융기해 오르고 있었다.

    세 여자의 표정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저, 저건 절대 못 피하겠는데.”

    “그림자 공격인가. 저것도 실체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렇다. 전방위적 공격. 쓰나미. 저건 못 피해.”

    바로 그때.

    “지금이다! 10초 뒤에 멈춰!”

    이우주가 난데없이 기동 중지 오더를 내렸다.

    죠르디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제정신이야? 여기서 멈췄다간 저 그림자 해일에 피격당할 거야! 바로 즉사라고!”

    “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이우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별수 없이, 죠르디는 말고삐를 당겨 유령 군마를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촤아아아악-

    발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가속도에 의해 계속해서 앞으로 미끄러지는 유령 군마.

    그 위에 선 이우주는 시간 초를 잼과 동시에 위도와 좌표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10.”

    말발굽이 미끄러지며 만들어 내는 파도가 높게 솟구쳐 오른다.

    “9.”

    이우주의 카운트다운 뒤를 바짝 추격해 오는 그림자의 파도.

    “8.”

    흑해의 무영왕은 그림자 촉수들을 휘두른다.

    “7.”

    이산하의 화살은 실체가 있는 촉수들을 걷어 내고 있었지만 그림자 촉수들은 그대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6.”

    죠르디 역시 칼을 빼들었다.

    “5.”

    허공을 날아간 참격은 마찬가지로 실체가 있는 촉수들을 베어 냈지만 그 뒤로 밀려오는 그림자의 파도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4.”

    그림자들이 몰려온다.

    “3.”

    그것들은 수없이 많은 사념들의 집합체.

    “2.”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거대한 자연재해였다.

    “1.”

    이윽고, 그림자들이 모두를 덮쳤다.

    “0.”

    모든 것들을 죄다 파괴해 버릴 수 있는 강맹한 초필살기였다.

    ……하지만.

    “어!?”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사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몰려들던 그림자의 파도는 별안간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흑해의 무영왕이 뿜어내던 거대한 사념체 역시도 일거에 소멸했다.

    [……?]

    심지어 흑해의 무영왕 본인조차 현재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이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파스스스스스스스-

    모든 것들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파도, 물결, 수면 위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이 드리웠던 그림자들이 싹 다 사라졌다.

    흑해의 무영왕이 흡수해서가 아니었다.

    정작 흑해의 무영왕 본인이 드리우고 있었던 그림자들까지 싹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꾸르르르륵!

    그림자로 만들어졌던 촉수들이 모두 사라졌다.

    거대하게 몰려들고 있었던 해일 역시도 마치 지우개로 한 번에 지워 버린 도화지 위의 낙서들처럼 간 곳이 없게끔 되었다.

    [???]

    흑해의 무영왕은 크게 당황한 듯 나머지 촉수들을 움찔거린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우주가 미소 짓고 있었다.

    …탁!

    이우주는 죠르디의 품에서 나와 바다로 뛰어들었다.

    놀랍게도, 이우주는 수면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우뚝 서 있다.

    마치 물 위를 걷는 기적처럼 말이다.

    “으악! 푸하! 야! 너 어떻게 물 위에 서 있냐?”

    이산하는 이우주를 따라 물 위로 발을 디뎠다가 바로 빠졌다.

    그런 누나를 향해 이우주는 아래로 까닥 턱짓했다.

    “이 밑에는 암초가 있어.”

    그렇다.

    이우주는 해수면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잠겨있던 암초를 밟고 올라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암초는 이우주에게 있어 다소 특별한 암초였다.

    ‘파도를 잘 보면 군청색, 남색, 파란색, 청록색, 하늘색, 이렇게 5가지의 색 패턴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중 하늘색 부분이 가장 파도가 얇아서 데미지도 적은 부분이지! 그 부분을 후면 구르기로 맞아 가면서 피하면 된다! 아파 보이지만 실제 데미지는 극소량!’

    ‘이렇게 왼! 지금은 오른! 아니 밑! 이 아니라 위! 훌라후프를 통과하는 돌고래처럼 앞으로 스무쓰하게 넘어서 다시 왼! 오! 빈 공간 찾아서 슈욱! 구르기로 피해 주고!’

    ‘자, 지금 여기 어지럽게 덮치는 소용돌이는 워낙 기형적이라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없어! 그렇다면! ‘사운드 플레이’를 이용! 눈이나 레이더에 안 보인다면 귀로 들어야지!’

    ‘자, 좌측에서 도는 급류는 ‘휘크류류’ 우측으로 도는 급류는 ‘푸크류류’ 왼쪽은 휘! 오른쪽은 푸! 그것만 기억해라!’

    ‘휘크류류가 올 때는 이렇게 좌측 대각선 35˚ 방향으로 뒷구르기를 해 주고! 푸크류류가 올 때는 이렇게 우측 대각선 70˚ 방향으로 앞구르기를 해 준다!’

    ‘어떤 경우에도 물살의 진행 방향 반대로 구르면 안 돼! 그랬다간 몸 전체가 으스러질 거다! 참고로 물살은 너무 빨라서 눈에 잘 안 보이니까 소리를 잘 들어야 해! 엇차!’

    ‘……어때요, 참 쉽죠!?’

    먼 옛날의 동영상.

    과거 ‘씨어데블’이라는 A+급 몬스터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어 놓았던 아빠의 레이드 동영상이 이우주의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그 당시 씨어데블의 좌표값 119.32.1991.3.21. 그리고 암초의 좌표값 119.32.1993.3.27.”

    이곳은 바로 20여 년 전, 아빠가 처음으로 밟았던 바로 그 암초 위였다.

    “옛날의 아빠는 이곳에서 A+급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었지.”

    이윽고, 이우주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해파리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다!”

    후발주자가 힘차게 앞으로 뛰어 나간다.

    선발주자만큼이나 맹렬한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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