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4화 흑해(黑海)의 무영왕(無影王) (1)
-띠링!
<곧 세상의 끝 ‘하해의 저변’에 도달합니다>
<‘진(眞) 보스’가 눈을 떴습니다!>
흑해의 무영왕 ‘항아(嫦娥)’.
이 구역의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덩어리.
그것은 거꾸로 뒤집힌 채 눈알을 아래로 굴려 위쪽에 있는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를 바라본다.
얼굴의 입장에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이지만 다른 세 사람의 입장에서는 올려다보는 것과 같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또한 여자의 얼굴 부분의 밑에는 하늘하늘한 머리카락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촉수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즉, 목이 잘린 여자가 거꾸로 뒤집힌 채 머리카락으로 헤엄쳐 다니는 것과도 같은 모양새.
어찌보면 거대한 해파리가 바로 서 있는 듯하기도 했다.
“으엑! 개징그러워! 뭐 저렇게 생겼어!?”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하다. 불쾌한 골짜기. 기괴해.”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혐오스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이우주는 침착한 태도로 발광 산호를 들어 올려 그 어슴푸레한 빛으로 몬스터의 상태창을 관찰하고 있었다.
<흑해의 무영왕 ‘항아(嫦娥)’> -등급: S / 특성: 어둠, 대심해, 불로불사, 살금살금, 1:1, 그림자 밟기, 그림자 분신, 적란운(積亂雲), 발전, 지진해일, 사념, 후예사일(后羿射日)
-서식지: 하해(下海)의 저변
-크기: ?
-악의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사념의 집합체. 그림자의 왕.
태고 시절부터 퇴적되어 온 이 거대한 사념은 닿는 그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리며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투명한 거체를 가지고 있는 한 마리의 해파리였다.
고-오오오오……
투명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변 심해의 지독한 어둠 때문일까?
그것은 어떠한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은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세 사람의 지척까지 접근해 온 것이다.
실제로 세 사람은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경고음이 들리기 전까지 이 녀석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까.
슈르르르르륵!
머리카락과도 같은 가느다란 촉수가 이쪽을 향해 밀려 들어온다.
투명할 뿐만 아니라 심해의 지독한 어둠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끔찍하게도 생겼군. 공격 패턴도 끔찍하고.”
이우주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슥-
이우주는 볼을 간질이고 가는 한 가닥의 촉수를 느꼈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끈적하고 질척한, 마치 타르가 한 줄기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진 것처럼 얇고 가느다란 촉수였다.
이우주는 그것이 흑해의 무영왕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림자의 한 가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에요.’
촉수가 이우주의 몸에 닿는 순간, 귓가를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는 말은 달콤하지만…… 나를 죽이려는 의도로 가득한걸?”
말과 달리 몸은 정직하다.
눈앞에 있는 흑해의 무영왕은 분명 침입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으아! 징그러워서 싸우기 싫다!”
“일단 위로 피신!”
이산하와 솔레이크 역시도 잽싸게 위로 상승했다.
촉수들의 아슬아슬하게 그녀들의 발꿈치를 스쳤다.
그러자.
[자신이 들어가 누울 관 하나쯤은 마련해 오는 것이 좋아.]
[언제나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죽음을.]
극도로 쉰, 듣기 싫은 목소리들이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귓전을 때린다.
숨막히고 지독한 사념들이 흑해의 무영왕이 내뻗는 촉수들과 함께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우주는 예전에 누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거 알아? 만물은 곧 에너지. 사람의 영혼도 결국은 음(-)과 양(+)의 전하라는 거. 사람이 죽으면 보통 그게 흩어져 사라지는데 가끔 근처에 물이 있으면 그것을 타고 흐른다나 봐. 그래서 수맥이 있는 곳에는 귀신이 있다잖아.’
‘들어봐. 그런데 사람이 바다에서 죽으면? 영혼의 전기적 신호는 어디로 갈까? 죽기 직전의 그 강렬한 메시지는 어디로 향할까? 물은 전기가 잘 통하지. 그것은 하염없이 어디론가 퍼져 나갈 거야. 그리고 라디오처럼 수신이 가능한 곳에서 붙잡히겠지.’
‘이 해파리는 말이야, 몸의 98% 이상이 물이야. 그리고 나머지 몸체에는 발전 세포가 있지. 전기를 만들어 내고 보관할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 보면 떠돌아다니는 주파수를 잡을 수 있는 라디오랄까?’
‘만약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 직전 강렬한 전기적 신호, 최후의 메시지를 사념처럼 남겼다면? 그리고 그 근처에 마침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발전 세포까지 가지고 있는 해파리가 있었다면? 그 익사체의 마지막 사념은 어디에 수신되어 깃들까?’
‘그러고 보니 한국전쟁 때 남한군이 보냈던 구조 신호가 수십 년 동안 주파수로 떠돌다가 우연히 한 초소의 무전기로 송신되었다는 괴담을 들었던 것 같아. 아빠한테서.’
이우주가 이산하에게 말했다.
“진짜로 해파리에는 물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념이 깃드는가 봐.”
“……어우.”
이산하는 자기가 해 준 괴담이지만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퍼펑! 퍼퍼퍼펑!
해파리의 촉수가 휘몰아쳤다.
촉수가 한번 움직이면 그것의 그림자 역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또다시 데미지를 뿌린다.
그러니까 본체와 그림자가 둘 다 따로 움직이고 있기에 이 거대한 해파리는 촉수를 두 배로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셈이다.
“쳇. 비켜라!”
이우주는 살인자의 백과사전을 꺼내 들었다.
…팟!
이윽고, 몸에서 라니냐의 특성인 ‘용오름’이 발현되었다.
콰콰콰콰쾅!
이우주는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허리를 잡은 채 위로 세차게 치솟아 올랐다.
해파리의 촉수와 그림자 촉수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강력한 용권풍이 그것들을 찢어발겼다.
퍼퍼펑! 퍼퍼퍼퍼펑!
촉수들이 터져 나갈 때마다 끔찍한 비명과 절규, 단말마들이 울려 퍼진다.
[이 기름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귀하니까.]
[드디어 만났군. 향기로운 기름.]
[……하느님의 영역은 여기까지.]
[스타벅, 스텁, 패들러, 플라스크, 테슈테고, 다부… 모두 죽었어. 모두.]
[짐승에게 복수를 하겠다니…… 미친 짓이야. 하지만 그 또한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짐승이리니.]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퀴퀘그!]
.
.
그중에는 분명 이스마엘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우주는 바로 밑에서 흐늘거리고 있는 촉수와 그림자들을 내려다보며 침음을 삼켰다.
“그렇군. 저 괴물이 이스마엘 씨의 그림자를 훔쳐 갔어. 그림자를 빼앗기면 아마도 사념체가 되어 흡수당하는 모양이야.”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해파리는 하해의 제일 밑바닥에서 이곳 중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몇몇 몬스터들을 만났고 그때마다 촉수로 그것들을 휘감아 빨아 먹었기 때문이다.
꼬르르르륵……
거대한 상어도, 넓은 가오리도, 큰 입을 가진 아귀도, 근육 덩어리의 바다코끼리도.
이 거대한 해파리에게 잡히면 그림자를 빼앗긴 채 무력하게 쪼그라들어 사멸한다.
츠츠츠츠츠츠츠……
흑해의 무영왕은 상대방의 그림자를 흡수함으로써 자신이 모은 사념의 크기를 더욱더 크게 불린다.
그리고 그림자와 사념을 빼앗긴 상대는 체력의 대부분을 잃거나 그 즉시 사망해 버리는 것이다.
“저것이 아마 ‘그림자 밟기’ 특성이겠지. 끔찍하군. 놈에게 그림자를 빼앗기지 않게 조심해.”
이우주의 말에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촉수가 몸에 닿지 않게 잘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와중에 그림자까지 챙겨야 한다.
저 괴물의 공격은 몸뿐만 아니라 그림자에게도 같은 데미지를 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어두운 심해에서 그림자를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빛이 전혀 들지 않은 하해, 흑해의 무영왕은 자신의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크기를 더욱 더 키운다.
“오, 온다! 촉수랑 그림자 촉수를 조심해! 저거 공격 범위가 거의 무한대인 것 같아!”
“내 그림자의 위치와 면적까지 잘 계산해야겠군.”
“발광 산호를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림자가 보일 테니.”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긴장한 표정으로 위를 향해 헤엄쳤다.
이윽고, 수없이 많은 해파리의 촉수와 그림자의 촉수가 이쪽을 향해 밀려들었다.
마치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그림자의 파동.
저 시커먼 해일에 몸이나 그림자가 스치는 순간 그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칠흑의 심연 속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핏-
빠른 속도로 기동하던 솔레이크의 골렘이 다리 쪽에 문제가 생겼다.
본체는 이상이 없었지만 그림자 쪽의 발목 부근이 해파리의 그림자 촉수에 잡힌 것이다.
분명 골렘의 본체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앞으로 전혀 나갈 수 없다.
골렘의 그림자가 촉수의 그림자에게 발목을 잡혔기 때문에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쳇! 발목 부근 도킹 해제!”
솔레이크의 명령에 골렘은 한쪽 무릎 아래의 파츠들을 스스로 분해해 버렸다.
…파캉!
그러자 골렘의 그림자에서도 한쪽 무릎 아래의 다리들이 산산조각 났고 그제야 해파리의 그림자 촉수도 풀어졌다.
비로소 골렘은 다시 위를 향해 상승할 수 있었다.
“이거나 받아라!”
솔레이크의 외침에 따라 메카 골렘의 눈에서 번쩍거리는 빔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
꾸르륵-
그러자 엄청난 기세로 피어오르던 해파리의 촉수들이 조금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오? 빛을 싫어하나 봐! 그림자의 왕이라서 그런가?”
“이대로 쭉쭉 위로 올라가! 태양빛을 보게 만들면 이길 수 있어!”
“다들 내 골렘에 탑승! 이대로 수면 위까지 개돌!”
솔레이크의 골렘이 모든 에너지를 기동에만 집중시켰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기세로 솟구쳐 오르는 제트기류.
거기에 S급 몬스터인 라니냐의 특성 ‘용오름’이 더해지자 세 사람의 상승 속도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했다.
“조금만 버텨! 곧 수면 위다!”
“수압…… 수압이 너무…… 급격하게…… 큭! 멀미가!?”
“우주! 쪼렙! 산소 돌 많이 깨물어라!”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온 힘을 다해 상승했다.
이산하가 파티원들을 격려했다.
“곧 바다 위로 나간다! 거기에는 태양이 있어! 흑해의 무영왕도 태양빛 아래에서는 형편없이 약해질 거야!”
그것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흑해의 무영왕은 인공지능이 낮은지 어그로에 이끌려 해수면 가까이까지 상승하고 있었다.
이제 곧 놈은 쨍쨍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노출될 것이고 마른 오징어처럼 변해 버리리라.
이윽고.
세 사람은 수면을 부수고 뛰쳐 올랐다.
“푸하!”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맑은 공기.
산소돌 부스러기들을 뱉어내자 찝찔한 바닷물과 시원한 공기가 입안으로 훅 들어온다.
이산하는 눈에 들어간 바닷물을 닦아 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자, 보아라! 심해에 없던 거대한 빛을! 이것이 바로 태양이…… 어?”
하지만,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빛이 없다.
해수면 위 역시도 심해처럼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었다.
“……?”
세 사람은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지, 지금 밤이야? 아닌데? 12시인데? 설마 PM이랑 AM을 헷갈린 건가!?”
“아니야, 분명 낮이야. 해가 떠 있을 시간인데?”
“머, 먹구름! Dark clouds! 태풍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처참한 상황이었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아서 거대한 먹구름 층이 주변부의 바다를 완전히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 뭐야! 오늘 먹구름 낀다는 말 없었잖아! 기상청 뭐하냐고!”
“기상청 체육대회 때 비 왔다잖아.”
“그건 기상청이 일 잘한 거다. 체육대회 하기 싫어.”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거대한 흑색의 적란운(積亂雲) 앞에 절망했다.
그리고 이내.
촤아아아아악!
흑해의 무영왕이 수면을 부수고 그 위로 거대하고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상공의 거대한 먹구름을 만들어 낸 존재 역시도 이 거대한 해파리이리라.
‘이 자식…… 이걸 믿고 해수면까지 따라 올라온 거였나?’
이우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큰일이다. 태양빛이 없으면 준비했던 묘수들이 다 허사가 되어 버리는데…….”
그러나 먹구름의 범위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골렘이 가진 기동력이 이미 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우주 역시도 라니냐의 용오름 특성을 발현하느라 체력이 거의 다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쿠-오오오오오오!
흑해의 무영왕이 수많은 촉수들을 드리웠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를 해수면 위에 눌어붙은 세 조각의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하나하나가 강력한 사념을 품고 있는 거대한 촉수들이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우주는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바로 그때.
“야.”
누군가 이우주를 불렀다.
그것은 이산하의 목소리도, 솔레이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까칠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 층을 반으로 갈라 버리며 머리 위로 찬란한 광명(光明)을 드리운다.
…파앗!
유령 군마의 말안장 위에 앉은 채 긴 칼로 먹구름을 베어 내는 소녀.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죠르디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