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24화 (924/1,000)
  • 외전 50화 Fly me to the Moon (1)

    맨체스터 공항.

    한국에서 출발했던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다소 일찍 런던에 도착했다.

    “야호! 영국이다! 드디어 도착!”

    “나. 영국. 처음 와 본다. 해외여행 아예 처음. 떨려.”

    “쫄지 마. 촌티 나잖아. 캐리어 꽉 잡아. 도둑맞을 수도 있어.”

    “안 그래도. 양면테이프. 손에 감아 놨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공항의 라운지를 쾌활하고 씩씩하게 걸었다.

    그녀들은 수수한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이우주 역시도 그런 누나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이윽고, 세 사람은 택시를 잡기 위해 공항 입구로 향했다.

    그때.

    “어?”

    시력 좋은 이산하가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공항의 입구에 커다랗게 서 있는 하나의 동상이었다.

    낯익은 남자 하나가 알몸으로 앉아서 고뇌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조각상.

    ……심지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고인물: 위대한 개척자, 전 세계의 자랑.>

    이산하와 이우주는 혀를 내둘렀다.

    “뭐야 저 흉물스러우면서도 친숙한 나체 동상은.”

    “……아빠가 과연 대단하긴 하네.”

    이런 먼 나라의 먼 지역에 전혀 쌩뚱맞게 동상이 서 있다니.

    대체 뭘 기리고 뭘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튼.

    세 사람은 동상의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동상은 나름 이 지역의 명물인지 온갖 신체부위가 관광객들의 손길로 인해 닳아서 반들반들했고 택시 기사들 또한 이 동상을 중심으로 대기하며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택시를 타고 목적이로 향했다.

    런던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솟구쳐 있는 거대한 마천루.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는 이 높고 웅장한 건물의 현관에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로얄 블러드.

    현재 뎀2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길드의 현실 지부였다.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커다란 길드는 게임 안팎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이템 거래나 환전 등은 물론이요 게임 속의 의뢰를 현실에서 수행하거나 현실 속의 의뢰를 게임 속에서 수행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

    가상현실 게임의 발전과 함께 나날이 시가총액을 키워 나가고 있는 거대한 연합공동체였다.

    “……으음. 일단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이산하는 고민했다.

    오늘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이 커다란 회사의 총수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한때 세계랭킹 1위이자 영국 최고의 젊은 갑부로 통했던 남자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길드 마스터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난담?”

    “데스크에 문의해 보지 뭐.”

    “……모를 때는 정공법!”

    이우주의 의견에 모두들 동의했다.

    세 사람은 긴장한 와중에도 씩씩하게 걸어서 1층 로비의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친절한 미소를 양 입가에 띤 직원이 세 사람을 맞이한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아까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직원은 한국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마도 여러 개의 언어를 할 줄 아는 모양.

    이산하는 한국어가 통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회사의 사장님…… 아니, 이 길드의 길마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직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약간의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혹시 CEO님과 사전에 약속을 잡으셨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기다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혹시 CEO님의 가족이시거나 친구, 중요한 사업 파트너이신가요?”

    “아니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이기는 한데…… 아닌가? 어릴 때 한번 봤었나? 윽- 애기 때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그러자 직원은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응대가 어렵겠는걸요. CEO는 항상 바쁘셔서 예정된 약속이 아닌 한 거의 응하지 못하십니다.”

    “앗, 그럼 내일은요?”

    “으음. 아마도 내일 역시도…….”

    직원도 이산하도 모두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때.

    “What? Something in trouble?”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백발의 노신사가 이산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직원은 친절하게 그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 이 길드의 길드 마스터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그러자 노신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방금 전에 직원이 했던 질문을 똑같이 물어보았고 이산하는 같은 대답을 했다.

    “사전에 약속을 잡으셨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혹시 그의 가족, 친구, 중요한 사업 파트너이신가요?”

    “아니요.”

    이산하의 대답에 노신사는 턱을 짚었다.

    그는 다른 것들까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외모가 매우 아름다우신데, 혹시 유명한 연예인이시거나 인플루엔서이신가요? 해당 길드의 CEO께서는 예전부터 스캔들을 엄격하게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만남은 어려울 것입니다.”

    “아,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요. 한국에서 온.”

    “흐음. 그럼 한국의 유명 기업에서 방문하신 건가요? 젊은 CEO? 재계의 2세? 3세?”

    “그것도 아닌데요. 그냥 평범한…….”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계나 법조계 가문? 혹시 성씨가……?”

    “영천 이씨인데요.”

    “……혹시 그럼 개인적인 팬?”

    노신사의 마지막 질문에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렇게 대답하는 편이 관계를 증명하기에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신사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종 있지요. 근처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위해 회사의 내부를 견학하는 일이. 하지만 그것은 1년에 딱 세 번, 정해진 날짜에 제한된 구역에서만 가능합니다. 물론 회사의 총수까지는 만날 수 없지요.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렇군요. 사적인 것인가요?”

    “네.”

    “……으음.”

    노신사는 안타깝다는 듯 턱을 짚었다.

    “사적으로 로얄 블러드의 길드 마스터를 만나서 무언가를 질문하기 위해서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편이 가장 좋겠군요.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답니다.”

    “어, 어떤 건가요 그 어려움이라는 게?”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어디 지하 무투장 같은 곳에서 우승이라도 해야 식사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판타지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로얄블러드의 길드 마스터와 식사할 수 있는 권리는 경매에서 낙찰이 되고는 하지요. 저번 식사권의 가격은 약 450만 달러 정도였답니다. 총수님께서는 이를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계시지요.”

    450……? 만……? 달러……?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사백오십만 원이래? 더럽게 비싸당.”

    “달러라고 누나. 달러. 달러가 뭔지 몰라?”

    “환전하면 얼마인가? 어……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대충 50억 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로얄블러드 길드의 마스터 정도 되는 사람의 시간은 그만큼이나 가치 있고 비싸다.

    단순히 2시간 정도의 식사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돈을 내야 한다니.

    “와, 진짜 엄청 비싸다. 그 정도 돈 내고 밥 먹으면 밥은 그쪽이 사 주나?”

    “……50억 원 내고 식사하는데 밥값이 문제겠어?”

    “무서운 세상이다. 근데 메뉴는 무엇?”

    수군수군거리는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가 귀여운지 노신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따듯한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손님들이 로얄블러드의 마스터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마스터의 비서실에 몸담고 있습니다. 마침 저녁에 보고드리고 결재받을 안건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지요. 기회가 된다면 짧은 질문 정도는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운이 좋았다.

    노신사는 이산하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질문을 대신 전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요. 무엇이 궁금하시죠?”

    비서관 직함을 가지고 있는 노신사는 정중한 어조로 이산하에게 물었다.

    이산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희가 궁금한 것은 튜더 씨가 PVP에서 지셨을 때의 이야기인데요. 그때…….”

    순간. 비서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나긋나긋한 웃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숙녀분께서 무언가 착각을 하신 것 같군요. 마스터께서는 패배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아니, 있으실 텐데요?”

    “아니요. 없습니다. 적어도 사람 대 사람의 전투에서는 말이지요.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그분은 무적의 전설,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고 계시는 우리 영국의 자랑입니다. 로얄 블러드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시지요. 패배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비서관의 목소리에서는 강한 자부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나라의 꼿꼿한 긍지가 말이다.

    하지만 이산하는 너무 해맑아서 딱히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엥? 아닌데? 튜더 씨 분명히 지셨는데? 옛날에…….”

    “으음. 그런 허위 사실 유포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운이 나쁘다면 국가 모독죄에 회부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이니까요.”

    비서관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이산하는 빽 소리쳤다.

    “아, 무슨 소리예요! 예전에 울 아빠한테 얻어맞고 한 주먹에 리타이어 됐잖아요! 그때 달까지 날아갔었으면서!”

    그 순간.

    비서관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달. 한 주먹. 리타이어.

    떠오르는 것이 없을 수가 없다.

    비록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전 세계인의 뇌리에 마치 어젯밤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신화처럼 전승되어 내려오는 그날의 충격적인 퍼포먼스가.

    이윽고. 그는 휘둥그렇게 벌어진 눈,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구한테 얻어맞아요?”

    “아빠요! 울 아빠!”

    이산하가 답답하다는 듯 외치자 로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쏠렸다.

    통역을 하던 직원은 숫제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이윽고, 비서관은 이산하와 그 옆에 서 있는 이우주의 외모를 빠르게 체크했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Oh God. You sent your children to me……. It is the glory of the glory.”

    비서관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으로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얼굴에 성호를 그었다.

    동시에, 이 백발의 노신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결연한 눈빛과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반색을 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잘 됐다 싶었다.

    이산하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 그럼 저희는 길드 마스터님이 계시는 곳으로 안내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물론 아닙니다.”

    “……?”

    비서관의 단호한 부정에 세 사람의 표정은 다시 의아함으로 물든다.

    그러자 비서관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정정해 주었다.

    “길드 마스터를 여러분들께 안내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하겠습니다.”

    이쪽이 가는 게 아니라 그쪽이 오는 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