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22화 (922/1,000)

외전 48화 엘리뇨와 라니냐 (9)

와득-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각각 알록달록한 색의 돌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말랑말랑한 돌이 이빨 자국과 함께 움푹 패이며 산소가 발생한다.

가빠졌던 호흡이 차분하게 돌아왔고 전신에 느껴지는 수압 역시도 느슨해졌다.

“좋았어!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고!”

“대형 몬스터 레이드. 이 맛에 뎀 플레이한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각각 좌우로 나뉘었다.

엘리뇨는 정면에서 반으로 갈라지는 양동작전에 순간 어느 쪽을 우선순위로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거대한 산갈치가 일순간 꿈틀거림을 멈추는 그 찰나의 빈틈을 이산하는 놓치지 않았다.

“먹어랏!”

그녀가 시위를 당기자 이내 강맹한 파공성과 함께 수류가 요동친다.

펑-

시커먼 아우라가 휘감긴 화살이 엘리뇨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스켈레톤 킹 엘더의 사념이 깃든 독화살이었다.

…번쩍!

반대쪽에서는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온다.

솔레이크가 조종하는 메카 골렘이 두 눈에서 뿜어내는 파괴광선이다.

뼈 화살이 만들어 내는 시커먼 기둥과 메카 용자의 기운이 담긴 황금빛 기둥이 각각 엘리뇨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노리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

엘리뇨는 시뻘건 갈기를 빳빳하게 세운 채 저항했다.

자신과 아내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적, 하해의 왕위를 노리는 찬탈자.

그것들을 향한 맹렬한 분노는 곧장 피부를 통해 체온으로 발산되었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천불을 그대로 주변으로 퍼트리는 엘리뇨.

놈의 주위로 막대한 양의 해수들이 끓어오른다.

붉게 번지는 해류, 거대한 규모의 물거품들이 버섯의 형태를 그리며 융기하고 있었다.

삐끗!

한순간 확 터져 나온 열기와 그로 인한 대량의 해수 증발로 인해 이산하의 화살이 꺾였다.

오로지 직진밖에는 할 수 없는 솔레이크의 빔 역시도 물거품에 가려져 일순간 목표를 잃고 말았다.

그 틈을 타 엘리뇨가 긴 몸을 꿈틀거리며 헤엄쳐 온다.

거대한 심해괴물이 뿜어내는 흉폭한 기운 앞에 이산하가 기겁했다.

“으왓!? 온다! 접근전은 좀 참아 줘!”

“산하 원딜! 내가 몸빵! 엄호 부탁!”

솔레이크의 골렘이 엘리뇨의 돌진을 막아 세웠다.

…쾅!

커다란 합금 주먹이 거대한 산갈치의 머리통을 내리찍는다.

일순간 움직임이 정지한 엘리뇨의 눈으로 이산하의 뼈다귀 화살 한 대가 푹 틀어박혔다.

[크아아아아악!]

엘리뇨가 머리를 좌우로 한번 크게 휘둘렀다.

반동 데미지 부하에 일순간 스턴 상태에 빠져 있던 솔레이크의 골렘은 송곳니에 피격당해 뒤로 날아갔다.

쿵-

해구의 귀퉁이에 부딪쳐 가라앉는 솔레이크의 골렘.

아무리 고위 골렘이라고 해도 S급 몬스터의 발광을 정면으로 맞받아 내는 것은 무리다.

“으앙! 내 애착 골렘!”

“걱정마! 조금 쉬고 있어. 내가 회복할 시간을 벌게!”

울상이 된 솔레이크를 달래준 이산하가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산하는 화살을 두 개씩 시위에 걸고 쏘며 엘리뇨의 어그로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키고 있었다.

“야잇! 곡사 맛 좀 쬐끔만 봐랏!”

해류를 타고 전후좌우에서 쏘아져 오는 화살은 큰 데미지를 주지는 못해도 엘리뇨의 시선을 이리저리 분산시켜 놓는 효과가 있었다.

퍼펑! 퍼퍼펑!

화살이 엘리뇨의 피부에 박힐 때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타격 이펙트가 터져 나온다.

-<해골왕의 빗장뼈 장궁> / 양손무기 / A+

무수히 많은 적의 목숨을 빼앗아 온 추수자의 해골을 깎아 만든 활.

뼈 표면에 난 무수히 많은 구멍들 속에는 죽은 자들의 눈알이 하나하나 번들거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공격력 +3,500

-어둠 속성 공격력 +500

-특성 ‘괴벽’ 사용 가능 (특수)

-특성 ‘백전노장’ 사용 가능 (특수)

이산하의 손에 들린 장궁이 꿀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열 번의 공격 성공 시 한 번의 추가타가 들어가는 ‘괴벽’ 특성. 그리고 데미지를 입히거나 받을 때마다 공격력이나 방어력, 체력 중의 하나가 랜덤하게 상승하는 ‘백전노장’ 특성 또한 궁수에게 적합하다.

“어둠 속성을 가지고 있는 무기는 기분 탓인가, 어딘가 집요함이 있단 말이지. 대충 쏴도 잘 맞는다구!”

이산하가 활을 들 때면 활의 표면에 나 있는 수많은 눈알들이 흉흉한 시선을 뿜어낸다.

엘리뇨를 향한 적의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펑! 퍼펑! 펑! 퍼-억!

열 대의 화살을 맞히면 꼭 한 대의 화살 그림자가 엘리뇨를 긁어 놓는다.

그리고 추가타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다음 화살은 더더욱 매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뇨가 가만히 타격을 허용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쿠르르르르륵!

엘리뇨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특성인 ‘밀도류(密度流)’와 ‘보류(補流)’가 발동했다.

그것은 엘리뇨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인 ‘하강해류’와 연동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온 검푸른 바닷물이 시뻘건 바닷물을 아래로 밀어내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쿠-구구구구구!

지형을 바꿔 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

압도적인 자연재해가 심해의 무저갱 밑바닥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딜을 넣으며 엘리뇨의 어그로를 끌던 이산하와 솔레이크도 혀를 내둘렀다.

“이거는 포션이 아무리 많아도 무리겠는데?”

“앙버팀 특성. 들고 올 걸 그랬다. 냅다 도망.”

스턴이 풀린 골렘에 다시금 시동이 걸렸다.

솔레이크는 골렘을 가동해 이산하를 태우고 해진이 지배하는 구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엘리뇨는 그런 두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악!]

독사의 것처럼 날카로운 송곳니 두 개가 각각 이산하와 솔레이크를 노린다.

콰쾅!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절벽 귀퉁이가 순두부처럼 으깨지는 것을 본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와, 근접딜 장난 없네. 가까이 갔다간 진짜 최소 사망이겠다.”

“어차피 끓는 물. 홍해 특성. 가까이 못 간다. 원딜 및 어그로 분산이 효과적.”

이우주가 일찍이 말했던 바 있다.

엘리뇨의 공멸기(共滅技)가 발동한 이상 시간은 이쪽의 편, 그러니 부지런히 도망 다니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실수하지 말고 차분하게,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하자구 친구!”

“알겠다. 산하. 그런데 내 머리 좀 그만 밟아라.”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서로 앞서거니 뒤처지거니 하면서 적조가 지배하는 해역을 벗어났다.

부서진 달의 잔해들 사이로 격렬한 수류가 흐른다.

콰콰콰쾅!

그 위로 격분한 상태의 엘리뇨가 머리를 내밀었다.

부서진 돌조각과 진흙구름, 적조의 붉은기가 뒤섞인 가운데 핏발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노오란 눈동자.

그 오싹할 정도의 집념과 증오에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징하게 따라오네.”

“근데 저 구역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애처가 특성?”

그것은 아마 아내인 라니냐가 밑바닥에서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엘리뇨는 산소 고갈 때문에 숨을 꺽꺽 몰아쉬면서도 아내의 곁에서 일정 범위 이상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덕에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계속해서 원거리 공격으로 엘리뇨의 HP를 깎아 갔다.

“간다! 팽이치기 샷!”

“720도 빔!”

엘리뇨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화살과 빔을 날리는 두 여자.

아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있는 희대의 로맨티스트를 침몰시켜야 한다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저쪽은 몬스터, 이쪽은 플레이어.

애초에 정(正)과 반(反)으로 대립할 수 없게끔 짜인 세계관의 법칙인 것을.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격침시킨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딜을 퍼부었다.

입에 문 산소 돌이 바스러질 때마다 새로운 산소 돌을 한 움큼씩 물어 가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급의 벽은 높다.

엘리뇨는 격심한 산소부족으로 인해 아가미를 헐떡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더군다나 주변의 해수를 끓이고 있는 체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빠르게 소진해서라도 적의 숨통을 끊어 놓고자 하는 엘리뇨의 의지가 발현된 결과였다.

절대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던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표정 역시도 서서히 굳어 가고 있었다.

“헉! 이제 산소 돌도 슬슬 오링인데…… 으음, 이거 까딱했다가는…….”

“다 잡아 놓고 실패. 불안한 느낌.”

바로 그때.

쿠-르르르르륵!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표정을 더더욱 굳혀 놓는 흐름이 있었다.

어디선가 차가운 해수 한 줄기가 불어와 얼굴에 닿는다.

뜨겁고 빨갛던 적조의 기운이 걷히며 차디찬 해류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해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이곳 하해에 단 하나뿐이다.

“……라니냐!?”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기겁하며 외쳤다.

가사 상태에 놓여 있던 라니냐가 회복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상승해류’가 만들어질 리 없지 않은가.

“마, 말도 안 돼! 라니냐는 딸피 상태였는데!? 그새 회복했단 말야!?”

“S급 몬스터. 자연 회복량. 경이로움! 이번 레이드. 망했다!”

희비가 엇갈린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울상을 지었고 엘리뇨는 미소 지었다.

붉은 기류가 천천히 걷힌다.

엘리뇨는 고개를 돌려 밑바닥에서 올라올 반려자를 향해 기대와 희망, 신뢰와 기쁨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쿠르르르르륵!

하해의 밑, 진흙바닥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과 함께 한 줄기의 회오리가 용솟음쳤다.

그것은 마치 용권(龍卷)처럼 쏘아져 허공으로 높이 솟구쳤고 이내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격렬한 수류와 회오리, 적조의 붉은기와 포말에 휘감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라니냐의 힘이었다.

…푸핫!

적조의 기운이 흩어지자 엘리뇨 역시도 제 호흡을 되찾았다.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갈기를 지닌 이 거대한 산갈치는 되살아난 아내를 반가이 맞이했고 그와 동시에 저 증오스러운 찬탈자들을 향한 적의를 불태웠다.

이제 곧 라니냐가 올 것이고 엘리뇨의 몸과 포개어질 것이다.

그렇게 금슬 좋은 두 산갈치는 평소처럼 무한궤도를 그리며 눈앞의 적들을 섬멸할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쿠르륵!

맹렬한 속도로 접근해 온 상승해류는 점점 그 끝을 좁혀 온다.

그러더니.

콰-직!

그대로 엘리뇨의 머리를 관통해 버렸다.

“……!?”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띠링!

<세계 최초로 ‘엘리뇨’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세계 최초로 ‘라니냐’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이우주, 0개국어능력자>

<‘엘리뇨와 라니냐’가 동시에 쓰러졌습니다>

<하해의 유속이 급감합니다>

<하해의 수온이 안정화됩니다>

<하해의 저변, 초심층부의 대왕이 눈을 떠 상층(上層)을 올려다봅니다>

.

.

라니냐의 힘에 의해 다소 허무하게 격침당해 버린 엘리뇨.

그리고 귓가에 무수히 빗발치는 알림음들의 끝에는.

“……놀랐어?”

빙긋 미소 짓고 있는 이우주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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