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7화 엘리뇨와 라니냐 (8)
이우주는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몬스터 이름이 ‘엘리뇨’와 ‘라니냐’일 때부터 직감했지.”
엘리뇨는 적도 부근에서 따듯한 바닷물이 위로 올라오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라니냐는 적도 부근의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현상을 뜻하며 이는 엘리뇨의 반대 개념이다.
“그래서 생각했지. 엘리뇨에게만 있는 저 ‘홍해’ 특성이 대체 뭘까 하고.”
이우주의 말에 이산하와 솔레이크 역시도 엘리뇨의 상태창에 주목했다.
<엘리뇨> -등급: S / 특성: 가뭄, 폭우, 태풍, 홍수, 눈보라, 지진해일, 취송류, 밀도류, 경사류, 이안류, 보류, 자연재해, 변온, 백전노장, 연쇄살인, 뺑소니, 데스롤, 하강해류, 홍해(紅海)
-서식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44m
-붉은 갈기의 초대형 심해어류 수컷.
주변의 바다를 열탕(熱湯)으로 만들어 버리는 초고열의 체온을 자랑한다.
<라니냐> -등급: S / 특성: 가뭄, 폭우, 태풍, 홍수, 눈보라, 지진해일, 취송류, 밀도류, 경사류, 이안류, 보류, 자연재해, 변온, 백전노장, 연쇄살인, 뺑소니, 데스롤, 상승해류, 용권(龍卷)
-서식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44m
-푸른 갈기의 초대형 심해어류 암컷.
주변의 바다를 냉탕(冷湯)으로 만들어 버리는 극저온의 체온을 자랑한다.
‘가뭄’, ‘폭우’, ‘태풍’, ‘홍수’, ‘눈보라’, ‘지진해일’, ‘취송류’, ‘밀도류’, ‘경사류’, ‘이안류’, ‘보류’, ‘자연재해’, ‘변온’, ‘백전노장’, ‘연쇄살인’, ‘뺑소니’, ‘데스롤’ 특성이 서로 완벽하게 겹친다.
‘하강해류’와 ‘상승해류’ 특성은 서로 다른 듯 보이나 사실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대칭적, 보완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똑같거나 상호 대칭 및 보완적인 엘리뇨와 라니냐의 특성.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서로 관계가 없는 특성들이 딱 하나씩 존재한다.
엘리뇨에게는 ‘홍해(紅海)’, 라니냐에게는 ‘용권(龍卷)’.
풀이하면 각각 ‘붉은 바다’와 ‘용오름’으로 해석되는 이 두 특성만큼은 각 몬스터가 고유하게 보유하고 있는 성질이다.
이우주는 눈을 빛냈다.
“아마도 저 두 특성은 서로의 고유 특성, 서로가 함께 있을 때는 발현되지 않다가 짝을 잃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패시브 스킬일 것이란 말이지.”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엘리뇨와 라니냐는 한 번도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싸워 본 적이 없다.
이곳 하해 생태계의 정점으로 군림하는 동안 죽을 위기까지 몰려 본 적도, 짝을 잃을 위기에 직면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짝의 목숨이 경각에 도달했을 때, 혹은 자신의 생명이 위급할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학습한 적도 없었다.
이우주는 생각했다.
‘……아무리 똑똑한 딥러닝이라고 해도 경험치의 부족은 어찌할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늘 차가운 해류를 만들어 내던 라니냐가 힘을 잃고 쓰러지자 뜨거운 해류를 만들어 내는 엘리뇨의 힘만이 남았다.
이우주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니냐가 사라졌으니 이제 엘리뇨의 힘만 남았지. 그렇다면 엘리뇨 현상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그 현상’이 찾아오게 돼.”
이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드는 해류.
뜨겁게 달아오르는 홍해(紅海).
[오-오오오오!]
엘리뇨는 주변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새로운 종류의 해류에 당황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이우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늦었어. 잡을 거면 초장에 잡았어야지.”
무엇이든 지수 성장을 하는 것들은 초반에 잡아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목표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불어나는 법이다.
이윽고, 이 거대한 이상기후의 정체를 이산하와 솔레이크 역시도 깨달았다.
“……아하!”
“……Oh!”
적조(赤潮).
특정한 조류의 증식으로 인해 바닷물이 빨갛게 물드는 현상.
수온이 급격히 상승하거나 해수의 혼합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 발생하는 대규모의 해양현상이다.
“라니냐의 힘이 없으니 엘리뇨는 자체적으로 적조를 유발시키겠지. 그것이 바로 홍해 특성의 정체였던 거야!”
“문제는 엘리뇨 자신조차도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거고. 이곳 하해에서는 매번 둘이 같이 붙어 다녔으니 딱히 그들을 위협할 만한 포식자도 없었을 테니까.”
“물이 점점 Hot. 숨이 막힌다. 산소 돌. 많이 싸 짊어지고 와서 다행.”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입안의 산소 돌을 계속해서 갈아 끼우고 있었다.
-<산소 돌> / 재료 / B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돌맹이.
호흡에 필요한 각종 기체를 뿜어낸다.
레이드에 임하기 전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이 소모품들은 아직도 인벤토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이우주의 준비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적조 현상이 발생하면 수온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물속의 용존산소량이 급감하기에 물고기들이 떼죽음당하기 마련이거든.”
호흡이 안 되니 숨을 헐떡이다가 질식해 죽는 것이다.
“마치 우리 집 연못 속의 잉어들처럼 말이야.”
한편, 엘리뇨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붉은빛 해류가 부서진 달의 파편 사이를 가득 채우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꾸르르르르륵……
배를 허옇게 뒤집어 깐 채로 떠오르는 작은 미물들.
엘리뇨보다 몸집이 수천 배는 작은 그것들은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받고 죽음에게로 향한다.
마치 수없이 많은 함박눈들이 역방향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풍경.
[……그르륵! 끄륵-]
그리고 그것들이 죽어 가며 내는 소리와 비슷한 것이 옆에 있는 라니냐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쁘게 헐떡이는 숨은 금방이라도 꼴깍 넘어갈 듯하다.
처음으로 엘리뇨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나움만이 가득하던 동공에는 어느새 슬픔과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반면 이우주는 승기를 잡아 가는 이 순간에도 전혀 방심하지 않은 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다.
“……됐다. 모든 판이 깔렸어. 이제부터는 정면승부도 가능하겠군.”
적조 현상이 일어나면 해류가 순환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적조 생물을 침전시킬 수 있는 황토를 뿌려 주는 등의 임시방편도 도움이 된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연못에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황토볼을 넣어 준 것과도 비슷한 원리였다.
하지만 엘리뇨와 라니냐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초장부터 라니냐가 해파리 군체가 뿜어내는 번개폭풍에 당해 버린 이 시점에서는 말이다.
“저 홍해 특성이 발동된 이상 시간은 우리 편이지. 잘 버티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산소 고갈로 인한 도트데미지가 라니냐는 물론 엘리뇨 본인까지 자멸시킬 거야.”
이우주의 말대로다.
홍해(紅海).
주변의 해수를 뜨겁고 시뻘겋게 물들이는 특성.
적과 자신의 목을 동시에 조르는 공멸기(共滅技).
라니냐가 있으면 자연적으로 상쇄되었겠지만 그것은 이제 요원한 일이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괜찮지만 하나가 사라지면 남은 하나도 살지 못한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네. 잉꼬부부의 숙명 같은 걸까.”
“맞아. 엄마도 맨날 아빠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러잖아.”
“쪼끔 안타깝다. 홍해라는 공멸 특성을 발동하고 우리에게서 도망치다니. 악착같이 접근전을 펼쳤다면 무조건 이겼을 텐데. 아, 우리가 안타까워할 입장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특성 때문에 아내까지 잃게 생겼지. 후후후- 일거양득이야.”
“우와, 너 웃는 거 악마 같애.”
이산하와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뇨를 돌아보았다.
엘리뇨는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 가는 라니냐를 필사적으로 지킨다.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위협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아내의 몸에 몸을 비비고 어루만지는 남편.
하지만 애틋한 감정과 현실은 별개이다.
그렇게 가깝게 붙는 것은 오히려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었다.
[……커헉! 끄르르르륽!]
엘리뇨가 가까이 붙어 몸을 쓰다듬거나 밀착할 때마다 라니냐는 점점 더 숨을 심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산소가 더욱 더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탓이다.
그럴수록 엘리뇨는 라니냐를 향해 더더욱 가깝게 몸을 밀착시켰고 그것은 보다 더한 도트데미지를 라니냐에게 입히고 있었다.
솔레이크가 혀를 찼다.
“늘 붙어 있는 것. 좋은 것 아니다. 아름다운 거리.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부부 간에 있어 중요한 일. 때로는 서로의 선의. 서로에게 악영향으로 작용한다.”
“……뭐래, 모쏠이.”
“이 정도는 안다. 나는. 부부클리닉. 전쟁과 사랑. 애청자.”
이윽고. 솔레이크와 이산하가 본격적으로 레이드에 뛰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우주의 오더가 없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안다.
둘 다 나름대로 숙련된 게이머들이니까.
[크-오오오오오오오!]
엘리뇨가 목을 길게 빼며 포효했다.
죽어 가는 라니냐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승부.
비록 궁지에 몰렸다고는 해도 엘리뇨의 HP는 아직 상당하다.
더군다나 다른 자연재해류 특성들 역시도 건재했다.
“하지만 홍해 특성의 도트뎀 때문에 고통받고 있군? 라니냐 때문에라도 해류 특성은 봉인되었겠지.”
“우리는 산소 돌. 숨 쉴 수 있다. 도트뎀 없다.”
화살을 시위에 건 이산하와 골렘에 시동을 거는 솔레이크.
주변의 산소들이 극도로 희미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둘은 태연했다.
이제 최후의 무대에 돌입했다.
“각자 위치로!”
“라져!”
이우주의 오더가 떨어지자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좌우로 뻗어 나간다.
“……좋아. 그럼 나도 최후의 승부수를 띄워야지.”
이우주 역시도 누나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최종장(最終章).
엘리뇨를 쓰러트리기 위한 마지막 작전이 실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