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7화 아이템 제작 (3)
데스나이트 사냥으로부터 또 며칠이 흘렀다.
그린헬(GreenHell).
서부밀림 끝 쪽에 있는 광대한 삼림.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숲지대를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손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어 낸 재료가 쥐어져 있었다.
<발목절단 넝쿨 미치광이> -등급: A+ / 특성: 풀, 맹독, 하수인, 잠복, 뺑소니, 절단, 관통
-서식지: 그린헬 야영지
-크기: 15m
-숲을 걷는 자들의 발바닥은 이미 굳은살로 두터워 신발을 신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아무리 숙련된 이라고 해도 발목에 강철로 된 두툼한 발찌만은 꼭 착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도사리고 있는 이 끔찍한 넝쿨들 때문이다.
뿌리 끝부분의 구근을 변화시켜 날카로운 반월 모양의 칼날을 소유하게 된 이 식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물의 발목을 절단한 뒤 도망도 가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있는 먹잇감의 온 몸을 난도질해 고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식성은 오로지 육식이며 주로 피만 빨아먹고 살점은 남기곤 하는 ‘가시투성이 기생뿌리’와는 공생 관계인 듯하다.
그린헬의 삼림을 배회하는 각종 흉악한 식인식물들 중의 하나.
이 몬스터를 잡았을 때 극히 드문 확률로 떨어지는 재료 아이템이 현재 이우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식육부름 섬유(纖維)> / 재료 / A+
이산하는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겨우 잡았네. 엄청나게 까다로운 몬스터였어. 나는 궁수라서 그런가 매복타입 선공형 몬스터가 진짜 싫더라구.”
“요 며칠간 채식만 하고 들어간 보람이 있네. 그린헬은 육식을 하면 그만큼 스탯 디버프가 심해지니 원. 그리고 그동안 고기를 얼마나 먹었는지 다 뜨는 것도 놀랍고.”
“산하, 우주. 예전부터. 나. 진짜로 궁금한 것. 하나 있다. 너희 아빠. 도도새 먹은 적 있다? 어떻게 먹었……?”
이우주와 솔레이크 역시도 지친 기색이었다.
이우주가 재료 아이템을 구하고 싶다고 해서 온 이 고난이도의 오픈필드에서는 다들 한 번씩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고기를 못 먹어서 그런가 힘이 안 났어. 흑흑흑-”
“아빠는 예전에 이런 괴물들을 몰이사냥했단 말이지. 흠, 나는 한 마리도 버거웠는데 말이야.”
“맞다. 그 당시에 잡몹들 상태창 가지고 분량만 잡아먹는다고 민심 떡락. 시청자들한테 욕 엄청 먹었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 위험하다.”
……옛날 일은 빨리빨리 잊는 게 좋다.
뭐 아무튼.
이우주는 새로 얻은 재료 아이템에 예전에 얻은 재료 아이템을 나란히 놓았다.
-<식육부름 섬유(纖維)> / 재료 / A+
넝쿨 미치광이류의 줄기를 잘라 만든 섬유질.
-<망자부름 골분(骨粉)> / 재료 / A+
해골왕의 넓적다리 뼈를 빻아 낸 뼛가루.
“좋아, 이제 필요한 재료는 하나뿐이네.”
손을 털며 말하는 이우주.
그러자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물었다.
“근데 너 뭐 만드려고 이런 걸 모으냐?”
“산하. 참 빨리도 묻는다.”
이우주는 흔쾌히 대답했다.
“책.”
“책?”
“응. 섬유질로는 페이지를 만들고 뼛가루로는 반죽 및 경화작업을 할 거야.”
“원래 종이 만드는 데 뼛가루가 들어가?”
“뼛가루는 모르겠고 돌가루는 들어가지. 나는 그걸 ‘망자부름 골분’으로 대신하려는 거고.”
이우주가 하려는 것은 명확했다.
스켈레톤 킹을 잡고 얻은 뼛가루와 넝쿨 미치광이를 잡고 얻은 펄프로 책을 만드는 것.
“대체 무슨 책이길래 그래?”
“맞다. 나도 궁금하다.”
그러자 이우주는 이산하와 솔레이크에게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이런 아이템인데.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실치 않아. 나도 딥웹 깊숙한 곳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은 거라서.”
“처음 듣는 아이템이네. 근데 딥웹에는 왜 갔어?”
“비트코인 거래하러.”
“좀 올랐어?”
“……그건 묻지 마.”
이우주는 한숨을 쉬며 재료들을 챙겼다.
이제 마지막 재료 하나가 남았다.
“종이가 될 재료들은 구했으니, 이제 책 내용을 기록할 잉크가 필요하지.”
3개의 재료 중 마지막은 바로 먹물이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힘차게 소리쳤다.
“좋았쓰! 이제 막바지다! 먹물을 구해야 한다고? 뭐 오징어나 문어 때려잡고 뽑아내면 되냐!?”
“바다로! 바다 보러 간다!”
하지만 이우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장에서 살 건데?”
살 수 있는 것은 사는 게 좋다.
역시 공산품이 최고인 법이다.
* *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파티는 중앙대륙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천공섬 붕괴 당시 탈출한 천사들이 만든 마을이다.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문화였던 귀시(鬼市), 도깨비 시장이 이 마을의 명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떠들썩한 야시장의 밤길을 걷던 도중 이산하가 이우주에게 물었다.
“동생아, 그거 아냐?”
“알아.”
“이 쉑, 누나가 뭐 물어볼라고 한 건지도 모르면서!”
“이 야시장이 원래 천공섬의 문화고 그 천공섬을 떨어트린 게 아빠라는 거, 알고 있냐는 거지?”
“……어우, 야. 소름끼친다.”
이산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였지. 그때는 천인공노할 트롤링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대격변의 한 축을 연 위대한 첫걸음으로 재평가받고 있고.”
물론 그 대격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던 드레이크 역시도 솔레이크의 자랑이었다.
한편, 야시장의 규모는 꽤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열리는 주기가 불규칙한 시장이었지만 요즘은 삼 일이나 오 일을 텀으로 해서 규칙적으로 개장한다.
하지만 유통되는 아이템들은 여전히 장물, 짝퉁, 미감정 상태인 골동품들이 대다수였다.
이우주는 좌판 위에 늘어놓인 아이템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아이템들의 등급이 다 숨겨져 있군.”
온갖 종류의 잡상인들이 정품이네 상등품이네 뭐네 호객을 하고 있지만 막상 가 보면 아이템의 등급은 ‘?’ 표시로 가려져 있다.
자신의 안목을 믿는다면 단돈 십만 골드에 저것들을 살 수 있다.
물론 절대다수는 몇백 골드도 하지 않는 쓰레기지만 간혹 그것들 중에 수백, 수천, 수만 배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 끼어 있곤 하니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에게는 끊을 수 없는 도박이리라.
[Take a look.]
검은 고양이 모양의 탈을 쓴 천사가 낄낄 웃으며 몸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구경하며 점점 더 시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천사들 외에 다른 이방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 역시도 좌판을 깐 채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판매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칼, 저절로 움직이는 갑옷, 말하는 방패, 요사스러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항아리, 피 묻은 신발 등등…….
상당히 희귀해 보이는 것들이 널렸다.
하지만 이우주는 이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지나쳤다.
“희귀한 물건들이지만 희소하지는 않네. 그 둘의 차이점을 잘 구별해야지.”
“아니, 근데 네가 찾는 잉크가 여기에 있어? 오징어나 문어의 먹물이라면 몇 번 본 것 같은데?”
이산하가 좌판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악마손 오징어> -등급: B / 특성: 물, 심해, 무한성장, 고생물
-서식지: 바다 전역
-크기: 18~?m
-‘가혹한 바다’에 온 당신은 바다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해라.
그 잔잔한 수면 바로 아래에는 당신을 깊은 심해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이 악마손 오징어가 바로 그렇다.
<무투광 오징어> -등급: B+ / 특성: 물, 싸움광, 고속주먹, 1:1
-서식지: 전 바다
-크기: 14m
-열 개나 되는 다리에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니는 바다 속 승부사.
1초에 백 번 이상의 주먹을 날릴 수 있다고 한다.
권투 글러브는 메이커 제품만 고집하는 편이다.
북방에 서식하는 각종 오징어류 몬스터에게서 뽑아낸 먹물들이 좌판 위에 가득하다.
그러나 이우주는 그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전혀 다른 먹물이야. ‘하해(下海)’라는 오픈필드형 던전 알아?”
“아니 몰라. 그런 곳이 있어?”
“진입 레벨이 너무 높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지금까지도 초고수들 몇몇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하니까.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거기서 나온 아이템이야.”
현재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의 실력으로는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니 야시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레벨로는 직접 들어가기 힘든 곳이니 다른 사람이 파는 물건을 사려고 했는데…… 역시나 매물이 없네. 여기는 없는 게 없는 시장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어느덧 야시장의 끝에 도착한 이우주는 시무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제일 끝자락에 있는 낡은 좌판이다.
올라와 있는 매물도 별로 없고 또 너무 외진 곳에 있는데다가 좌판 주인의 호객도 딱히 없었기에 아무도 그곳까지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있었다.
이우주는 이왕 온 김에 마지막 좌판까지만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찾던 물건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니 말이다.
바로 그때.
이우주는 맨 끝의 좌판 앞에 선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좌판의 주인으로 보이는 그는 한동안 이우주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텅 빈 듯 공허한 눈초리.
이윽고,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우주복 헬멧을 벗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Call me Ishmael).]
낙타의 얼굴을 한 NPC가 그곳에 있었다.
NPC
‘시추꾼 이스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