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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907화 (907/1,000)
  • 외전 33화 봉몽(逢蒙) (4)

    이우주의 손을 잡은 죠르디는 순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다.

    지금껏 이런 적이 있었던가? 누구에게 구해진 적이.

    늘 치열하게 살며,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밀어내고, 또 여차하면 물어뜯거나 물어뜯길 각오로 살아온 인생.

    하지만 지금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는 이 온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던 것이었다.

    “…….”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죠르디에게 이우주가 한마디를 더 했다.

    “피차 아빠를 뛰어넘고 싶다는 건 똑같잖아. 비록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지금은 같이 힘내 보자고.”

    그 말에 죠르디 역시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멜로 찍지 말고 빨리 올라오기나 해 이것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 힘을 다한 괴성이 들려온다.

    죠르디가 고개를 들자 이우주의 너머로 꽥꽥 소리 지르고 있는 이산하의 얼굴이 보였다.

    궁수 특유의 팔힘으로 이우주의 다리를 잡고 버티는 그녀의 뒤로 솔레이크까지 달라붙었다.

    “으아아악! 나 말고 얘를 잡아당겨야지 이 뇌순녀야!”

    “Oh my misteak, Hcurry up!”

    “배고프냐!? 스펠링 다 틀렸으니까 영어 쓰지 말고 잡아당기기나 해!”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온 힘을 다해 이우주의 양발을 잡아당긴다.

    이우주에게 거의 끌어안기다시피 한 죠르디 역시도 화염폭풍에 끌려들어 가는 것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골렘의 잔해 뒤로 숨어 다시금 숨을 돌렸다.

    그때.

    “……고, 고맙다.”

    죠르디의 입이 열렸다.

    이우주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검은 머리카락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그녀의 하얀 두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이산하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이것들이 뭐 하자는 쇼야, 힘은 내가 다 썼구만. 고맙긴 개뿔, 같잖은 로맨스 타령하지 말고 게임이나 해라?”

    “로, 로맨스!? 무슨 헛소리냐! 내 인생에는 그런 것 없다!”

    “니 귀 색깔이나 좀 보고 얘기하세요. 뭔 하얀 게 에이포용지 같아서 좀만 빨개져도 바로 티 나는구만.”

    “이, 이건 그냥 화광에 물들어서 그런 거야!”

    죠르디는 두 손으로 귀를 가린 채 빽 소리 질렀다.

    그때. 이우주가 이산하와 죠르디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쉿. 데스나이트가 아직 살아 있어.”

    “……!?”

    모든 이들이 시선이 보스룸 구석을 향한다.

    쿠르르르륵!

    엄청난 기세로 작렬하던 불기둥 역시 점차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 형상.

    그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와, 불타는 걸레짝이네?”

    이산하의 말에 이우주, 솔레이크, 죠르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오-오오오오오!]

    데스나이트가 너덜거리는 하악을 비틀며 귀기어린 괴성을 토해 냈다.

    …뚝!

    불타다 만 뼈다귀 활이 두 조각으로 꺾였다.

    데스나이트는 스스로 활을 꺾어 부러트리고는 뭉툭하게 변해 버린 활대를 몽둥이처럼 쥐었다.

    콰콰콰콰쾅!

    이윽고, 거세게 휘둘러진 몽둥이가 꺼져 가는 불길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이우주가 이를 악물었다.

    “데스나이트가 메타를 바꿨다! 활을 버리고 몽둥이를 잡았어! 이제부터는 근접전이야!”

    역시나 죠르디를 살려 둔 것이 정답이었다.

    한편, 이산하는 활을 버리고 몽둥이를 잡은 데스나이트를 향해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 자식! 궁수가 활을 버려!? 자존심도 없이 메타를 바꾸냐! 장인은 한번 간 길을 돌아가지 않아!”

    “산하! 드물게 옳은 소리! 애착 아이템은 끝까지 믿어 줘야 한다! 한번 믿음을 주면 반드시 앙갚음한다!”

    “……은혜갚음이겠지.”

    솔레이크와 죠르디 역시도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몽둥이를 든 채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데스나이트의 몽둥이를 막아서는 것이 있었다.

    …쾅!

    이우주의 손에 들린 태양살의 몽둥이.

    그것이 데스나이트 봉몽의 몽둥이를 막아낸다.

    “우와, 이거 한 합도 못 받겠는데?”

    이우주는 바로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산하와 솔레이크, 죠르디가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생! 이제 어떡하지? 활 메타가 몽둥이 메타로 바뀌었으니 겨우 찾아낸 공격 패턴도 사라져 버렸다구!”

    “레이드 실패의 예감. Strong하게 든다.”

    “나도 더는 방법이 안 보이는군. 체력도 마력도 모두 바닥이니…….”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우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 한 발 남았다.”

    아끼고 아껴뒀던 패들이 다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도박수뿐.

    …팟!

    이우주는 뒤로 냅다 뛰었다.

    그것은 웅크린 채 기동 중지를 맞이한 솔레이크의 골렘이 있는 곳이었다.

    푸시시시식-

    뜨거운 화산탄 덩어리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 / 골렘 / A

    용암굴 속의 뜨거운 화산탄으로 제작된 골렘.

    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우주는 태양살의 몽둥이를 들어 그런 골렘의 잔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솔레이크가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

    “아앗! 내 골렘! 무슨 짓인가 우주! 가엾은 아이! 때리지 마!”

    “야, 그건 좀 너무했다. 아무리 망가진 골렘이라고 해도.”

    이산하마저 이우주를 만류했다.

    하지만 이우주는 계속해서 골렘을 두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아아아아아악!]

    데스나이트가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불이 붙어서 이글거리고 있는 몽둥이를 들었고 이우주를 향해 전력으로 내리찍었다.

    “위험해!”

    죠르디가 이우주를 확 끌어안고 뒤로 빠진다.

    그러자 목표물을 잃은 데스나이트의 몽둥이는 그대로 골렘의 몸체를 내리찍었다.

    콰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화산탄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바로 그 순간.

    -띠링!

    모두의 귓가에 알림음이 떠올랐다.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의 몸속 내부에서 무언가가 약동합니다>

    <강력한 충격이 화산탄 속의 코어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충전률 3%……>

    이윽고, 이우주가 외쳤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말을 마친 이우주 역시도 골렘의 몸체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디버프에 의해 약해진데다가 지금껏 데스나이트의 저격을 온몸으로 받아내 왔던 골렘은 천천히 바스라져 내린다.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의 몸속 내부에서 무언가가 약동합니다>

    <강력한 충격이 화산탄 속의 코어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충전률 8%……>

    더군다나 이성을 잃어버린 데스나이트 역시도 계속해서 골렘의 잔해를 향해 딜을 넣는다.

    <충전률 18%……>

    <충전률 26%……>

    <충전률 42%……>

    <충전률 78%……>

    <충전률 91%……>

    .

    .

    빠지직! 빠지지직!

    이윽고. 골렘의 몸체에 균열이 가더니 그 속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잉!?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의 상태가……?

    익숙한 알림음이 모두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이내, 작렬하는 불꽃과 빛무리를 헤치며 그 안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는(은) ‘신생 용자왕 그랜드 메카닉 골렘’(으)로 진화했다!

    전신이 알 수 없는 재질의 외계합금으로 만들어진 골렘.

    멋진 바디에 강력한 팔다리가 부착되어 있으며 소환 시 뭇 사나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정열적인 BGM을 뿜어내는 녀석이 모두의 눈앞에 그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낸다.

    -<신생 용자왕 그랜드 메카닉 골렘> / 골렘 / A+

    주인의 믿음과 사랑에 응답하여 모습을 드러낸 화산탄 속의 용자.

    뜨거운 열정과 찬란한 로망을 손안에 쥐고 있는 천원(天苑)의 수호자이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메카 골렘을 본 솔레이크의 두 눈은 더할 나위 없는 초롱초롱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 나의 애착 골렘. 응답해 주었다. 나의 사랑, 나의 소망, 나의 믿음. 민트초코의 추억…….”

    “오, 그러게. 그러니까 내가 계속 쓰라고 했잖아. 그 골렘.”

    “거짓말이다! 산하! 내 골렘 자꾸 버리라고 했다! 구리다고도 했다! 우드골렘으로 바꾸라고 했다!”

    “내, 내가 언제!”

    “산하 멍청이!”

    티격태격 싸우는 솔레이크와 이산하.

    한편 이우주는 눈앞에 우뚝 선 메카 골렘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역시 화산탄 속에 뭔가 히든 피스 같은 게 숨겨져 있을 것 같았어! 내구도가 0이 되었을 때부터 봉인 해제가 시작되는 거였구나! 외계 물질로 된 합금 메카 용자왕이라니. 이건 분명 저번에 업데이트 된 신종 골렘일 거야. 이렇게 얻는 거였나, 정말 대단해! 베이퍼 락 현상이 없게끔 기존의 카뷰레터 방식에서 개량된 모델인가? 그렇군, 연료를 기화시키지 않고 강제로 무화시켜 혼합기를 조성하려는 거야. 골렘의 비휘발성 연료가 제대로 기화하지 않아서 혼합기를 조성하는 것이 힘들던 현상이 대폭 개선되었군. 노즐을 사용한 분사 방식은 확실히 효율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인젝터 방식으로 변경해서 골렘의 코어로 흡입된 공기량에 알맞게 연료량을 계산해 스프레이처럼 분사되게끔 공급 방식을 변경한다면 확실히 골렘의 기동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어쩌면 복수의 골렘을 운용하는 상황 속에서 기통별 순차분사방식도 가능할 수도…… 메인 코어와 서브 코어를 나누어 메인 코어를 통해 공급된 연료가 각 실린더마다 존재하는 고압 압축용 서브 코어들을 통해 연료들을 미립자 형식으로…… 그렇다면 배기구를 통해 낭비되는 배기 마나의 저감도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절약된 마나를 다시 소환사에게 돌려주는 구조…… 이건 골렘의 혁명이야!”

    아무튼, 이제 다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HP가 얼마 남지 않은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말이다.

    메카 용자왕 골렘의 등장에 환호하는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그리고 아직 이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한 죠르디만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할 뿐이다.

    “……저기. 뭔가 장르가 좀 다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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