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롤모델 (9)
“접속.”
[음성 인식으로 보안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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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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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화 완료!]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우주는 게임에 접속했다.
오늘따라 우측 상단에 뜨는 뎀2의 세계관 스크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라면 스킵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한번쯤 쭉 읽고 싶었다.
‘어차피 누나들 접속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이우주는 로딩창에 뜨는 문구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마차의 수레바퀴를 수리하는 중……>
<……칼날에 슨 녹을 제거하는 중……>
<……방패와 갑옷을 점검하는 중……>
<……말에게 건초를 먹이는 중……>
<……여행 준비 완료!……>
칼림바와 오카리나가 어우러진 멜로디.
♩♪♬……
어느 판타지 세상, 오래된 골동품 상점 골목의 먼지 쌓인 오르골에서 들려올 법한 BGM이 흘러나왔다.
-멸망의 어머니 오무아무아가 끝없는 항해를 떠난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격변의 흐름 속에 많은 것들이 사라졌고 또 많은 것들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끔찍한 재앙이 할퀴고 간 흉터에는 들꽃이 피어났습니다.
-청량한 빗물과 맑은 이슬이 모여 푸른 바다가 생겨났습니다.
-지평선은 숨이 차도록 달릴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오늘도 멀찍이 달려 나갑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을 기리는 등불들이 하나하나 모여 은하수를 이루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분명 당신을 기다리는 불빛이겠지요.
-이제 세상은 다시 아름다워질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왕이면 더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세요.
-그리고 마주 앉아 주세요.
-멋진 목소리로 기원해 주세요.
-더욱 멋진 웃음도 함께요.
-로프와 낙타, 한 다스의 연필과 노트 한 권, 한 조각의 빵과 나이프, 그리고 램프를 들고서.
-오늘도 새로운 모험가가 이 세계에 첫 발자국을 내딛습니다.
-바로 당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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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스러운 알림음들이 옆으로 밀리며 뎀2의 세계관이 엔딩 크레딧처럼 천천히 떠오른다.
이우주는 설정의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흐음. 뎀1부터 플레이했던 선발주자들은 이 문구를 보고 울기도 한다는데…… 나는 뎀1에서의 추억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딱히 와닿지는 않네.”
오래된 게임의 올드비들은 어떤 경험과 추억이 있기에 저런 텍스트들을 보고 상념에 빠지는 걸까 늘 궁금했다.
후발주자 뉴비들로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세대 차이였다.
그것은 옆에서 세계관 설정을 확 스킵하고 바로 접속부터 하는 꼬맹이 유저들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오, 왤케 설명이 길어!”
“똥망겜특. 초반에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설정 줄줄 풀어놓음.”
“이거리얼. 제국력 칠백사십육 년, 천족과 마족 등장 쌉가능이잖어~”
“쿠쿠루삥뽕빵! 오늘도 틀딱겜 출석체크 인증완료~ 응 출석보상~”
계정을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지평선 너머로 뛰어간다.
게임도, 인생도 이제 막 시작해 마냥 즐겁기만 한 뉴비들.
‘저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선발주자 취급을 받게 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후발주자들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이우주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게임과 인생은 정말 많이 닮았다.
새로운 게임도 언젠가는 낡고 파릇한 뉴비도 언젠가는 닳고 닳은 올드비가 된다.
올드비는 자신이 겪어 온 세월, 흘러간 추억들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고 뉴비는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냥 새로운 것에 놀라고 즐거워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쩌면 게임과 인생은 닮은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우주는 뉴비와 올드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이 거대한 세상을 지켜 낸 한 영웅의 행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도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게임은 곧 인생.
인생은 곧 게임. 한평생을 미쳐 살았던 콘텐츠라면 그 자체로 청춘, 삶, 자기 자신을 대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빠가 지켜 낸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향유하는 사람들. 아빠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바로 그때.
이우주의 감성과 상념을 박살 내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동생아! 누나 왔다!”
“우주! 힘세고 강한 저녁! 누가 내게 심정을 묻는다면. 안녕 반갑다!”
이산하와 솔레이크.
가만히 있어도 어딘가 시끄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두 명의 누나가 이우주의 목에 팔을 걸고 활짝 웃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니, 나는 제 시간에 접속하려고 했는데! 솔레이크 얘가 또 홍옥의 파사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와야 한다고 늦장을 부려서……!”
“You are a liar! 거짓말이다! 산하가 먼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민트초코의 매력에 흠뻑……!”
이우주는 왜인지 벌써부터 지치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빨리 아이템이나 구하러 가자.”
오늘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 파티가 방문한 곳은 지하도시 데린쿠유!
어비스 터미널에서 북쪽으로 가는 지하통로를 타고 심층부로 내려가면 찾아볼 수 있는, 오늘날에는 대장장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거대한 지하도시였다.
-띠링!
<‘지하도시 데린쿠유’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한때는 아무도 가는 법을 알지 못했던 전설 속의 지하도시.
물론 이곳을 처음으로 발견한 영웅의 정체는 바로 전 세대의 위대한 파이오니아 ‘고인물’이다.
“또 아빠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는군! 뿌듯해! 짜릿해! 늘 새로워!”
이산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눈에는 절대 그 크기를 다 짐작할 수 없는 거대 지하도시 ‘데린쿠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컴컴한 공동 곳곳에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는 버섯들의 군락이 보인다.
그리고 그 빛무리에 비친 좁고 가파른 회랑, 막다른 길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방, 검게 그을린 부엌과 수없이 뚫려 있는 지하통로들.
거대한 공동들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고 중간중간 교각들도 보인다.
마치 흰개미 군락을 보는 듯한 엄청난 크기였다.
광물을 파먹고 사는 드워프족의 식문화가 빚어낸 거대한 지하공동.
그 누가 지하 수만 미터 아래에 이런 거대 도시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한때는 이 도시가 엄청난 역병에 잠식되어 있었대. 돌아다니는 NPC들도 다 좀비 같았고, 그리고 뭐 엄청 징그러운 파리랑 구더기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다나?”
“Oh! 믿기 힘든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지저, 지저, Jesus세계에!”
한때는 이 도시가 격심한 역병에 오염되었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몽환적인 풍경을 보면 아무도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멋진 곳에 왔으면 또 방송을 안 켤 수 없지! 이얍! 카메라 ON!”
“산하. 프로 스트리머. 멋지다. 나도 방송 출현해 보고 싶다. 게스트!”
“오? 새로운 게스트는 언제나 환영이야!”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막 방송을 켜고 있을 때.
“……!”
이우주는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커다란 버섯 집에서 나오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데린쿠유의 촌장 ‘벨럿’>
약 1미터 30센티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여자.
호수와 같이 푸른 눈을 제외한 얼굴의 구성요소들은 하나같이 다 작고 오밀조밀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갈색의 윤기마저 흐른다.
작은 키였지만 환상적인 비율, 볼륨감 있는 몸매를 가진 그녀의 가장 독특한 신체적 특징은 바로 코밑과 턱에 길고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이었다!
[쿨쿨…… 음냐……]
그녀는 자고 있는 듯 코에 콧물 방울이 붙어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몽유병이라는 설정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
하지만 예전과 달리, 벨럿의 뒤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사제. 또 밖으로 나왔구나. 얼른 들어가서 침대에서 자라.]
벨럿과 달리 거구의 덩치를 자랑하는 남자.
그는 벨럿과 같은 잠옷을 입고 있었다.
<데린쿠유의 대장장이 ‘마몬’>
그의 얼굴을 본 이우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은 저 NPC에게 볼 일이 있어. 가자.”
이우주는 두 명의 누나를 데리고 마몬에게 다가갔다.
잠이 든 벨럿을 안아 든 마몬은 집안으로 들어가던 도중 이우주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음? 너는 분명 고인물의……]
“레이드 전에 장비를 맞추러 왔어요.”
마몬은 질 좋은 장비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유명한 대장장이 NPC이니만큼 레이드를 뛰기 전에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우주 역시도 노리고 있는 던전이 있는 만큼 그 전에 마몬에게서 장비를 얻고자 하고 있었다.
한편, 이우주를 보는 마몬의 시선은 어딘가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가. 그 역시도 강의 뒷 물결에 밀려 흘러가는군. 그것이 세월이고 그것이 인생이겠지.]
마몬은 고개를 들며 눈시울을 붉혔다.
[늘 가슴에 대못만 박았던 스승님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고인물, 그 덕분에 나는 스승님에게 용서를 빌 수 있었어. 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 무저갱 속의 만마전에 홀로 갇혀 있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고인물, 그의 얼굴이 보고 싶군. 그리고 스승님의 얼굴도……]
하지만 마몬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나 아직 안 죽었다 이놈아!]
<데린쿠유의 대장장이 ‘아르파공’>
버섯 집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온 아르파공이 마몬의 머리를 긴 망치로 딱- 때린 탓이다.
[이 녀석들이 야밤에 잠도 안 자고 밖에서 뭣들 하는 게야! 내일 새벽에는 쇳물을 주물러야 하니 일찍들 자라고 했잖아!]
[스승님. 안 그래도 이제 들어가 자려고…… 한데 저 아이를 좀 보십시오.]
[음? 누구인데 그러느냐? 아니! 이게 누구야!?]
아르파공은 이우주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란다.
이우주는 그런 아르파공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궜다.
‘……또 시작인가.’
이렇게 또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기는 싫다.
영웅의 아들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거저 주어지는 호의도, 그리고 늘 가슴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부담감도 모두 떨쳐 버리고 싶었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인정받아 세상 앞에 우뚝 서기 위해서, 이우주는 분연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냥 저일 뿐이에요. 저에게서 아버지를 찾지 말아 주세요. 특별 대우 따위는 필요 없…….
[아니. 너 누구냐고.]
아무래도 살짝 오해를 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