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롤모델 (8)
이산하는 앞쪽에 있는 탱커에게 말했다.
“저기요 탱커 님. 지금부터는 트롤링을 그만두셔야 합니다.”
[이럴 수가! 왜죠?]
“나랑 같은 팀이니까요 이 새X끼야.”
이산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청자들과 함께 레이드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쿵!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 지네 ‘오오무카데’의 용틀임.
무려 A+급 몬스터의 광역기이니만큼 잘 피해야 한다.
이산하는 바로 채팅창에 대사를 음성 입력으로 타이핑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넓게 퍼지세요!!! 보스가 한 명 정해 놓고 거따가 범위기 쓰니까 한 명만 멀리 떨어져서 맞는 게 낫습니다!!! 운 나쁜 한 명에게 유도시켜서 희생시키고 그 시간에 잡는 게 빠르겠어요!!!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첫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두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세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네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다섯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아 왜 나만 쏴!!!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양심도 없냐 진짜!!!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여섯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진!!!!!!!짜!!!!!!! 나 완전 열 받았어!!!!!!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힐러님!!!!!! 저 힐 필요 없어요!!!!!!! 저놈이랑 다이다이 뜹니다!!!!! 지네쉑 넌 오늘 디졌다 진짜!!!!!!!!!!!!!! 아무도 도와주지 마!!!!!!이건 싸나이들끼리의 일대일 진검승부다!!!!!!!!!!!!!!!님들아!!!!!! 제가 지면 걍 파티에서 추방해 주세요!!!!!!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원 요청을 보냄>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원 요청을 보냄>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원 요청을 보냄>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지네 독에 일곱 번째로 피격당했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사망하셨습니다>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님이 파티에서 추방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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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의 반응 역시도 평소와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루삥뽕~
-역시 산하눈나. 건강보다는 방송이지. 혈압 빠짝 올려서 텐션업하자~
-매판 새롭게 죽네 ㅋㅋㅋ
-동방제과+따따문ㄷㄷㄷㄷㄷㄷㄷ
-나는 싸나에~ 지네독식기도전에 원샷때리는 싸나에~
-근데 얘는 왜 맨날 자기보고 싸나이라함??
-싸나이가 뭔지 모르는거 아님?ㅋㅋㅋㅋㅋ
-여자도 기본적으로는 한 사람의 싸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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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송을 종료한 이산하의 눈빛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역시. 인정하기는 싫지만 동생 녀석이랑 손발이 제일 잘 맞긴 해. 그리고 솔레이크랑.”
이산하는 캡슐 밖으로 나와 옷을 입고는 거실로 나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동생 이우주의 짜증스럽다는 어조가 들려왔다.
“아 옷 좀 입…….
“입었어 이 자식아.”
이산하는 이우주의 옆쪽 소파에 앉았다.
“뭐 하냐?”
“자료 조사.”
“그걸 왜 거실에서 해?”
“누나 나왔으니까 이제 방에 들어가서 할 거야.”
“이 자식이 진짜! 옛날엔 귀여웠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으아악! 맨날 이렇게 힘으로 괴롭히니깐 그렇지!”
“야, 자료 조사할 때 뭐 내가 도울 건 없냐? 이제 파티인데. 솔레이크한테도 뭐 시킬 거 있으면 시켜. 걔 0개 국어 그거 다 컨셉 같더라.”
이제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한배를 탔다.
도그숲의 도플갱어전을 거치며 나름 끈끈해진 그들은 앞으로의 레이드 여정 역시도 함께 뛰기로 한 바 있었으니까.
이우주 역시도 이산하의 화살과 솔레이크의 골렘을 꽤나 든든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더만 제대로 내려진다면 한 사람 몫 이상을 너끈히 해내는 누나들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속마음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늘 다를 수밖에 없다.
친남매 간에는 더더욱 그렇다.
“딱히 시킬 일은 없어. 어차피 누나들은 이해도 못 할 거고.”
“뭐? 얌마, 내가 너보다 렙도 높고 경력도…….
“누나는 어차피 행운 셔틀이니까 보상 챙길 때만 와. 힘든 건 내가 다 해 놓을게.”
“흠. 뭔가 든든하면서도 열 받네. 너 잠깐 일루 와 봐.”
이산하가 팔을 걷어붙이자 이우주는 혀를 내밀고는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호다닥 달아났다.
“오, 오랜만에 술래잡기인가? 좋았어. 그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머리 터지고 이빨 깨지고 팔에 금가고 다리 부러졌던 것 이후로 처음이네. 간다! 메롱하다가 혀 안 잘리게 조심해라!”
이산하가 막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는 그때.
삐빅-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어? 이 시간에 뭐지? 솔레이크인가?”
이산하는 이중문 너머로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그곳에는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딸- 엄마 왔다~”
이산하는 쪼르르 달려가 엄마에게 안긴다.
이럴 때 보면 몸만 컸지 영락없는 애였다.
“엄마, 왜 벌써 왔어? 오늘 어디 간다고 안 했던가?”
“병원 갔다 왔지. 검사 결과 들으러 갔던 거라 빨리 끝났어.”
“뭐? 병원? 무슨 병원? 어디 아파?”
이산하의 물음에 엄마는 피식 웃었다.
“아니. 산부인과. 셋째 생긴 줄 알고 가봤는데 아니더라. 너네 아빠한테 늦둥이 보고 싶으면 앞으로 더 분발하라고 말 좀 전해 주렴.”
“아…… TMI 진짜…….
“빨리 가서 전하라고.”
“지, 진짜 전해야 하는 거야? 알겠어…….
호호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뒤로한 이산하는 슬쩍 밖으로 나가 보았다.
차고에 주차된 차 문이 열리고 시장바구니를 든 아빠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
이산하가 냅다 뛰어가 안기자 아빠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어이쿠 딸램. 웬일로 마중을 다 나오고? 용돈 떨어졌어?”
“다 떨어지긴 했지! 좀 더 후하게 쓰세요!”
“엄마한테 달라고 그래. 아빠 이제 진짜 돈 없어. 애초에 아빠도 엄마한테 용돈 받잖아.”
“뭐야,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그리고 아빠는 왜 돈 관리 아빠가 안 해?”
“니 엄마가 재테크를 훨씬 잘 하니까.”
이산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전에 엄마가 전하라고 했던 말을 전했다.
“참, 아빠. 엄마가 셋째 만들어야 하니까 분발 좀 하시라던데?”
“…….”
“아빠?”
“응? 아, 아니야. 아빠 딴 생각 안 했어. 진짜야.”
“아무튼 분발하래 엄마가.”
“그, 그래. 근데 종의 한계라는 것도 있는데…… 생물학적으로 무리일 수도 있다고 좀 전해 줘.”
“아…… TMI 진짜…….
아빠와 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현관문 앞으로 걸어간다.
문득, 아빠가 물었다.
“참, 딸램. 이번에 뎀2에 업데이트 추가됐다며? 거의 확장팩 급으로.”
“응! 태양룡 바이어스랑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가 리셋됐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된다던데?”
“허허- 그거 예전에 아빠가 잡았던 건데. 하긴, 그때 좀 싱겁긴 했지. 좀 급전개 느낌이 짙었어. 그 당시 개발사 총수의 부정한 개입 때문에 본래의 설정이나 세계관들이 대폭 축소되었으니까. 공략 난이도도 확 떨어졌고.”
“그래서 지금 우주가 그것들 한번 제대로 잡아 보겠다고 머리 굴리는 중이야.”
순간, 이산하의 말을 들은 아빠의 발걸음이 잠시 멎었다.
“그렇구나. 우주가 드디어 게임을 시작할 마음이 들었구나. 이번 업데이트 때문이겠지. 그래.”
아빠는 계단에 선 채 약간을 고민했다.
아무래도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이윽고, 아빠는 이산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딸. 아빠한테 신문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니?”
“자, 여기 내 아이패드!”
“신문은 없고?”
“어휴! 아빠는 정말 구식이야! 요즘 누가 신문 봐! 검색하기 기능도 없고 모아보기 기능도 없는데!”
이산하는 아이패드를 켜 태양룡와 오만의 성좌에 대한 신규 뉴스를 찾아 주었다.
<모든 하이랭커들의 로망!>
<태양룡 바이어스 신규 업데이트!>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 강림!>
<추억의 4차 대격변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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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빠는 아이패드를 받아들더니 현관문에 있는 똥파리를 팍 내리쳤다.
“앗, 벌레 잡는 기능은 없나 보네.”
“으아아아앙! 아빠 뭐 하는 거야! 바보!”
이산하는 아이패드에 묻은 얼룩(?)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황급히 물티슈를 찾으러 집 안으로 뛰어가는 이산하를 보며 아빠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우주 녀석.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뗐구나. 이거 기대되는걸.”
오랫동안 웅크린 채 힘을 기르고 있었던 완벽주의자 아들이 드디어 세상으로 웅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엇차! 그렇다면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후발주자들에게 맥없이 추월당할 수는 없으니.”
사람 좋게 웃는 중년 아저씨.
하지만 그의 눈 속에는 이글거리는 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 세대의 파이오니아(Pioneer).
현역, 젊은 피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열정의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