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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92화 (892/1,000)
  • 외전 18화 롤모델 (6)

    …쿵!

    짭핑크 고인물은 머리통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로 쓰러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마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전장을 지배하던 핑크 악마가 창졸간에 죽어 버린 것이다.

    그 허무한 퇴장에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런 상황 속에서 이우주는 마지막 텔레포트 스크롤 조각을 허공에 던졌다.

    츠츠츠츠……

    제 소임을 다하고 타들어 가는 양피지 조각.

    그것을 본 죠르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이냐?”

    “뭐가?”

    “방금 그거! 텔레포트 스크롤 말이야!”

    보통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으면 즉시 포탈이 생성된다.

    입구의 좌표값과 출구의 좌표값을 입력하면 바로 포탈이 생겨나며 이 포탈은 거리에 따라 5초에서 10초간 유지된다.

    단거리의 경우에는 짧을수록 10초에 가깝게, 장거리의 경우에는 멀수록 5초에 가깝게 유지되는 차원문.

    하지만 방금 이우주가 만들어 냈던 차원문은 어떤가?

    그것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눈 한번 깜짝할 새였다.

    “어, 어떻게 텔레포트 스크롤로 만들어진 포탈이 0.1초 만에 닫혔지?”

    “정확히는 0.000000001초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수준이었으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죠르디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로 질문했다.

    이산하와 솔레이크 역시도 말을 이었다.

    “무슨 시스템 오류인 줄 알았어. 와, 텔레포트 스크롤 진짜 위험하네 이거! 어지간한 칼로 절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잖아!”

    “우주. 닥터 스트레인지야? 무서워.”

    그 말에 이우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혹시나 몰라 시도해 본 거였는데 잘 돼서 다행이네. 위험도가 커서 태양룡이나 오만의 악마성좌에게 시도하기는 무리인지라 여기서 써 본 거였는데.”

    “야, 동생아! 설명 좀 해 봐! 이거 뭐야? 버그야? 오류?”

    “버그는 아니고, 사소한 기술적 오류랄까, 아마도 곧 패치되어 사라질 내용 같더라.”

    아니나 다를까, 이우주가 엄청난 기행(?)을 선보인 이후 모두의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오류 점검을 시작합니다>

    <오류를 파악했습니다>

    <설정값을 수정합니다>

    이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드디어 수정되는군. 예전부터 늘 거슬렸었는데 말이야.”

    “야! 설명을 좀 하라고! 설명을!”

    이산하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이우주는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뎀 세계관에서 텔레포트가 가능한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알아?”

    “모르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이론상 그렇지. 하지만 그 이상의 값을 입력한다면?”

    “이상의 값?”

    “그러니까.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세계보다도 더 먼 시간값과 공간값을 입력한다면 말이야.”

    “그게 뭔 소리야?”

    이산하의 눈에 깃든 의문의 빛은 솔레이크나 죠르디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우주는 설명을 계속했다.

    “쉽게 말해 이거야. 현재 뎀2의 운영체제인 DemOS의 텔레포트 관련 시스템 sendteleport 2는 상당히 성숙하기는 했지만 디버깅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아 부분부분에서는 sendteleport 1과도 호환되지. 뎀의 개발자들은 sendteleport 1에서 쓰던 암호 같은 코드와 설정 파일 대신 sendteleport.cf에 각 설정과 변수를 자동으로 계산하는 sendteleport 2의 설정 파일을 사용…….”

    “?”

    “그래서 서버가 패치될 경우 DemOS의 버전이 업그레이드 되기도 하지만 sendteleport.cf의 다운그레이드도 이루어질 수 있지. 서로 맞지 않은 버전들이 함께 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충돌의 와중에서 몇몇 설정 내역들이 쓸모없는 정보로 처리되어 폐기되는 일이 생기는데 sendteleport 바이너리에는 컴파일에 기본 설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적당한 설정을 sendteleport.cf 파일에 적지 않은 경우는 0으로 설정되고…….”

    “??”

    “그런데 내가 이 코드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까 0으로 설정된 것 중 하나로 원격 D-SMTP 서버에 접속하기 위한 대기시간이 있더라고. 이 아이템 코드에서 일정 사용량이 있는 상황으로 가정하고 몇 가지 시험을 수행해 봤었는데 대기시간이 0으로 설정된 경우에는 8밀리 초가 조금 넘으면 접속에 실패한 것으로 처리되고 있었…….”

    “???”

    “이 세계관의 특이한 기능 중 하나는 100% 스위치라는 것인데 외부로 나가는 패킷이 프로토콜에 닿기 전이나 중간연결장치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 아닌 이상에야 지연이 발생하지 않지. 그래서 네트워크에서 가까운 원격 호스트로의 접속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연결이 가능해. 다만…….”

    이우주는 눈을 빛냈다.

    “거리값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멀게 설정되어 있다면? 빛이 8ms만에 갈 수 없는 거리를 텔레포트 스크롤로 도하하려 시도한다면? 그럼 이렇게 튕겨 버리는 거지.”

    이우주는 말을 마친 뒤 쉘 스크립트에서 계산한 값을 스크린으로 띄웠다.

    $ units

    3021 units, 91 prefixes

    You have: 8 millilightseconds

    You want: yottameter

    * 9999999999999999……

    / 0.0017893979

    “광활한 뎀 세계의 넓이와 길이조차도 한참이나 초월하는 수치를 출구값에 입력해 놨지. 그러면 자동으로 튕겨서 포탈은 캔슬. 그 속도는 자그마치 8밀리 초. 0.008초나 돼.”

    그 말을 들은 이산하, 솔레이크, 그리고 죠르디까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완벽히 이해했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이우주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뭐, 옛날에는 핑이 달라서 한국과 북미 나라들이 완벽히 동일한 게임을 할 수가 없었대. 1~2초의 오류가 생겨 버벅거리곤 했거든.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야. 이쪽 세계 안에서도 이런 구식 오류들이 종종 발견되곤 하니까.”

    “아하,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좀 되네. 그래서 긴급 패치가 된 건가?”

    이산하가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걸 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지?”

    “그 비싼 텔레포트 스크롤로 누가 이런 실험을 하겠어. 쓰기 바쁘지.”

    “아깝다! 차라리 이 버그를 태양룡이랑 오만의 성좌 사냥 때 쓰지!”

    “버그 아니라니까. 허점을 이용한 거지. 그리고 잘 될지 안 될지도 몰랐어. 확실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벤트전에서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금지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니까.”

    바로 그때.

    …땡그랑!

    도플갱어가 쓰러진 곳에서 작은 금속음이 들려왔다.

    아이템이 떨어진 것이다.

    이우주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제발…… 제발 내가 원하는 특성이 붙은 아이템이 떨어지게 해 주세요.”

    도플갱어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특성들 중 하나, 그 중에서 원하는 특성 하나가 떨어질 극도로 희박한 확률.

    그러나.

    이우주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앗싸! 딱 필요한 게 나왔네!”

    누나인 이산하의 미친 행운빨이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것들 중에서 필요한 것 딱 하나를 골라내는 기연을 지금껏 수도 없이 제조해 왔던 럭키 머신.

    그 결과가 이우주의 눈앞에 드러난다.

    -<도플갱어의 링> / 반지 / S

    꼭 닮고 싶은 존재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깃들어있는 반지.

    착용하고 있다 보면 상대방을 점점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방어력 +100

    -특성 ‘롤모델’ 사용 가능 (특수)

    특성: <롤모델>

    ↳상대방의 가장 뛰어난 특성 하나를 접촉할 때마다 0.01%씩 훔쳐옵니다.

    ※100%가 되어야 발동 가능.

    ※상대방이 죽으면 특성은 사라집니다.

    “……!”

    이우주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쾌재를 불렀다.

    이산하는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쓸며 으쓱거렸다.

    “역시 나는 짱이야. 쩔어.”

    “맞다. 부족한 실력. 운으로 메꾼다. 짱짱~”

    “너 그거 내 실력 욕하는 거지? 이 0개 국어녀! 그 컨셉 좀 버려!”

    “잇츠 NO 컨셉. 한쿡말, 어려워.”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티격태격 싸우고 있을 때.

    “쳇. 오늘은 빚졌다.”

    죠르디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다음번에 만나면 적이야. 내 사냥을 방해한 죗값을 치르게 해 주마.”

    그녀는 쿨타임이 돈 유령 군마 한 마리를 소환하고는 밤하늘을 내달려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휴, 쟤 어렸을 때 몇 번 본 적 있는데 성격이 그새 더 이상해졌네.”

    “맞다. 저 녀석. 만났을 때. 항상 마무리가 찜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이우주의 뒤로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수군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바스락- 딱!

    뒤에서 삭정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린다.

    문득, 모두의 머릿속에 하나의 대사가 떠올랐다.

    ‘……뭐지? 내가 만들어 뒀던 수문장들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건가? 어떻게?’

    그것은 처음 만났을 당시 죠르디가 말했던 대사.

    그들은 이제야 왜 죠르디가 ‘수문장’이 아니라 ‘수문장들’이라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글우글우글우글……

    죠르디와 완전히 똑같은 외형을 하고 있는 수많은 도플갱어들이 어느새 이쪽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 역시 죠르디 이냔이랑 얽혀서 끝이 좋았던 적이 없다니까아아!”

    분노에 찬 이산하의 절규만이 도그숲 전역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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