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90화 (890/1,000)

외전 16화 롤모델 (4)

“아빠의 옛날 영상, 그 중에서도 용자의 무덤 동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 봤지. 1층부터 108층까지.”

이우주는 스크린을 열어 그 당시의 화면을 보여 주었다.

고인물이 용자의 무덤 108층을 클리어하던 모든 과정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던 적이 있다.

채널에는 옛날의 시청자들이 남겼던 댓글과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가 남긴 목소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XX 깝치지마 고인물은 무적이고 마동왕은 신이다.

-갓인물과 갓동왕을 동시에 품고 있는 한국...

-한국인들은 좋겠다...당신들이 부러워...

-한국인입니다. 한국 내에서 그들은 신입니다

-아시아인입니다. 아시아 내에서 그들은 신입니다

-지구인입니다. 지구 내에서 그들은 신입니다

-외계인입니다. 빵상께랑까랑

-진짜 용자의 무덤 1층부터 108층까지 눈도 안 깜빡이고 봤습니다...비록 실명하긴 했지만 그 경기를 단 0.1초도 놓치지 않은지라 남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 또있네ㅋㅋㅋㅋㅋㅋ

-↳와! 저두 실명! 반갑ㅎㅎㅎ

-↳실명팸 만들까요? ㅎㅎㅎ

-↳고인물 플레이 안본 눈 삽니다~

-↳인터넷 실명제의 폐해ㄷㄷㄷㄷㄷ

-‘그 고인물’을 몰아붙인 슬라임 퀸 좌...그녀는 대체...

-저도 용자의 무덤 도전해봅니다!!!

-아마추어들에게 용기를 준 고인물 님....

-당신은 아마리그의 빛과 소금 그 자체ㅠㅠㅠㅠ

-인간으로 남아주세요 제발!

-근데 그와중에 1층 슬라임 퀸한테 쓴게 3시간임 씨Xㅋㅋㅋㅋ

-탈의. 탈인간. 그저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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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주는 아빠의 메타를 연구하기 위해 이 모든 영상들을 돌려 보고 또 돌려 보았다.

화면에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 댓글들까지 하나하나 모두 읽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한 댓글에 주목한 이우주는 결국 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근데 그와중에 1층 슬라임 퀸한테 쓴게 3시간임 씨Xㅋㅋㅋㅋ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도 영상의 극초반부, 탑의 1층에.

“용자의 무덤에서 고정 S+급 몬스터를 제외하면 아빠를 가장 애먹게 만들었던 전투. 그것은 바로 1층의 슬라임 퀸이었어!”

아우주는 그 당시의 영상을 재생했다.

거의 3시간에 해당 될 정도의 피튀기는 장투.

[데프프픗!]

자신의 필살기인 ‘푸딩 범벅’을 시전하는 슬라임 퀸의 맹렬한 공세에 천하의 고인물조차도 식은땀을 흘린다.

퐁퐁퐁퐁……

사방팔방으로 날아와 떨어지는 분홍색 푸딩.

별 시덥잖은 데미지의 공격이기는 하지만……

[으아아아아! 카메라 꺼! 이 자식, 승부를 내자!]

화면 속의 고인물은 마지 S+급 몬스터인 불사조의 필살기 ‘멸망주의보’만큼이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산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그냥 아빠가 개그하려고 연출한 장면 아니었어?”

“그럴 리가. 아빠는 다 계획이 있는 사람이야.”

이우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 속의 고인물 역시도 심각한 표정으로 슬라임 퀸에게 맞선다.

퐁퐁퐁퐁퐁……

깎단과 끈적한 핑크 점액과의 생사결.

뼈와 살, 점액이 맞부딪치는 치열하고 끈적끈적한 싸움.

서로의 육체를 찢어발기며 힘 대 힘, 생명 대 생명으로 맞부딪치는 마초적인 전투.

퐁퐁퐁퐁……

[아푸! 이렇게 입에 들어가면 지속데미지가!?]

퐁퐁퐁……

[…라고 할 줄 알았냐! 킁! 어때! 독 있는 콧물은 처음일 거다, 이 자식아!]

퐁퐁……

[이 따위 것! 먹어치워 주마! 힘을 내, 폭식 창자!]

퐁……

[거억~]

결국 고인물은 사나운 기세로 슬라임 퀸을 찢어발겼다.

[이겨어억……다! 만세에에궤에엑! 나의 승리다…그윽! 소리 질러어거어억어어!]

이우주는 이 시점에서 영상을 종료했다.

“108층을 제외하면 아빠는 슬라임 퀸을 상대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했지. 거의 3시간여를 말이야. 아스모데스전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슬라임 퀸이 잡아먹은 거야.”

“……그러니까. 그건 그냥 개그 욕심인 거잖아?”

“아니. 그런 사람이 이렇게 찐 리액션을 보이나? 절대 아니야. 그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일 뿐. 사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거지.”

이우주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빠는 그냥 아이템을 다른 메타로 스왑하고 슬라임 퀸을 밟고 갔어도 됐어. 하다못해 낡은 갑옷이나 철검 하나만 들었어도 슬라임 퀸을 제거하기에는 충분했지.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일까?”

“그러니까 개그 욕심…….”

“개그 아니라고. 그건 아빠의 ‘신념’ 때문이야.”

이산하를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 이우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

“아빠는 적은 체력과 높은 민첩성으로 밀고 나가는 메타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 했던 거야. 딸기우유로 만든 푸딩처럼 말캉말캉한 바디, 필드 전역을 뒤덮는 저 소름끼치는 몸에 한번 덮쳐진다면 꼼짝없이 산성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으니까. 사실 슬라임 퀸은 아빠처럼 체력을 극한으로 떨어트리고 회피율을 극한으로 높인 메타의 천적이지.”

“에이, 좀 에바 아냐? 그래봤자 슬라임 퀸인데?”

“그 슬라임 퀸 같은 초광역 기술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뎀에 별로 없어. 다른 하나가 있다면 겨우 불사조 정도랄까? 그 사이의 중간 단계 몬스터들이 없다는 거지.”

“……그, 그렇게 되나?”

“응 그렇게 돼. 즉, 아빠의 천적은 둘뿐이야. 슬라임 퀸과 불사조. 현재 불사조가 없는 마당에는 슬라임 퀸이 유일하지.”

“슬라임 퀸이 그렇게 대단한 몬스터였나…….”

“모든 몬스터는 다 대단한 점이 있어. 아빠가 그랬지. 뎀 안에는 그냥 만들어진 게 없다고, 쓰레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처럼 세상 만물에게는 다 배울 점이 있단 말이지. 그렇기에 나도 ‘롤모델’이라는 특성을 손에 넣으려 하는 거고.”

이우주는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슬라임 퀸은 분명 너무 허약해서 유저들이 잘 잡지도 않는 몬스터이지만 뿜어내는 광역 공격의 범위만큼은 고정 S+급 몬스터인 불사조에 버금갈 정도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천적과도 같은 이 메타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1층에 할애했던 거야. 그리고 실제로 메타의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갔지.”

이윽고, 이우주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나는 그 시절의 아빠조차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그러면서도 나 같은 후발주자가 접근하기 쉬운 이 방법을 우선 사용해 보기로 했다 이 말이야! 아빠의 도플갱어를 상대로!”

동시에 이우주의 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이 있었다.

‘혹시 안주로는 애기가 먹을 젤리 같은 것도 있나요? 사탕이라거나?’

[음? 하하하하- 우유에 이어 젤리라. 뭐 젤리라면 우리 애기 입가심용으로 구비해 놓은 게 있다만…… 왜? 안주로 그걸 주랴?]

‘네. 있다면 좀 부탁드립니다. 단 걸로.’

그것은 일전에 주점에서 받아 왔던 가지각색의 젤리들이었다.

“젤리에 물을 타 슬라임의 공격을 최대한 재현해 보기로 했지! 주점에서 파는 젤리는 뎀 안에서 가장 넓게 멀리 퍼지는 재료 아이템! 슬라임의 설정값 코드와 상당수가 비슷하기에 벌어지는 기믹이다!”

동시에, 이우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젤리들이 물에 녹아 흩뿌려진다.

기묘하게도 젤리들은 허공에 뿌려지는 즉시 그물처럼 쫙 퍼지기 시작했다.

딸기 젤리, 메론 젤리, 바나나 젤리, 포도 젤리, 오렌지 젤리, 장어 젤리, 소 눈알 젤리, 코딱지 젤리 등등의 다양한 맛이 짭핑크 고인물의 핑크색 끈적끈적 번들번들한 몸을 덮친다.

[……!?]

짭핑크 고인물의 두 눈에 일순간 당혹이라는 감정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본체는 극복했지만 짭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슬라임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어 있는 모양.

“아빠는 부던한 노력으로 이 저데미지 초광역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 무작위로 튀는 방울, 아니 도트 단위의 데미지와 피격판정박스까지 모조리 피해 버리는 극한의 회피력으로 말이야. 너는 어떻지?”

이우주는 계속해서 젤리 녹은 물을 뿌리며 짭핑크 고인물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젤리들은 슬라임 퀸의 공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마어마한 범위로 퍼져 나가며 짭핑크 고인물을 후두둑 후두둑 때리고 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

그 뒤를 따라오던 죠르디는 그동안 어렵게 싸웠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의 현타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승기를 잡은 것은 잡은 것이다.

이산하의 화살과 솔레이크의 골렘 역시도 이우주의 양옆을 서포트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아아악!]

짭핑크 고인물은 깎단을 들어 떨어지는 젤리 세례를 가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푸시시시식-

젤리들의 소나기에 몸이 천천히 부식되고 있었지만 아랑곳 않는 기색.

마치 이 자리에서 녹아내려 죽어도 눈앞에 있는 이우주, 이산하, 솔레이크, 죠르디를 데리고 가겠다는 기세 같았다.

문득.

“…….”

이우주는 눈앞으로 덜렁거리는 짭핑크 고인물의 깎단을 바라보았다.

한 번의 접촉에 0.01%의 HP를 깎아내는 메타.

하지만 이우주가 얻으려 하는 것은 한 번의 접촉에 상대방의 기술을 0.01%씩 카피하는 메타이다.

아빠의 기술은 1만 초를 한 대도 맞지 않고 버티는 것.

그러면 성공이다.

하지만 지금 이우주의 기술은 1만 초를 한 대도 맞지 않고 버티는 것.

그 이후에나 비로소 시작점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점에 올라 있는 자와 그것을 닮으려는 자.

‘먼저 시작했던 아빠를 따라잡는 것은 그만큼이나 힘들고 먼 길. 하지만 나는 해내고 말 것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그것이 젊음의 특권 아니겠나!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 볼 가치가 있단다.’

이우주는 아빠가 게임 속 세계를 돌아볼 때마다 늘 하곤 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전자는 잘 모르겠고, 후자에는 공감해요.”

이우주는 젤리를 버리고 맨손으로 짭핑크 고인물의 앞에 섰다.

“기다려! 무모해!”

뒤에 있던 죠르디가 경악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뒤에 있던 이산하가 씩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기다려.”

“뭣? 저러면 개죽음이다! 일손이 하나 부족해지잖아!”

“그럴 일 없으니까 기다리라고.”

“……?”

고개를 갸웃하는 죠르디에게 이산하는 대답했다.

“내 동생은 절대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아.”

“맞다! 우주! 대단해! 분석왕!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옆에 있던 솔레이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죠르디 역시도 흔들리는 동공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라 내 동생! 비장의 무기로 승부를 내는 거야!”

“Oh이Oh이! 뭔지는 모르겠다. But 믿고 있었다구! 비장의 무기! 있는 거지!?”

“……그런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인가!?”

이윽고, 세 여자가 굳게 믿으며 지켜보고 있는 눈앞으로 이우주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앞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 짭핑크 고인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이건 안 되겠는데?”

이윽고, 이우주의 품속에서 아이템 하나가 끄집어져 나왔다.

<텔레포트 스크롤>

도망용 비상탈출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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