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89화 (889/1,000)

외전 15화 롤모델 (3)

“이 스피드에 이 딜이라니. 괴물 같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중얼거리는 여자.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닉네임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머리 위에 공개하고 있었다.

<죠르디 번디베일>

일반적인 색과 다르게 붉게 물들어 있는 그녀의 닉네임.

그리고 이내 그 앞으로 핑크색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덜렁-

고인물.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뎀의 전설로 불리는 위대한 플레이어.

하지만 그 정체는 사실 진퉁이 아닌 짭, 도플갱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레플리카일수록, 그리고 모방하고자 한 오리지날이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비쌀수록 짭의 가격 역시도 만만찮게 상승하는 법.

그 수준은 어지간한 중저가 브랜드의 정품을 가볍게 압살하는 수준이다.

…콰쾅!

도플갱어가 핑크색 전신을 움직이며 달려들었다.

깎단. 깎아내는 단말마.

고인물의 성명절기와도 같은 저 무기에 한번이라도 스치는 순간 재앙은 시작된다.

플레이어의 경우에는 최대 HP나 자연 회복량이 적기 때문에 1만초 안에 어지간하면 끔살되기 때문.

“빌어먹을. 장비도 변변찮은 주제에 너무 빠르잖나.”

죠르디는 재빨리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푸르릉! 쉬익!

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것은 뼈만 남은 말이었다.

흰 뼈로 된 몸뚱이와 검은 불길로 만들어진 갈기.

일반적인 말의 크기보다 두세 배는 더 큰 덩치에 중갑과 칼날 무장까지.

‘유령 군마’라는 이름의 A+등급 펫으로 상당히 구하기 힘든 히든 피스이다.

죠르디는 소환한 유령 군마의 위에 올라탄 채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긴 장검이 시커먼 궤적을 드리며 복잡한 검식을 수놓았다.

“이것도 피해 봐라, 고인물!”

죠르디가 펼치는 검술서는 분명 A+급 이상의 상위 검식을 담고 있는 것.

하지만 짭핑크 고인물은 놀라운 허리놀림과 스탭으로 죠르디의 장검을 모조리 피해 버렸다.

심지어 허공을 내달리는 유령 군마에게 점액 범벅인 발을 걸어 넘어트리기까지!

“이 미친 변태 괴물 놈아!”

죠르디는 검지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아니, 나머지 손가락들도 모조리 깨물어 피를 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푸르르릉!

아홉 구의 유령 군마가 소환되어 짭핑크 고인물을 향해 질주한다.

두두두두두두두-

허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유령 군마들의 질주!

그러나.

파파파파팟!

짭핑크 고인물은 아홉 구의 유령 군마가 질주하며 만들어 내는 복잡한 말발굽의 향연 속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알몸으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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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신기에 가까운, 아니 능욕에 가까운 퍼포먼스!

“느, 능욕 패턴인가! 인성만은 33.33%가 아니라 100%로군…… 이 빌어먹을 변태 괴물.”

죠르디는 유령 군마떼를 제껴 버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짭핑크 고인물을 향해 검은 칼을 빼 들었다.

비장의 수조차 빗나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면돌파뿐.

자신의 피지컬과 관록을 믿는 수밖에는 답이 없었다.

…파캉!

짭핑크 고인물의 깎단과 죠르디의 검은 칼날이 한데 맞부딪쳤다.

공격력은 죠르디가 한 수 높았으나 짭핑크 고인물의 깎단은 파괴불가, 더군다나 짭핑크 고인물의 핑크색 피부에는 매끄러운 윤활액이 번들거리고 있어 반동 데미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따라서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난 것은 이번에도 죠르디 혼자뿐이었다.

“커헉!”

지면에 꽂은 칼에 의지해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틴 죠르디.

그 앞으로 괴기스러운 핑크색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으윽…… 겨, 결국 갚아 줄 수 없는가. 부모님의 한을…… 나는 고작 33.33% 따위에게…….”

죠르디는 반쯤 풀린 눈으로도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바로 그때.

“쳇. HP라도 많이 깎아 놓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전장으로 흘러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죠르디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세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이산하, 이우주, 그리고 솔레이크.

그들을 본 죠르디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뭐지? 내가 만들어 뒀던 수문장들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건가? 어떻게?”

그 수문장이란 전에 상대했던 도플갱어이리라.

죠르디는 잡상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닮은 도플갱어를 만들어 두고 이 협곡에 들어왔던 것이다.

상황을 이해한 이우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몬스터는 내 거야.”

“닥쳐라! 어디서 막타를 주워 먹으려고! 이놈은 내 꺼다!”

“막타라고 하기에는 거의 풀피에 가까운 것 같은데? 게다가 방금 전까지 일방적으로 쳐 발리고 있었고. 그리고 남의 아버지한테 이놈저놈 하지 마라. 패드립으로 신고해 버린…… 아 어차피 카오 유저지 참.”

“……아버지?”

이우주의 말을 들은 죠르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내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군. 얼굴이 똑 닮았어. 네놈들 고인물의 자식들이냐?”

“Oh. 나는 아니다. 내 이름 솔레이크. 어머니 존함은 윤자 솔자. 아버지 존함은 드자 레자 이자 크자 쓰시지.”

“……?”

뭐 아무튼.

이우주는 죠르디에게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 레벨과 장비, 게임 센스를 보니 랭커 같은데. 공식랭킹에서 얼굴을 본 적 없는 걸 보니 암흑랭커인가?”

“푸스스스…… 네깟 놈은 알 것 없다.”

“아니. 웃음소리 들어보니 바로 알겠는데? 조디악 씨 딸이겠네 뭐. 같은 조씨에다가 뒤에 붙은 성도 똑같고. 결국 김정은 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셨던 건가?”

“뭐, 뭣!? 그, 그걸 어떻게?”

“나는 스토리 초반부터 뭔가 사연 있어 보이고 어딘가 미스테리한 캐릭터가 튀어나와서 과거를 밝힐 듯 말 듯 후까시 잡으면서 복선 까는 거 극혐하거든. 답답하잖아. 빨리 캐릭터 설정 다 밝히고 팍팍 스토리 진행하자고.”

이우주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파티 어때?”

“……뭐?”

“어차피 저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것은 피차일반 같은데. 직접 만나 보니까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세 보여서 말이야. 파티 하지 않겠냐고.”

이우주의 제안에 이산하와 솔레이크, 그리고 죠르디마저 깜짝 놀랐다.

“야! 어떻게 조디악의 딸이랑 손을 잡아!”

“맞다! 조디악! Ang신! 한때 위험했던 빌런! 살인자! 혁명가라는 말. 솔직히 안 믿김!”

“……나보고 고인물의 자식들과 손을 잡으라고?”

세 여자 모두가 어이없다는 반응.

하지만 이우주는 태연했다.

“아니면. 저걸 상대할 수 있겠어?”

이우주의 턱짓에 세 여자 모두 고개를 돌린다.

쿠-오오오오오……!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핑크색 기운을 뿜어내는 악마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짭핑크 고인물. 무시무시한 미소를 양 입가에 걸고 있는 필드 최강의 포식자.

그 앞에서는 레벨이 얼마나 높든 장비가 얼마나 대단하든 너도 나도 한 방, 모두 공평하다.

유령 군마의 뼈다귀를 우드득 우드득 깨물어 부숴 먹는 짭핑크 고인물의 그로테스크한 모습 앞에.

“……알겠다.”

“뭐, 저쪽이 그렇게까지 머리 숙여 부탁한다면야.”

“Oh…….”

죠르디는 씹어 내뱉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산하 역시도 짭핑크 고인물이 뿜어내고 있는 압도적인 아우라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파티원: 이우주, 눈누난나내가니누나네, 0개국어능력자, (계정정보없음)>

“어우. 계정 족보도 없는 냔이랑 파티라니. 원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네.”

“닥쳐라. PK당하기 싫으면.”

“어머~ 말뽄새에서부터 머더러 냄새 나는 것 좀 봐~”

이산하와 죠르디는 서로를 날카롭게 쏘아본다.

같은 파티원인지라 칼부림은 못하지만 오고 가는 눈빛만으로는 이미 여러 번 PK가 이루어진 듯했다.

뭐 아무튼.

아직 아무런 메타가 없는 이우주와 궁수인 이산하, 골렘 마법사인 솔레이크, 그리고 기마무사 메타인 죠르디가 손을 잡게 되었다.

“……그래서. 뭐 뾰족한 수라도 있나?”

죠르디는 눈앞에서 유령 군마를 분쇄하고 있는 짭핑크 고인물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우주는 대답했다.

“여기 오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 해 왔을 리가.”

“무슨 준비?”

“과거 아빠를 힘들게 했던 적들의 메타를 준비해 왔지.”

이우주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과거 아빠를 빈사상태까지 몰아넣었던 무시무시한 기술을 말이야.”

그 말에 세 여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아빠를 빈사상태로 몰아넣었을 정도라면 분명 엄청난 기술일 텐데. 역시 오무아무아의 유성 폭풍인가?”

“고정 S+급 몬스터. 가장 센 기술을 보유했던. 오즈, 버뮤다, 카프카타렉트, 브라키오, 모르그마르, 로도피스, 마몬, 사탄, 벨제붑, 아스모데우스, 레비아탄, 벨페골…….”

“……벨페골은 우리 아빠가 잡았거든? 그리고 그것들보다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불사조가 고인물에게는 더 위협적이었겠지.”

멸망의 어머니 오무아무아부터 온갖 고정 S+급 서브스트림들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우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 모두 아니야. 아빠를 정말로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던 몬스터는 따로 있다.”

세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천하의 고인물을 위기에 빠트릴 수 있는 존재가 저 위의 것들 외에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우주는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단언했다.

“그것은 바로…….”

그 대답은 세 여자의 표정을 모두 황당함으로 물들게 할 만한 것이었다.

“슬라임 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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