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88화 (888/1,000)
  • 외전 14화 롤모델 (2)

    [푸스스스스스-]

    장검의 날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일 만큼 어두웠다.

    너무 어두워서 오히려 눈에 잘 보인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만큼.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 그리고 검은자위와 다크서클 때문에 기괴하리만치 크게 보이는 눈이 정면을 향한다.

    “낯이 익기는 한데 얼굴이 바로 생각 안 나네. 누구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왜인지 아는 것처럼 느껴지다. 그 이유 나도 몰라.”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

    …퍼엉!

    시커먼 칼날이 또다시 참격을 흩뿌렸다.

    “헉!?”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른 칼날의 움직임에 이우주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퍼퍼퍼퍼퍼퍼퍽!

    산비탈 아래에 있던 바위들이 참격에 의해 깎여 나가 뾰족하게 변해 버렸다.

    ‘……엄청난 힘과 속도. 이건 위험하다!’

    이우주의 천부적인 게임 센스가 연거푸 비상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센스를 간파했음일까?

    검은 칼날의 여자 플레이어는 곧장 이우주를 향해 접근해 왔다.

    “막아! 내 동생 죽는다!”

    “안 돼! 여기서 죽는다? 그럼 특성 못 얻는다!”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도플갱어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까락-

    화살과 골렘 소환의 마법진이 도플갱어의 등 뒤를 노리고 있었다.

    이우주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며 오더를 내렸다.

    “도플갱어가 분명해! AI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을……!?”

    그러나 이우주의 분석은 빗나갔다.

    펑-

    이산하가 화살을 쏘아 보냈지만 도플갱어는 자리에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화살을 빗겨 냈다.

    …콰삭!

    흘려보낸 화살이 이우주를 공격함과 동시에 빙글 돌아선 검은 칼날이 이번에는 이산하를 향한다.

    신들린 듯한 연계 동작, 마치 프로게이머를 연상케 하는 실력이었다.

    “미친…… 이런 게 가능하다고?”

    “산하! 괜찮나!?”

    이산하는 볼을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피가 뿌려지는 것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나마 솔레이크가 손으로 가슴팍을 밀어 주었기에 이 정도로만 끝난 것이다.

    하마터면 일격에 즉사할 뻔했다.

    화살을 겨우겨우 피해 낸 이우주는 뒤로 몇 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고사목 위로 내려앉았다.

    이산하 역시도 활대를 뻗어 도플갱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보통 유저 같지는 않은데. 프로거나 전문 스트리머가 아니고서야 이런 실력을…….”

    “아니야. 프로나 전문 스트리머라면 내가 모를 리 없어. 난 랭커인 이상 각국의 프로들은 물론이고 아마추어까지도 모두 꿰고 있다고.”

    “그럼 쟤는 뭐야? 일반인이라고?”

    “……일반인이라는 말은 안 했어.”

    동생의 대답에 이산하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이우주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솔레이크 역시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카오 유저!”

    그렇다.

    카오 유저(Chao User)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하나 이상 만족한 플레이어들을 뜻한다.

    1. 첫 로그인 시 필요한 계정 정보가 허위로 등록되어 있는 플레이어.

    2. 비매너 행위로 인한 신고 누적 횟수가 일정 임계치를 넘어선 플레이어.

    3. 합당한 이유 없이 NPC나 다른 플레이어를 살해한 플레이어.

    이들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게임 내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마을의 상점을 이용할 수 없으며 경비병 NPC나 현상금 사냥꾼 NPC들에게 쫓기게 되고 심하면 아예 일반 유저들에게 몬스터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특히나 3번 유형에 해당되는 유저들은 ‘머더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 또한 5개의 단계로 나뉨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달라진다.

    실수나 퀘스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을 해친 유저는 ‘과실치사’ 등급에 해당되며 죗값을 치른다면 원래의 플레이어로 돌아올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점을 그럭저럭 이용할 수 있으며 물건을 살 때는 비싸게, 팔 때는 싸게 넘겨야 하는 패널티가 전부이다.

    도중에 판매거부를 당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하지만 이런 살인 행위가 반복되면 태생 자체가 ‘나쁜 피’인 자로 규정되어 대부분의 상점 거래가 정지된다.

    극소수의 블랙마켓을 제외하고는 돈이나 아이템을 거래할 길이 모두 막혀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악명이 더 높아지면 ‘구제불능’이라는 단계가 된다.

    이때부터는 마을 안에서는 경비병 NPC들이, 마을 밖에서는 현상금 사냥꾼 NPC들이 따라붙어 목숨을 노리게 된다.

    여기서 더더욱 악명이 심해지면 ‘몬스터’ 단계로 격상된다.

    이때부터는 일반 유저들에게도 아예 몬스터로 인식되어 버린다.

    일단 몬스터로 인식된 유저는 죽여도 아무런 패널티가 없고 오히려 쏠쏠한 경험치와 아이템 보상을 주기에 다른 유저들에게는 걸어 다니는 보물상자나 다름없다.

    카오 유저가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등급은 바로 ‘언터쳐블’.

    이 등급에 해당되는 유저는 모든 것이 ‘몬스터’ 단계의 유저와 동일하다.

    유일하게 다른 점 하나는 바로 하나, 사망했을 시 캐릭터가 삭제된다는 것이다.

    “……이 유저는 공식 랭킹에서 본 적이 없어. 하지만 피지컬을 놓고 보면 충분히 월드클래스 급의 상위권 랭커야. 아마도 ‘구제불능’ 단계에 있는 카오 유저같은데.”

    이우주의 말에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구제불능 카오 유저의 도플갱어는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 칼날을 옆으로 비틀었다.

    목표는 가장 약한 이우주임이 분명했다.

    퍼펑-

    보라색 이끼로 뒤덮인 바닥을 박차는 도플갱어.

    그러나.

    …채앵!

    도플갱어의 칼은 이우주의 몸에 닿지 못했다.

    도중에 끼어든 이산하가 활대로 도플갱어의 칼날을 막아선 탓이다.

    “자리요.”

    [……?]

    “니 묫자리요!”

    이산하. 그녀는 힘으로 도플갱어의 칼을 짓눌러 역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뒤에 있던 솔레이크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산하! 궁수! 왜 안 민첩? 왜 강한 힘?”

    “원래 활 쏘려면 팔힘이 많이 필요한 법! 나는 힘 궁수다!”

    이산하는 숫제 활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도플갱어를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이이얍! 아까의 복수를 해주마! 뺨따구 딱 대!”

    [……!]

    도플갱어가 난데없는 활몽둥이 찜질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럼. 나의 차례. 언제부터? 지금부터!”

    솔레이크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도플갱어의 바로 뒤에 거대한 골렘을 소환했다.

    쿠르르륵!

    불타는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화염골렘이 등장했다.

    -<꿈틀거리는 화산탄 골렘> / 골렘 / A

    용암굴 속의 뜨거운 화산탄으로 제작된 골렘.

    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골렘은 등장하자마자 거대한 주먹을 들어 도플갱어의 등팍을 후려갈겼다.

    …콰쾅!

    묵직한 주먹에 뜨거운 불길까지 둘렀다.

    홍옥의 파사 레이드가 끝난 뒤 받은 보상으로 얻은 재료.

    그것으로 제작된 골렘이니 만큼 열기 하나는 확실했다.

    푸쉭- 푸슉!

    유증기와 가스를 뿜어내는 화염 골렘의 등장에 도플갱어는 사납게 발버둥 쳤다.

    그때 이우주가 오더를 내렸다.

    “솔레이크 누나! 골렘을 아예 기울여서 도플갱어를 누르세요!”

    솔레이크는 바로 골렘을 조종했다.

    골렘의 무게가 한쪽으로 확 쏠렸고 도플갱어는 골렘에게 깔리는 모양새로 바닥에 쓰러졌다.

    밑바닥의 지형은 절묘한 구덩이였는지라 도플갱어는 골렘에게 깔려 땅굴 속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좋았어! 솔레이크! 내가 셋을 세면 골렘을 역소환해! 바로 헤드샷을 먹여 줄 테니까!”

    이산하는 골렘에 대고 화살을 겨누었다.

    골렘이 사라지는 즉시 도플갱어의 머리에 저격을 박아 넣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퍼억!

    갑자기 골렘의 어깨를 뚫고 시커먼 칼날이 튀어나온다.

    [그르륵!]

    도플갱어가 골렘의 몸 밑에 깔린 채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쩌억!

    검은 칼날은 미친 듯이 움직이더니 이내 골렘의 팔을 잘라내 버렸다.

    [캬아아악!]

    불타는 몸으로 튀어나온 도플갱어는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여전히 정면에 있는 이우주를 향한 채로!

    “이 끈질긴 자식! 왜 자꾸 내 동생에게 집착해!”

    “우주! Run away!”

    하지만 이우주는 피하지 않았다.

    “도플갱어는 본체의 33.33%의 힘을 발휘하기 마련. 그럼 본체는 이것보다 세 배 이상 빠르고 강력하다는 건가.”

    이윽고, 도플갱어를 바라보는 이우주의 눈이 반짝 빛난다.

    “기대되네.”

    동시에, 도플갱어의 앞으로 마주 뛰어드는 이우주.

    스팟!

    도플갱어는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우주의 무빙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도플갱어가 보여 주었던 환상적인 턴을 이우주가 똑같이 재현해 낸 것이다.

    “피지컬이라면 나도 안 밀리거든.”

    순식간에 도플갱어의 뒤를 잡아 버린 이우주.

    하지만 딜을 넣을 수단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멀찍이 거리를 벌리는 것뿐이다.

    그와 동시에.

    “죽어라! 이 바퀴녀!”

    “Go to hell! 지옥! 가버려!”

    이산하의 화살과 솔레이크의 골렘이 도플갱어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콰콰콰쾅!

    도플갱어는 이산하의 화살과 솔레이크의 골렘을 막아 내면서도 그다지 밀리지 않고 있었다.

    “크윽! 이 자식 뭐 이렇게 세!?”

    “이것이 한낱 도플갱어라는 것. 그 사실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머지 스테미너를 모조리 공격에 쏟아부었다.

    그때.

    “누나들! 공격 각도를 우측 15도로 틀어! 1시 방향으로!”

    이우주의 오더가 내려왔다.

    이산하와 솔레이크는 급박한 와중에도 손을 틀어 공격 궤도를 꺾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르릉!

    전투로 인해 약해진 지면이 무너져 내리며 도플갱어가 구릉 아래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커헉!?]

    비명을 지르던 도플갱어의 입이 무언가에 의해 턱 막혔다.

    그것은 뒤통수를 뚫고 입으로 튀어나온 뾰족 바위였다.

    [커컥! 컥!]

    도플갱어의 HP가 급격하게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비탈길 아래로 떨어져 날카로운 암석 끝에 머리를 부딪쳤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전투 초반에 네가 직접 칼로 깎아 낸 바위지. 자충수에 당한 기분이 어때?”

    이우주는 도플갱어를 향해 물었다.

    도플갱어는 그런 이우주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으나.

    …퍼퍼퍼퍽!

    그 뒤로 이산하의 확인사살이 이어졌기에 반격은 불가능했다.

    이윽고.

    스태미너 게이지가 확 떨어진 것을 확인한 이산하가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무서운 뇬이네. 도플갱어인데도 이 정도라니. 그럼 본체는 대체 얼마나 세다는 거야?”

    “이 정도 수준의 언랭. 흔치 않다. 아마도 암흑 랭커. 도그숲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솔레이크 역시도 바위 끝에 꿰인 채 흔들거리는 도플갱어의 시체를 바라보며 불길함을 느낀 듯싶었다.

    바로 그때.

    …쿵!

    저 멀리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옅게 떨리는 땅, 풀썩이는 곰팡이 포자.

    …쿠웅!

    먼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지진파는 분명 저 능선 너머에서 무언가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오고 있었다.

    “가 보자.”

    이우주는 발밑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오는 쭈뼛한 감각을 느꼈다.

    …쿠우웅!

    발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지진파는 점점 강해진다.

    “야! 같이 가!”

    “우주! 쪼렙! 그러다 죽는다!”

    이산하와 솔레이크 역시도 이우주를 따라 언덕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검은 덤불숲 너머로 협곡의 깊은 골짜기가 드러난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검은 골짜기 안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콰콰콰쾅!

    일방적인 괴롭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압도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저 사람은!?”

    이산하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밀려나고 있는 여자 플레이어의 외모가 눈에 들어온다.

    길게 늘어트린 검은색 포니테일.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서양인과 동양인의 혼혈처럼 생긴 이목구비.

    쳐진 눈과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

    그녀는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도플갱어와 똑 닮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원본이겠지.”

    이우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본. 도플갱어가 아닌 진짜배기.

    33.33%가 아닌 100%의 힘을 보유한 존재.

    이산하 이우주 남매와 솔레이크는 방금 전에 상대했던 도플갱어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것을 감안하면 저기에 있는 원본이 얼마나 강할지도 대충은 예상이 된다.

    하지만.

    “큭! ……괴물.”

    검은 칼날의 여자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입가의 피를 닦으며 표정을 구기는 그녀의 눈앞으로 남자가 또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덜렁-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여유로운, 그러나 먹이사슬의 상위에 위치한 존재다운 압도적인 기운.

    검은 머리의 동양인.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알몸.

    허리띠에 묶여 흔들거리는 송곳 한 자루.

    ……하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그의 피부가 모두 핑크색이라는 점이다.

    <고인물>

    도그숲에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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