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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87화 (887/1,000)
  • 외전 13화 롤모델 (1)

    주점.

    모험에 지친 여행자들이 잠시 지친 몸을 쉬어 가는 곳.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홍옥의 파사 레이드를 마친 뒤 곧장 이곳으로 와 축하의 술판을 벌였다.

    “야! 마셔! 오늘은 얘가 다 쏜다!”

    “와아! 퀘스트 완료 기념! 특별한 허가. 마음껏 마셔라! 3잔까지만 마음껏!”

    “3잔까지면 마음껏이 아니잖아, 이 0개 국어 짠순아! 좀 더 크게 사란 말야! 내 동생 덕에 퀘스트 클리어했으면서!”

    “우주는 마음껏 마셔라! 산하, 너는 한 것 없으니 조금만!”

    “이게! 누가 한 게 없어!? 마지막에 내가 막타 못 꽂았으면 너넨 다 죽은 목숨이었어! 마! 니 자신 있나! 용암장갑암룡햄 아나 모리나! 으이! 에써끕이다 에써끕! 위험등급 에써끕 몬스터 모리나!”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맥주를 마시며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이우주는 조용히 음료를 주문했다.

    “저는 아직 미성년자니 우유 마실게요.”

    [우유? 하하하- 귀엽고 기특한 꼬마로군. 마음 같아서는 서비스로 맥주 한 잔 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요 앞 가게가 저번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가 영업정지를 당해서 말이야.]

    바텐더 NPC는 이우주의 앞으로 고소한 우유 한 컵을 내주었다.

    문득, 이우주는 우유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안주로는 애기가 먹을 젤리 같은 것도 있나요? 사탕이라거나?”

    [음? 하하하하- 우유에 이어 젤리라. 뭐 젤리라면 우리 애기 입가심용으로 구비해 놓은 게 있다만…… 왜? 안주로 그걸 주랴?]

    “네. 있다면 좀 부탁드립니다. 단 걸로.”

    그러자 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이산하가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너 젤리 좋아했던가?”

    “아니. 누나는 젤리 좋아하지?”

    “나야 좋아하지. 호리보 존맛탱이잖아! 술에 넣어서 불려 먹으면 맛있다구!”

    “…….”

    이우주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그 미소에 이산하가 발끈했다.

    “요 자식 이거 또 의뭉 떠네? 너 또 뭘 꾸미려고…….”

    바로 그때, 바텐더가 젤리를 내왔다.

    [자. 우리 애기 주려고 뒀던 간식인데, 이거라도 먹어라. 딸기 젤리, 메론 젤리, 바나나 젤리, 포도 젤리, 오렌지 젤리, 장어 젤리, 소 눈알 젤리, 코딱지 젤리…… 어지간한 맛은 다 있단다!]

    이우주는 착한 어린이답게 우유와 젤리를 우물거리며 이산하와 솔레이크의 대화를 듣기로 했다.

    마침 둘은 이우주가 목표로 삼고 있는 ‘롤모델’ 특성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성: <롤모델>

    ↳상대방의 가장 뛰어난 특성 하나를 접촉할 때마다 0.01%씩 훔쳐옵니다.

    ※100%가 되어야 발동 가능.

    ※상대방이 죽으면 특성은 사라집니다.

    이산하는 특성의 정보가 적혀있는 노트의 한 페이지를 팔랑팔랑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도그숲’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지?”

    “응. 확실해. 거기에 있는 한 필드보스급 몬스터가 그 특성을 가지고 있댔어.”

    “어디서 얻은 정보야?”

    “부모님.”

    “아하. 그럼 확실하겠네.”

    이산하는 동생이 ‘부모님’이라는 단어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까 살짝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우주는 솔레이크의 부모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까칠한 건 아빠와 관련된 일에서만인가.’

    이산하는 솔레이크의 증언을 다시 한번 요약했다.

    “그러니까. 예전에 우리 아빠가 자신의 모습을 닮은 도플갱어들을 우르르 만들어 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4차 대격변 당시 아빠의 혈족전생 특성에 당해 사라졌고…… 알고 보니 다른 하나가 살아남아 있었다 이거잖아?”

    “맞다. 적폐망령 말고. 또 다른 도플갱어. 알몸의. 그 당시 마교의 추격을 피해 생존한.”

    “……그래서. 그때 살아남은 아빠의 도플갱어 하나가 독자적인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다양한 특성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중 주요 특성 하나가 롤모델 특성이라 이거지?”

    “그렇다. 그러니 그 몬스터 잡으면. 롤모델 특성 얻을 확률. 몹시 높다고 여겨지는 것.”

    “쳇, 뭐야. 확실한 건 아니라는 거잖아. 뭐, 일단 가서 보기는 해야겠지만.”

    이산하는 김샜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이우주는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괴물 같은 행운이라면 딱 맞게 그 특성이 붙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조건 붙잡고 늘어져 보는 거야.”

    이산하와 이우주의 대화를 들은 솔레이크는 맥주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나도 돕는다! 재밌을 조짐!”

    “고마워요 누나. 안 그래도 레이드 전에 누나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었어요.”

    “부탁? 무엇?”

    “누나는 마법사니까 혹시 텔레포트 스크롤을 좀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이우주의 질문에 이산하와 솔레이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텔포 스크롤? 야, 그거 짱 비싸! 어디에 쓰려고!”

    “텔레포트 스크롤은 귀한 아이템. 밸런스 문제로 많이 풀리지 않은. 엔만한 거리. 걸어가는 것이 건강에 좋다. 젊은 사람. 많이 걸어야 하는 것.”

    하지만 이우주는 평소 잘 먹지 않는 젤리를 우물거릴 뿐 대답이 없다.

    “…….”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던 이우주는 젤리를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역시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네요. 꼭 필요하니까 몇 장만이라도 좋으니 좀 구해 주세요.”

    “……?”

    동생이 하는 드물게도 간절한 부탁에 이산하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       *       *

    -띠링!

    <도리안 그레이의 숲에 입장하셨습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숲’. 통칭 ‘도그숲’이라 불리는 오픈필드.

    하지만 오픈필드인 것치고는 숲 전체를 휘감고 있는 안개의 벽 때문에 일반적인 던전과 다를 바 없는 폐소감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꼬챙이처럼 말라 죽은 고목.

    음흉하게 끓는 곰팡이와 이끼.

    잿가루를 풀어 놓은 듯 탁한 시냇물.

    군데군데 돌아다니는 어슴푸레한 도깨비불.

    한눈에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 외형의 숲이다.

    마치 숲 전체가 왜곡되어 있는 느낌.

    “어우 습기 차. 숨이 턱턱 막히네.”

    “습기. 골렘의 가장 큰 적. 기분 나빠!”

    “…….”

    이산하, 솔레이크, 이우주는 ‘롤모델’ 특성을 얻기 위해 이곳 도그숲의 필드보스를 사냥하러 왔다.

    …탁! …타악!

    이우주는 정글도를 들어 보라색 넝쿨들을 쳐 내며 길을 냈다.

    “습도가 높으니 체력이 빨리 닳네.”

    “이래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구해 온 거야?”

    “아니. 그 때문은 아니야. 고작 걷기 싫다고 그 비싼 스크롤을 쓸 수는 없지 당연히.”

    “그럼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아니. 텔레포트 스크롤 같은 비싼 아이템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그냥 죽는 게 싸게 먹히지. 나 같은 쪼렙에게는 말이야.”

    “그럼 왜 텔레포트 스크롤을 그렇게 많이 챙겨 온 거야? 우리가 다 써도 남겠다.”

    “……다 이유가 있지.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지만.”

    이우주는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리안 그레이의 숲> -등급: ?

    뎀1 시절부터 꾸준한 명소로 주목받아온 이 거대한 숲은 실제 아마존 정글만큼이나 넓고 광활하다.

    게임이 출시된 지 1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구역,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몬스터들로 넘쳐나는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이곳 어딘가. 너희 아버지의 도플갱어. 배회 중.”

    솔레이크의 말에 이우주의 표정이 굳었다.

    “도플갱어 카이저일까? 그럼 카피된 시점에서 전투력의 99%가 복제되었을 텐데.”

    “일반 도플갱어였으면 좋겠다. 그럼 33%잖아. 그럼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아빠를 너무 얕보네. 전에 말하지 않았나? 아빠는 용암장갑암룡을 22분 41초만에 잡은 사람이야. 뎀의 전설, 살아 움직이는 신화라고.”

    “정확히는 살아 알몸으로 움직이는 신화지.”

    이산하 이우주 남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내고 있는 동안 솔레이크는 자신이 들었던 정보대로 지도에 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요 근처. 분명. 나의 기억에 의하면. 달빛 광산. 북쪽. 산봉우리 너머 능선. 바위가 해골처럼 생겼다? 썩은 통나무 구름다리. 부패한 진흙탕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 늪가의 오른쪽. 감아 돌다…….”

    바로 그때.

    …후욱!

    기분 나쁜 대기가 피부로 확 와닿는다.

    맨 앞에서 걷던 이우주가 멈칫했다.

    부스럭-

    회색의 곰팡이 덤불을 가르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산하, 이우주, 솔레이크는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타난 것은 웬 유저였다.

    길게 늘어트린 검은색 포니테일.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솔레이크처럼 서양인과 동양인의 혼혈처럼 생긴 이목구비.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음울하게 쳐진 눈 아래로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이었다.

    “뭐야? 이런 데서 솔플을 뛰는 플레이어가 있나?”

    이산하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솔레이크의 두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리고 그보다도 먼저 이우주가 외쳤다.

    “눈에 흰자위가 없어! 유저가 아니야!”

    그와 거의 동시에.

    …번쩍!

    시커먼 참격이 날아들었다.

    쩌어억!

    검은 날빛을 뿌리는 장검이 이산하의 옆에 있던 바위와 고사목을 통째로 동강 내 버렸다.

    “으악!? 뭐야 이 자식! 도플갱어인가!?”

    때마침 발을 헛디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던 이산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윽고, 이산하의 앞으로 검은 머리칼의 여자가 긴 칼날 그림자를 드리운다.

    씨익-

    그녀의 입꼬리가 귓불에 닿을 정도로 찢어졌다.

    검은자위만 가득한 눈에서는 시커먼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우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낯이 익은데?’

    그리고 이내, 이우주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음침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그녀의 웃음소리였다.

    [푸스스스스스-]

    마치 폐에 뚫린 송곳 구멍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그런 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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