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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78화 (878/1,000)
  • 외전 4화 솔직히 완결 좀 에바였잖아, 안그래? (4)

    이름 없는 여왕이 등장했다.

    이산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채팅창을 들여다보았다.

    “네! 드디어 등장했슴다! 저를 지난 몇 주 동안 개고생시켰던 난적! 무명여왕의 두둥 등장!”

    “아하, 아하, 이 몬스터가 대격변 전에는 위험등급이 B급이었나 보죠?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이야기네유.”

    “오오- B급 몬스터 중에 가장 센 몬스터였다 이검까? 그럴 만함다! 패턴은 그대로였을 테니까요!”

    이산하는 활과 화살을 든 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대격변 전 B급 몬스터 중에 가장 괴랄한 난이도를 가진 몬스터.

    사실 이 몬스터는 레벨과 랭킹을 막론하고 모두 공략하기 까다로워 하는 몬스터이다.

    공격 패턴이나 무빙이 상당히 어지럽고 난해하기 때문.

    콰콰콰쾅!

    이름 없는 여왕이 창을 휘두르자 그 압력 때문에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파창!

    공기가 몇 겹으로 겹쳐지나 싶더니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간다.

    무수한 파편들은 칼바람이 되어 전후좌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 없는 여왕이 창을 한 번 휘두르는 것은 아니었다.

    …파창! …파창! …파창! …파창! …열파참!

    이름 없는 여왕의 창끝에서 폭사된 뇌전이 마치 수천 마리의 뱀처럼 다가온다.

    물리 데미지뿐만 아니라 마법 데미지까지 듬뿍 실려 있는 공격이었다.

    “어우 과연 A+급 몬스터답네. 이쯤 되면 위험등급 A+ 중에서도 최상위권 맞죠?”

    이산하는 앓는 소리를 하며 바닥을 굴러 피했다.

    이름 없는 여왕은 다채로운 공격 패턴과 스킬, 1:1 대인기와 광역기를 모두 가진 데다가 AI마저 뛰어나다.

    과연 한때 난공불락으로 통했던 보스 몬스터다웠다.

    “하! 지! 만! 저는 이미 여왕님의 약점을 다 파악해 왔지요! 후욱후욱! 하악하악!”

    이산하는 씩 웃으며 화살을 날려 보냈다.

    펑! 펑! 펑! 펑!

    화살에 맞은 이름 없는 여왕의 체력 게이지가 쭉쭉 줄어들기 시작했다.

    -눈나...무명여왕 약점 다 시청자들이 알려준거잔아...

    -자기가 알아낸 척하네ㅋㅋㅋㅋㅋ

    -진지 좀 빨자면...확실히 무명여왕은 HP가 낮은 편이어서 몸빵만 제대로 하면 그럭저럭 잡을만하지...ㅇㅇ

    -ㄴ맞음. 무명여왕 공략 난이도가 높은 건 레이드 개시랑 동시에 날아드는 칼창 소나기 때문임ㅋㅋㅋ

    -ㄴ그리고 창끝에서 뇌전이 랜덤 궤적으로 뽑혀 나오는 거랑 피 10% 남았을 때 공격패턴이 좌우반전되는 것 정도?

    -ㄴ아 다알려줬네 아주;;;

    -ㄴ우리가 대신 공략해 준다 그냥~~~

    .

    .

    이산하는 계속해서 창을 피해 움직였고 틈틈이 화살을 날려 보낸다.

    중간중간에 뇌전에 당해 리타이어 될 뻔했지만 이우주가 미리 디딜 곳을 알려 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누나, 여기 밟아. 다음은 여기. 그 다음엔 여기서 백스텝, 이후 차차차. 한 박자 쉬고, 턴, 그렇지. 그렇게.”

    “쉬, 쉽네! 이 정도는 누나도 할 수 있어!”

    “짊어진 물약이나 내려놓고 말해. 아주 죄다 몸으로 맞고 때울 각오 단단히 하고 왔구만 뭘.”

    “으윽…… 위엄이…… 누나로서의 위엄이…… 성인으로서의 위엄이……”

    뭐 아무튼.

    이산하의 회피와 공격은 제법 성공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이름 없는 여왕은 무난하게 HP가 10%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콰콰콰쾅!

    어두운 아우라에 휘감긴 이름 없는 여왕이 몸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몬스터는 갑자기 지금까지의 공격 패턴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반전’ 특성. 왼손 공격을 오른손으로, 오른쪽 발로 하던 공격을 왼쪽 발로.

    지금까지 했던 공격 패턴을 완전히 좌우반전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종래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진 대적자로서는 갑자기 정반대로 뒤집힌 이 공격 패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아앗!?”

    이산하는 지금껏 계속 왼쪽 팔, 오른쪽 다리, 오른쪽 창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오른쪽 팔, 왼쪽 다리까지는 피했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숙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마침 딱 왼쪽을 겨누고 있던 오른쪽 창이었다.

    [오-오오오!]

    이름 없는 여왕은 오른손에 쥔 창으로 이산하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어? 대놓고 빈틈이네. 흠, 함정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슥 다가온 이우주가 이름 없는 여왕의 옆구리에 철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동시에, 계속해서 칼질을 하는 이우주의 시야를 빼곡한 알림 메시지들과 타격 이팩트가 가린다.

    -띠링!

    [Critical!]

    [Good!]

    [Excellent!]

    [Perfect!]

    연타를 성공시킬 때마다 뜨는 칭찬 문구.

    -이 게임에 저런 시스템이 있었어...?

    -처음 보는 알림인데????

    -지렸다...평생에 한번 뜨기도 어렵다는 퍼팩트 메시지를 밥먹듯이 띄우네...

    -퍼펙트 메시지 뜨는게 홀인원 확률이랑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음?

    -무빙 지린다 진짜!!!!!!!!

    -형냐...나죽어...

    .

    .

    그것은 이산하를 비롯한 시청자들을 멍하게 만들었다.

    “짜…… 짜식! 이 누나는 기특하다! 그동안 지도편달한 것을 훌륭하게 숙지했구나!”

    -?

    -;;;

    -ㅎ

    -ㅋㅋ

    .

    .

    “여러분! 쟤가 제 동생입니다! 하하하! 다 제가 잘 교육시킨 덕이지요! 꺄악- 드디어 나도 무명여왕 잡아 보는구나!”

    이산하는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띠링!

    <‘이름 없는 여왕’ 처치에 성공하셨습니다.>

    이름 없는 여왕의 1페이즈가 무난하게 끝났다.

    이 뒤로 이어지는 2페이즈는 이름 없는 여왕이 죽은 뒤 근처에 있는 여자 캐릭터에 빙의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심전심’ 특성. 이름 없는 여왕의 공략 난이도를 배가시키는 악명 높은 스킬!

    -띠링!

    <히든 퀘스트 발견!>

    <파티 안에 한 명 이상의 여성 캐릭터가 존재합니다>

    <‘잊혀진 고대문명의 유적’에 잠들어 있는 히든 퀘스트 발동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이윽고.

    비틀비틀거리며 일어난 이름 없는 여왕은 눈앞에 있는 이산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 네 몸을…… 내게 바치……]

    “언니! 절 가지세요!”

    순간, 이름 없는 여왕은 말을 멈췄다.

    앞섶을 풀어헤친 이산하가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 절 가져요! 언니! 사랑해요!”

    […….]

    -엌ㅋㅋㅋㅋㅋㅋㅋㅋ

    -이름없는 여왕 당황잼ㅋㅋㅋㅋ

    -여왕님 황당해서 굳어버린것좀봨ㅋㅋㅋㅋㅋ

    -오이오이;; 원래 여기서 버퍼링이 있었냐구~~!!

    -눈나...여왕님이 부담스러우시대...

    -옷깃 좀 여며 우리도 부담스러웡...ㅠ

    .

    .

    하지만 이산하는 시청자들의 반응 따위는 무시한 채 희희낙락이다.

    “드디어! 저는 이름 없는 여왕의 몸에 빙의해서 퀘를 깹니다! 이거 빙의되는 사람이랑 아닌 사람이랑 히든퀘 내용 다른 거 아시죠? 꺄호!”

    -ㅋㅋㅋㅋ뉴비 남동생 양학하고 퀘 깨려나 보네

    -자니놘~ 여좌롸~ 나를 욕콰지는뫄~

    -어우 무명여왕한테 빙의한 담에 남동생 샌드백으로 쓰려고;;;

    -역시 인성퀸!

    -남동생 쪼렙에 상점 장비던데...불쌍해...ㅠㅠㅠㅠ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음? 아까 보니까 남동생분 게임 개잘하시던데...

    -맞음. 순간 판단력이랑 결정력이 ㄹㅇㅗㅜㅑ였음.

    -희대의 쪼렙 재능러 뉴비 vs 발컨이긴 하지만 나름 고렙

    -최대한 싸워봐라 동생쿤!

    -고인물이었으면 저 상황에서도 이겼음

    .

    .

    시청자들은 채팅창에 여러 댓글들을 남기고 있었다.

    그때.

    그저 묵묵히 채팅창을 읽고 있던 이우주를 움찔하게 만드는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

    -고인물이었으면 저 상황에서도 이겼음

    그동안 무표정 일색이었던 이우주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러자 채팅창이 다시 활발해졌다.

    -어케 이김ㅋㅋㅋㅋㅋ

    -암만 그래도 우리 눈나 다년간 이 게임 플레이했다 이말이야~

    -ㄹㅇ플탐만 놓고 보면 고인물 축임ㅋㅋㅋㅋ

    -게다가 이름없는 여왕의 몸에 빙의한 상태인데ㅋㅋㅋㅋㅋ루삥뽕

    -응 절대못이겨~

    -뭐, 진짜 전성기 시절의 고인물이라면 이길 수 있겠지만

    -아님 마동왕이라거나~

    .

    .

    “저도 할 수 있다니까요!”

    이우주는 발끈했다.

    아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아빠의 명예에 부응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허생전의 허생이, 방망이 깎는 노인의 노인이 그랬듯 그동안 묵묵히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하고 수련해 왔던 그이다.

    “역사서의 유방이 그랬고 태공망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오랫동안 준비해 왔어요!”

    -갑분고전...?

    -역사지식 칭찬해~

    -어머님께 물려받은 승부사 근성!

    -ㄴ아버님께 물려받은 알몸!

    -근데 아무리 잘해도 아빠의 그림자를 넘어설 수는 없을듯ㅋㅋㅋ

    -ㄴㅇㄱㄹㅇ잘해도 본전인 게임ㅋㅋㅋ아빠가 너무 넘사벽이었지

    -ㄴ아빠가 이미 다 해먹어서 딱히 뭘 더 증명할게없음ㅠㅠㅠㅠ

    -ㄴㅇㅈ최종콘텐츠인 용자의 무덤까지 섭렵했는데ㅋㅋㅋㅋ

    -기록 단축 정도? 근데 그건 첫 클리어가 의미가 있는거라서...

    -ㄴ기록 단축도 근데 아무도 못하고있지;;;;

    -근데 넘어설 수 있는 방법 딱 하나 있다

    .

    .

    순간, 이우주의 눈에 확 들어오는 채팅 하나가 있었다.

    -근데 넘어설 수 있는 방법 딱 하나 있다

    모든 신기록들의 보유자, 십수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점으로 회자되는 그 이름.

    이어진.

    아빠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우주는 눈을 반짝였다.

    이윽고,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추가되는 태양룡이랑 오만의 악마성좌를 잡을 수 있다면 인정. 그건 전성기 시절의 고인물도 못 잡았었음ㅋㅋ

    그 당시 고인물이 태양룡과 오만의 성좌를 잡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제로 대격변을 일으켰던 태양룡과 오만의 악마성좌는 관리자에 의해 종래의 공격 패턴이나 스토리 등을 모두 잃어버렸었다.

    비록 고인물이 그들을 사냥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알맹이가 빠져있는 쭉정이나 다름없었던 것.

    그러니 진짜배기 태양룡과 오만의 악마성좌는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보니 곧 대규모 업데이트가 진행된다고 했죠. 태양룡과 오만의 악마성좌가 귀환한다고.”

    이우주는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던 소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태양룡 군주’ & ‘오만의 악마성좌’의 부활! 그들이 귀환한다!>

    최강의 서브스트림 둘이 복귀한다. 그때 그 시절의 레전드 타이틀을 그대로 가진 채!

    -분명 고인물도 그놈들을 노리고 있을 거임. 옛날에 어중간한 상태로 잡아버린 게 아쉬워서...보다 완벽한 상태로 레이드를 성공시키기 위해....ㅋㅋ

    이윽고, 이우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잡아 보겠습니다. 둘 다요.”

    지금까지 회색빛으로 흐릿하던 눈동자에 총기가 깃들어 반짝이고 있었다.

    ……단 하나의 사소한 문제는.

    [우하하하! 동생아! 이리 와라! 누나의 위대함을 알게 해 주맛!]

    뒤에서 이름 없는 여왕의 몸에 빙의한 이산하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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