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화 4차 대격변 (7)
<윤솔>
LV: 86
호칭: 분노의 악마성좌 사탄의 위상(특전: 자폭)
※이 특성을 발현 시 캐릭터는 삭제됩니다
사탄을 잡고 얻은 특성 ‘자폭’.
이것은 말 그대로 자폭(自爆)이었다.
사실 자폭이란 플레이어에게 있어 말 그대로의 의미로 통하지는 않는다.
자폭 특성은 몬스터가 발현할 때야 정말로 죽음을 담보로 한 공격이 되지만 플레이어의 경우에는 자폭으로 사망한다고 해도 신전에서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의 자폭은 클라스가 달랐다.
자폭한 사탄이 다시 리젠되지 않듯, 자폭한 플레이어 역시 다시 되살아나지 못한다.
사탄이 자폭할 당시의 위력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는 대신 캐릭터가 영원히 삭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솔은 사탄의 자폭 특성을 발현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몰락하는 태양을 등진 채로!
“그동안 즐거웠어.”
윤솔은 내게, 그리고 이 세계에 안녕을 고한다.
드레이크가 사탄 레이드 최후에 희생해서 나를 구했듯, 윤솔 역시도 사탄 레이드에서 얻은 심득(心得)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
나는 윤솔을 바라보며 외쳤다.
“너…… 너 왜 그랬어!?”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계정…… 아니, 목숨이잖아.”
윤솔은 석양을 등지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활짝 펼쳐진 날개 때문에 마치 진짜 천사를 보는 듯하다.
“네가 준 목숨이니 너를 위해서 쓸게.”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솔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등진 채로 입을 열었다.
“어비스 터미널을 지나서 천공섬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나는 이 세계에 깊게 매료되어 버렸어.”
이 세계에 매료되어 있는 것은 여기 모인 플레이어 연합군의 모두가 똑같다.
이미 깊게 사랑하게 되어 버린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전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총체(總體)의 일부가 된 윤솔은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다시 캐릭터 생성하면…… 쩔 해 줄 거지?”
그러자 연합군 측에서 목매인 외침들이 터져 나온다.
“당연하죠 언니! 제가 맨날 버스 태워드릴게요!”
“저는 템 싹 다 지원해드릴게요!”
“24시간 버스, 아니 택시, 아니 무등 태워드리겠습니다!”
“사랑해요 누나!”
“언니이이이-! 저도 데려가요!”
“엉엉- 가지 마세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그 울음소리들을 뒤로한 윤솔은 이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
…번쩍!
까마득히 위로 솟구쳐 오른 윤솔은 태양에 닿기 직전,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이 열기를 버텨내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드는 고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탄의 힘을 폭발시켰다.
……! ……! ……! ……!
망막이 익어버릴 듯한 이 섬광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온 시야가 빛으로 뒤덮인다.
홍염(紅焰).
한 세계를 몰락으로 몰고 갔던 폭발이 이제는 한 세계의 몰락을 막아 세웠다.
인간의 가청영역을 한참 전에 넘어선 굉음이 모든 것들을 떨어 울린다.
파편의 소나기가 대지를 사납게 노크하고 있었다.
탱커들이 방패를 들었고 마법사들이 방어벽을 펼쳐 그것들을 겨우겨우 막아 낸다.
…꾸구구구국!
하늘에서 나는 둔중한 소음.
이윽고 섬광이 걷힌 하늘에는 태양이 움직임을 멈춘 채 정지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럴 수가!]
윌슨이 토해 내는 기함.
오무아무아가 처음으로 손의 움직임을 멈춘다.
“……지금이다.”
드레이크가 붉어진 눈시울을 들어 눈앞의 오무아무아를 노려보았다.
“공격!”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오더,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
…퍼펑!
드레이크가 쏘아보낸 강전이 오무아무아의 가슴팍을 사납게 때렸다.
그것이 반격의 첫 신호탄이었다.
“가즈아아아아아!”
“윤솔 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윌슨 이 더러운 자식아!”
모든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공격을 쏟아낸다.
콰쾅! 퍼퍼펑! 와지직! 콰콰콰쾅! 쩌저저적! 쿠쿵! 쾅!
화려한 피격 이펙트와 함께 굉음들이 터져 나온다.
수없이 많은 공격들이 오무아무아 하나를 향해 빗발치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오무아무아의 HP는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닿아 있을 만큼 창대하다.
윌슨은 한 마디의 말로 모든 이들의 염원을 일축해 버렸다.
그리고 이내, 윌슨은 다시 손을 하늘 위로 뻗어 태양을 끌어당기려 한다.
기우뚱-
윤솔의 희생으로 인해 일부가 파괴된 태양이 또다시 지면을 향해 크게 기울어졌다.
이대로 태양의 몰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모든 이들이 절망 어린 표정, 타들어가는 속마음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였다.
“어진아아아!”
유다희가 등장한 것은.
지금껏 어디 있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던 그녀가 이 자리에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실로 의아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다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재> / 재료 / S+
회색분자를 상징하는 재.
둘 이상의 물질이 하나로 섞였을 경우 이 재를 사용하면 깨끗하게 분리된다.
-특정 공간, 일정 시간 동안 잿빛용 로도피스의 권능을 일부 재현해 냅니다
※본 아이템은 1회용입니다
잿빛용 로도피스를 잡고 얻었던 화산재.
편잭 노인의 좀비 개에게서 좀비 바이러스 코드만을 분리해 냈던 비장의 히든 피스.
그것이 유다희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젤리팔이 소녀 츄츄, 그레이 시티의 경비병들이 우르르 짊어지고 오는 바구니에는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재와 같은 색깔로 물들어 있는 슬라임 젤리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뿌!]
쥬딜로페가 유다희와 츄츄를 보며 반색을 한다.
녀석은 포르르 날아가 두 손에 화산재 색으로 물든 젤리들을 움켜쥐었다.
유다희는 숨 찬 걸음으로 뛰어와 내 옆에 섰다.
“허억…… 허억…… 뛰다 리타이어 되는 줄 알았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긴! 이렇게 된 거지!”
유다희는 츄츄와 함께 상당한 양의 슬라임 젤리들, 그리고 화산재들을 한데 모았다.
“화산재에 관한 연구라면 그레이 시티가 최고지! 이 아이템의 효과를 밝혀내고 물량을 생산해 내느라 늦었어!”
“……효과라 하면?”
내가 물었지만 유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지금이다!”
윤솔이 자폭함으로써 상태이상 ‘스턴’에 빠져 있는 오무아무아.
그 찰나의 틈을 노려 유다희가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재와 그에 준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 슬라임 젤리들을 투척했다.
퍼퍼퍼펑!
그레이 시티의 노련한 경비병들이 투석기를 통해 던지는 화산재!
이윽고, 화산재에 피격당한 오무아무아가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천하의 윌리엄 링트 윌슨조차 당황해 소리칠 정도의 이변.
츠츠츠츠츠……
두 가지 섞인 물질을 분리해 내는 화산재가 오무아무아의 몸을 천천히,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분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 플레이어 연합군을 경악시킬만한 일이 벌어졌다.
…쿵! …쿠쿵!
오무아무아의 거체가 다시 두 개의 데이터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 태양룡군주 바이어스.
그리고 그 사이의 윌슨. 윌리엄 링트 윌슨.
그는 몹시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플레이어 연합군을 바라본다.
오무아무아를 다시 원래대로 분리시켜 놓는 쾌거를 이룬 유다희, 그녀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윤솔이지? 아까 그 여자. 그 여자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줘.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정말 몇 초만 더 늦었어도 큰일 났을 뻔했다.
한편, 윤솔의 희생으로 인해 반등한 플레이어 연합의 사기는 최대치까지 올랐다.
“이제 끝이 보인다!”
“윌슨을 끌어내!”
“4차 대격변도 클리어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윌슨을 향해 달려나간다.
윌슨은 당황하여 루시퍼와 바이어스의 몸을 컨트롤하려 했지만 그 둘은 이미 한번 체력이 0까지 떨어졌던 데이터 값인지라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윌슨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상황.
오무아무아가 다시 만들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리고 플레이어 연합이 윌슨을 잡아 족치는데 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남아 있었다.
……갑자기 모두의 앞을 가로막은 도깨비 가면의 인영(人影)들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콰콰쾅!
오무아무아와 플레이어 연합군 사이에서 커다란 폭발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최전방에서 진격하던 플레이어들이 포격을 맞고 우르르 리타이어된다.
검붉은 밤하늘, 몰락하는 석양을 등지고 수많은 그림자들이 늘어졌다.
GM 처리반.
도깨비 가면 아래 검은 피풍의를 걸친 인영들이 전깃줄 위 까마귀 떼처럼 쭉 늘어선 채 플레이어 연합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측의 마지노선.
조디악이 건조한 미소를 머금었다.
“푸스스스- ‘처리반’이 왔군.”
과거 벨페골의 악몽 속, ‘최후의 미션: 탈출하는 자’를 수행할 때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비켜라 윌슨의 사냥개들아!”
“우리를 막지 마!”
“반인륜적인 새끼들!”
플레이어들이 야유를 보낸다.
하지만 처리반의 도깨비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윌슨을 보호하는 경계를 더욱 더 두텁게 만들 뿐.
미치광이들이 우글거리는 카르마 유저들을 상대로 관록을 쌓아온 그들은 PVP의 도사들, 더군다나 피지컬도, 장비빨도 넘사벽인 존재들이다.
애초에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만 선발해 키워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레벨업을 시키고 그 외 온갖 훈련과 적응을 마친 뒤 아이템들마저 최상급 옵션으로 맞춰 착용하고 다니는 규격 외의 플레이어들이 아니던가.
공식 랭킹 위에 존재하는 하늘 밖의 하늘, 천외천(天外天). 그것이 바로 처리반!
제아무리 플레이어 연합군의 쪽수가 많다고 해도 부담스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나하나가 OP 캐릭터인 그들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
튜더와 비앙카, 페이사, 트로츠키가 이끄는 랭커 연합도 부담스러운 기색으로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변이 생겨났다.
퍽!
맨 앞에 있던 덩치 큰 처리반 하나가 갑자기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모양새.
“……!?”
플레이어 연합도, 처리반들도 모두 놀랐다.
놀랍게도 공격은 안에서부터 들어왔다.
퍽! 퍽! 퍽! 퍽!
지금 이 순간에도 우수수 죽어나가고 있는 처리반들.
“……!?”
수많은 처리반들이 쌓여 가는 시체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고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른 처리반 GM들과 다르게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다소 작은 체구의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손에 든 톤파, 열폭풍에 휘날리는 검은 장포, 그리고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도깨비 가면.
순간, 나는 뜨겁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려 온 미약한 향기를 맡았다.
쌉쌀한 박하 향.
한국지부 처리 2반의 반장 남세나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