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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69화 (869/1,000)
  • 869화 4차 대격변 (6)

    솔직히 반신반의 했다.

    내가 온 몸을 내던져 태양 추락을 막고 오무아무아에게 데미지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나에게 여벌의 목숨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츠츠츠츠……

    예상대로, 태양과 격돌했을 때 내 몸은 순식간에 불타 바스라졌다.

    여벌의 심장으로 공급되던 막대한 양의 포션들조차도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증발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데미지.

    내 육체는 잘게 부서졌고 이제 남은 것라고는 정신뿐.

    <이어진>

    LV: 100

    HP: 1,000/1,000

    호칭: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불의 후작 아몬의 인성(특전: 헤아릴 수 없는 자)

    압도적인 정신계 저항력이 내 영혼을 붙잡아두었기에 영혼은 공중분해 되지 않고 잔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몸을 잃어버린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슈우우우우욱-

    나는 지금 그것을 실시간으로 체험 중이다.

    사후세계(死後世界).

    내가 눈을 뜬 그곳은 아주 깊고 추운 곳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쯤이냐고?

    ……아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북대륙에 있는 가혹한 설산! 그 중에서도 아주 깊은 크레바스의 밑바닥이었다!

    “으으…… 뭐야?”

    눈을 떴을 때, 나는 온몸이 꽝꽝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소지금을 조금 잃어버리긴 했지만 황천의 군주 고르딕사의 ‘절약’ 특성을 보유하고 있었던 탓에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스탯이나 아이템 등은 그대로이다.

    와지직!

    나는 몸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얼음층을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움직이지 않는 몸, 오랜 시간을 한파에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관절 곳곳에서 삐그덕거리는 소음이 엄청나다.

    고개를 드니 태양이 설산을 녹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졸졸졸졸졸졸……

    그로 인해 녹아내린 물이 크레바스 속을 녹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나마 이 깊고 깊은 얼음층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반투명한 얼음벽을 바라보았다.

    빙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시커먼 몸, 희번뜩거리는 눈동자, 입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이빨들.

    적폐망령! 나는 흉측한 인간 지네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어진>

    LV: 100

    HP: 1,000/1,000

    호칭: 검은 용군주 오즈의 위상(특전: 혈족전생)

    드디어 이 특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혈족전생(血族轉生). 죽으면 그 즉시 하위종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나는 특성.

    그동안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어서 그 효과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기적인 스킬이기도 하다.

    원래 플레이어는 딱히 하위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이지만 도플갱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벨제붑이 구더기 아들의 몸을 빌어 되살아났고 오즈 역시도 바실리스크 딸의 몸을 빌어 되살아났듯, 나 역시도 도플갱어 망령의 몸을 빌어 되살아난 것이다.

    문득 이 적폐망령 녀석을 만들어냈을 때, 그리고 크레바스 아래로 처넣어 버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과거.

    나는 추격대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십 수 마리의 도플갱어를 나로 위장시켜 사방팔방으로 퍼트렸었고 그중 살아남은 도플갱어 한 마리가 수없이 많은 몬스터와 플레이어, NPC를 살육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몬스터 한 마리가 탄생했다.

    이형(異形)으로 진화한 살인기계.

    이후 놈은 여러 번이나 나의 손아귀에서 도망쳤으며 번번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조디악과 결탁해 고정 S+급 몬스터인 벨페골마저 쓰러트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놈의 최후는 실로 허무한 것이었다.

    내가 보여 준 NPC 몰살용 해킹 코드에 당한 적폐망령은 스스로 크레바스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고 그대로 이곳 영겁의 빙굴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적폐망령을 상대하면서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저 녀석에게 죽는 것은 3류. 저 녀석을 죽이는 것은 2류지. 1류라면 저 녀석을 되려 나에게 유리한 곳에 역이용 해먹을 수 있어야 해.’

    그리고 그런 내게 드레이크는 질문했다.

    ‘아까 인간 지네에게 죽으면 3류, 인간 지네를 죽이면 2류, 인간 지네를 역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으면 1류라고 하지 않았던가? 크흠. 아니 그런데… 그 읽으면 자살하는 책을 인간 지네에게 보여 줬으니, 결국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역이용한 게 아니잖아?’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해 주려다가 때마침 훅 들어오는 조디악의 방해 때문에 깜빡했지.

    ……뭐, 그때의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언젠가 사용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 혈족전생 특성을 위해 강력한 육체를 가진 도플갱어 한 마리를 얼음 속에 산 채로 묻어 두는 것.

    “김장김치 같은 거지. 어디 잘 익었나 볼까?”

    나는 새롭게 얻은 육체를 한번 점검해 보았다.

    <인간 지네>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벌레, 악귀, 맹독, 백전노장, 잠복, 지진, 나포, 과식, 흡혈, 고속재생, 갹출, 돌격대, 격리수용……

    -서식지: ‘칼침의 탑 8층’

    -크기: 44m

    -……(이하중략)……이렇게 해서 태어난 괴기스러운 언데드, ‘데스나이트 실패작’들의 융합체가 바로 이 ‘인간 지네’인 것이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과 특성들에 적폐망령이 보유한 특성들이 더해졌다.

    “어우, 근데 몸이 너무 흉측하다. 이대로 나선다면 사람들 다 기절하겠는데?”

    다행스럽게도 육체는 다시 코스튬이 가능했다.

    나는 몸에 붙어 있는 쓸데없는 신체 기관들을 전부 다 떼어내고 인간 형태로 다듬었다.

    오추멜로프의 무한코스튬 반지가 있었기에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쉬웠다.

    “그래도, 죽어 보니 뭔가 후련하네.”

    그동안 한 번도 죽지 않는다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끝에 맞이한 첫 번째 죽음은 오히려 나를 여러모로 달관하게 만들었다.

    죽음 뒤에 인간은 비로소 현명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비록 게임 속이지만 나는 진짜로 죽는 것과 같은 충격과 공포, 미련, 해방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서둘러라.]

    [어서!]

    내게 메시지를 전해 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108번뇌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 불사조의 날개를 구성하고 있는 이 녀석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나 역시 녹아내리는 얼음구덩이 속에 오래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빨리 원래 있던 전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츠츠츠츠츠츠……

    시공간의 조율자 불사조는 맵 어디든 포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눈앞에 생성되는 붉은 원을 향해 뛰어들었고 그 결과, 먼 거리를 단숨해 이동하여 이곳 유토러스의 전장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자, 뭐 이렇게 되었다는 말씀.”

    나의 등장에 플레이어 연합군 전체가 환호했다.

    한국 랭커들, 아시아 랭커들, 세계 랭커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연을 맺었던 수많은 친구, 지인들이 나를 향해 눈물지어 보인다.

    하지만 나의 재등장으로 반전된 분위기와 달리, 나의 속은 그리 편하지 않은 상태였다.

    ‘큰일났다. 적폐망령을 얼음 속에 너무 오래 재워뒀나?’

    아직 관절 곳곳이 뻐근하다.

    몸 곳곳을 굳게 봉인하고 있는 상태이상 ‘동상(凍傷)’과 ‘사후경직(死後硬直)’이 치료되기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 상태.

    때문에 나는 허장성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짐짓 여유로운 미소로 오무아무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이 먹힐 리 있나.

    윌슨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았다.

    [안타깝게 되었구나. 너의 회복을 기다려 줄 아량은 없다.]

    이윽고, 오무아무아가 팔을 휘젓는 것이 더욱 더 기괴한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태양의 낙하 속도가 빨라진다.

    우지지지지직-

    세계 곳곳의 조금이라도 높다 하는 산들은 이미 죄다 불타고 무너져 버렸다.

    이제 대지에는 가만히 있어도 불이 붙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땀과 침, 눈물이 말라붙는다. 살이 조금씩 익어 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나는 몸이 천천히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팟!

    시기적절하게 온몸을 녹여주는 온기.

    힐 마법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윤솔이 보인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는 듯 내게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나는 그게 힐 마법이 잘 먹혔다는 뜻인 줄 알고 엄지를 마주 척 들어보였다.

    하지만.

    “미안해 어진아.”

    윤솔은 왜인지 처연한 표정으로 내게 작별인사를 건네온다.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어.”

    ……?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미처 질문할 겨를도 없이, 윤솔은 신성모독자의 날개를 활짝 펴더니 그대로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치 이카루스의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날개.

    윤솔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 사탄을 잡고 얻었던 특전, 기억해?”

    물론 기억한다.

    사탄 레이드에서 홀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던 드레이크는 레이드가 다 끝난 이후 호프집 뒤풀이에서 나와 윤솔에게 물었었다.

    ‘그래, 다들 아이템은 좋은 걸 받은 것 같고. 호칭 보상은 뭘 받았나?’

    ‘나는 선악과 특성을 받았어.’

    ‘나는 비밀!’

    나와 드레이크가 몇 번 더 채근했지만 이상하게도 윤솔은 자기가 얻은 특성에 대해서만큼은 비밀을 지켰었다.

    그녀가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윤솔은 태양의 중심부를 향해 날아가며 사탄 레이드 이후 얻은 호칭과 그로 인한 특전 스킬을 공개했다.

    <윤솔>

    LV: 86 호칭: 분노의 악마성좌 사탄의 위상(특전: 자폭)

    중심기압 870 헥토파스칼, 초속 85m, 직경 1,850km로 몰아치는 거대한 화염의 폭풍,

    미국 본토의 절반가량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크기.

    과거 사탄이 마지막 순간 보여 주었던 최강 최악의 자폭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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