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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67화 (867/1,000)

867화 4차 대격변 (4)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헤겔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中-

*       *       *

[같은 실수를 반복할 셈이냐.]

석양이 진다.

대륙을 향해 직접 저물어오는 태양.

동시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불사조.

그의 등장에 내 인벤토리 한 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간여행자의 예언서> / 재료 / ?

부정한 가치들이 범람함에,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고,

용과 악마가 몸을 섞을 것이며,

재앙의 별이 하늘에 긴 궤적을 그릴 때,

태양이 떨어지고 마침내 긴 황혼이 저물어 오리라.

-(아이템이 봉인이 해금되었습니다)

과거 불사조가 소멸할 당시에 떨어트렸던 아이템이다.

나는 이제야 이 주문서에 적힌 글귀들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부정한 가치들이 범람한다는 것은 조디악이 터트린 돈 복사 버그를,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돈다는 것은 백섭을, 용과 악마가 몸을 섞는다는 것은 오무아무아를, 재앙의 별이 하늘에 긴 궤적을 그린다는 것은 오무아무아의 가공스러운 HP를, 태양이 떨어지고 마침내 저무는 긴 황혼은 바로 이 세계의 멸망을 암시하는 것.

그리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불사조는 이 세계의 마지막 황혼의 순간에 부활해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태양이 가까워져서일까? 불사조는 전에 없이 더 생생한 모습이다.

불의 기운을 생명력의 근원으로 삼는 몬스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윽고, 불사조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해진 힘으로 불과 얼음의 벽을 만들어 태양의 추락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너를 완전케 하리라.]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무어라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

…파앗!

불사조의 전언이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내 몸을 태운다.

하얀 백빛, 순수한 존재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흰 불꽃이 내 몸을 살라먹는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내가 겪어 본 적이 없던 경험들, 하지만 분명히 나임에 틀림없는 기억들.

과거 살인자들의 탑에서 만났던 벨페골이 보여 줬던 알 수 없는 기억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       *

세상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 온통 누런 유황구름만이 가득한 밤하늘에는 불길한 적빛의 별똥별 하나가 떨어진다.

불타는 대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리고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한 줄기의 커다란 별똥별 궤적.

나는 하늘에 길게 그어져 있는 붉은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별이 떨어지는 곳. 하늘과 땅이 맞붙는 지점.

그곳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거대한 의문의 괴물체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멸망의 어머니 ‘오무아무아’> -등급: ? / 특성: ?

-서식지: ?

-크기: ?

-?

‘저게 뭐지?’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대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멸망한 세상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것.

검붉은 빛에 휘감겨 있는 타원형의 길쭉한 그 모습은 마치 현세의 것이 아닌 양 기괴한 모습이다.

이름부터 외형, 설명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존재였다.

‘저런 몬스터가 있었다고? 아니, 대체 뭐야 여기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눈에 새로운 모습들이 들어왔다.

수없이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인간, 오크, 리자드맨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죽어 쓰러져 있다.

그중에는 얼굴만 봐도 누구인지 알 만한 유명한 랭커들도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의 산 앞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

온통 불타고 붕괴해 내리는 대지 위에서 최후까지 서 있는 그의 얼굴은 나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잖아?’

그것은 나였다.

회귀하기 전의 나보다 15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얼굴.

거의 50대로 보이는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눈앞에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하늘, 길게 그어진 붉은 궤적,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몬스터, 그리고 최후의 플레이어.

동시에.

쿠-구구구구……

몬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하늘의 붉은 궤적이 점점 더 짙어진다.

별똥별이 그어 놓고 간 긴 자국은 길고도 선명하게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때.

-띠링!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

.

*       *       *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모든 것을 깨달은 채로.

눈을 뜨자 불사조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완전해졌는가.]

그렇다. 비로소 완전해졌다.

역시 불사조가 내 회귀의 답을 가지고 있는 열쇠가 맞았다.

“……나는 회귀자가 아니었군.”

그렇다.

나는 15년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회귀자.

하지만 그 15년의 기억이란 원래 30년이었어야 했다.

30년 뒤 게임 서버가 멸망하는 그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와야 했던 나는 어째서인지 지난 15년의 기억밖에는 가지고 오지 못했다.

그마저도.

[그렇다. 너는 회귀를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이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딥러닝 AI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되고 예측된 미래값.

나는 그것을 전기신호로 주입받았고 마치 살아 있는 AI, 핵, 딥러닝 시스템 그 자체처럼 움직여왔던 것이다.

마치 ‘통 속의 뇌’처럼!

‘통 속의 뇌’란 무엇인가.

그것은 1981년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에 의해 제시된 사고실험이다.

우리의 뇌를 꺼내 통 속에 넣고 모든 외부의 자극을 전기 신호 등으로 만들어 뇌에다가 주입해서 뇌가 가상의 환경만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뇌 자신은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지 구분할 수 없다.

내가 게임 캡슐을 처음 사서 신체 싱크로율 체크를 위해 처음으로 한 뇌파검사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옹침(呂翁枕),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일몽(南柯一夢), 황량일취몽(黃梁一炊夢)이라.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뇌파 검사 속에서 나는 지난 30년의 미래를 딥러닝으로 체험했고 그 결과 회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예지력을 갖게 되었다.

[다만 나의 힘이 부족하여 그 기억들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었지. 애석한 일이다. 그것마저 있었다면 윌슨의 부정한 개입을 조금 더 빨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을…….]

미세하게 느껴졌던 나비효과들, 알지 못했던 미래지식들은 잃어버린 15년의 기억 때문에 발생한 변수였다.

……하지만 아직 변수가 남았다.

“그런데 왜 하필 나였어?”

내 질문에 불사조는 간단하게 답했다.

[미래 기억이라면 이 세계로 접속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전부 보여 줬다. 하지만 너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뇌파 검사에서 깨어나는 그 즉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지. 그만큼이나 기억하고 있었던 이는 너 하나뿐이다.]

“……그래? 왜지, 나는 그저 망생이었을 뿐인데.”

[너 자신의 잠재력을 믿어라. 플레이어라는 종족에게는 ‘인생의 특이점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라는 격언이 있던데.]

말마따나, 괴테는 불멸의 역작 ‘파우스트’를 82세에 완성했다나? 이처럼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참고로 너의 특이점은 15년 정도 흘렀을 무렵의 ‘그 순간’, 게오르그 필터값이 가장 폭증하던 바로 ‘그 순간’이더군. 아마 기억 보존이 그 순간까지를 기점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

[나 역시도 궁금하다. 어떤 상황이었기에 그렇게까지 기억에 깊은 번인(Burn-in) 현상을 남겼던 것이지?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감각을 준 사건이 대체 무엇인가?]

아…… 음…… 그게…….

‘아이템 강화하다가 깨트려먹은 사건이라고는 죽어도 말 못하지.’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이 세계에 대한 애정과 관심, 끈기? 뭐 그런 거지.”

[그런가.]

“그렇지.”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냐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사조의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지난 30년의 과거이자 미래를 내다보게 된 입장에서는 새삼 못 믿을 것도 없다.

불사조는 말을 이었다.

[과거나 현재는 허구적인 개념이지.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연속적으로 존재할 뿐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회귀와 기억 보존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 하나 정도는 이해했다.

그래, 우주의 끝도 노려보는 시대에 인간 뇌의 끝을 보는 것도 가능하겠지.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가 회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동일하며 나는 여지껏 과거나 미래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늘 현재를 살아내고 있었던 것.

데쟈뷰에 가까운 기시감을 미래 지식이라 착각해 가면서 말이다.

……뭐 아무튼.

태양이 떨어짐에 따라 지면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이로 인해 불사조는 이름값을 하며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이내, 불사조는 자신의 최후 특성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 특성을 발현하여 나에게 온전한 힘을 전해 주었고 그 결과 나는 15년간의 미래지식에 그 뒤의 15년의 미래지식까지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도, 나는 윌슨의 저의 역시 알아 버렸다.

놈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무고한 이들의 상상력을 착취했다.

김정은의 주장에 의하면 윌슨은 그렇게 만들어 낸 세상의 신으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1차원적인 해석.

모든 기억을 되찾은 지금도 그런 윌슨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저 멀리, 태양을 끌어들이고 있는 오무아무아에게 물었다.

윌슨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내게 대답했다.

[‘특이점(特異點)’이 온 모양이군. 너와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는 거대한 파멸을 움켜쥔 두 손을 내게로 뻗어온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 드리우는 멸망.

그것은 내가 일찍이 벨페골의 악몽 속에서 본 기억의 파편 그대로다.

하지만.

“아니.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악몽 속에서 마주했던 50대의 이어진과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특전과 아이템으로 무장한 상태.

그리고 내 뒤를 받쳐 주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번쩍!

나는 모든 기억을 되찾자마자 바로 히든 카드 한 장을 뽑아들었다.

불사조가 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특성은 지금껏 내가 모아온 모든 특성들과 호환, 연계가 가능한 것들.

지금부터 내가 기나긴 시간 동안 이룩해 온 성과들을 하나하나 꺼내 선보일 차례였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홍영화의 스크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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