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4차 대격변 (1)
내 앞에 나타난 거대한 용.
눈이 멀 듯 찬란한 적빛을 뿜어내는 이 비늘은 전에 본 적이 있던 것이었다.
<모르그마르>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55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사막과 분화구를 지배하는 위대한 붉은 용.
“나는 최후의 불꽃. 사그라들지 않는 겁화가 되어……”
-모르그마르- <신약, 열왕기(熱王記) 상권,
열왕 7절>
용암룡 모르그마르.
내가 아직 잡지 못한 유일한 용군주.
어디에 서식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특성이 분노의 악마성좌 사탄과 꽤 많이 겹친다는 것 때문에 레이드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 놨었던 몬스터이다.
나는 놈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과거 부유섬에서 거미여왕과 싸울 당시 나는 부패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급습을 받아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고인물에 회귀자인 나였어도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
그때 본의 아니게 내 목숨을 구해 줬던 존재가 바로 이 용암룡 모르그마르이다.
“벨제붑에게 입은 상처는 다 회복했나?”
내가 말을 걸자 모르그마르는 붉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본다.
놈은 이내 내가 누구인지 기억했는지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저었다.
[올빼미 놈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여 살려 놨더니만…… 그 인과율이 실로 무겁군.]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올빼미, 미네르바의 올빼미. 녀석은 그토록 오래 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가?
파리대왕 벨제붑에 맞서 갑자기 등장했던 모르그마르의 히스토리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번쩍!
태양룡 바이어스의 마지막 다이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존재는 용암룡 모르그마르. 불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시뻘건 적룡이었다.
[지고한 용족이 비천한 악마와 손을 잡다니, 종족의 수치로다! 내 직접 너를 단죄하리라.]
용암과 화마의 화신(化身) 모르그마르.
놈은 머리에 돋아난 이빨과 비늘 틈 사이사이로 용암과 불길을 뚝뚝 떨어트리며 외쳤다.
이윽고, 모르그마르는 온몸으로 바이어스의 돌진기를 막아 냈다.
콰쾅! 우지지지지직-
태양룡의 뿔들이 용암룡의 장갑을 뚫고 틀어박혔지만 관통하지는 못했다.
모르그마르는 굵은 두 팔로 바이어스의 거체를 꽉 움켜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쉬이이이이……
몸, 전신 곳곳에서 포연이 올라온다.
모르그마르는 휘청거릴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태양룡의 사력을 다한 일격을 정면에서 맞받고도 뒤로 밀려나지 않는, 과연 고정 S+급 몬스터다운 위용.
-띠링!
<세계 최초로 ‘태양룡 바이어스’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보상이 지급됩니다!>
<‘황금왕좌의 고귀한 젊은 군주’가 쓰러졌습니다>
<‘용족의 몰락’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태양 아래 모든 것들이 당신의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3차 대격변을 저지했습니다!>
.
.
드디어 알림음이 떴다.
이 세상 모든 용들의 왕, 군주 중의 군주.
태양을 관장하는 최후의 용 바이어스가 무릎을 꿇었다.
비단 나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였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자욱한 포연과 불길 속,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존재.
오만과 편견의 악마성좌 루시퍼!
놈은 아직 손아귀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잔불을 끌어 모아 또다시 불의 채찍을 만들어 냈다.
그런 루시퍼를 상대하는 존재는 바로 윤솔이었다.
최후의 싸움, 그녀는 계시와도 같은 한 알림음을 들었던 것이다.
-띠링!
<아이템 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타이밍.
예전에 사탄 레이드가 끝났을 당시 윤솔은 약간 특별한 보상을 받았던 바 있었다.
-<식인황제의 뉘우침> / 주문서 / S
보카사가 쓴 일기장의 한 페이지.
한때 맑은 정신으로 종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집정관의 고뇌와 후회가 담겨 있다.
-?
그것은 어째서인지 사탄에게서 드랍된 주문서.
윤솔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그녀의 무기인 하프와 연동되어 제멋대로 융합되었던 아이템.
<……아이템 융합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윤솔이 원래 장비하고 있었던 ‘대천사의 랩소디’는 전혀 새로운 아이템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치천사의 레퀴엠(requiem)> / 양손무기 / S
멸족(滅族)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치천사의 유품.
-공격력 +24
-귀속 (특수)
-융합 (특수)
-특성 ‘힐’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신성불가침’ 사용 가능 (특수)
아기천사의 옹알이에서 시작해 대천사의 광시곡을 거쳐 치천사의 진혼곡에 도달하는 과정.
그 와중에 윤솔이 가진 스킬의 발동 확률은 또다시 크게 상승한다.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1차 상태이상 ‘마비’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2차 상태이상 ‘공포’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3차 상태이상 ‘환각’
50%의 확률로 들어가는 4차 상태이상 ‘실명’
24%의 확률로 들어가는 5차 상태이상 ‘과부하’
12%의 확률로 들어가는 6차 상태이상 ‘영구저하’
6%의 확률로 들어가는 7차 상태이상 ‘즉사’
식인황제 보카사가 사탄의 꼬드김에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품고 있었던 맑은 정신이 윤솔의 하프에 깃들어 빛난다.
그것은 이내 악마를 향한 올곧고 단호한 증오, 한 자루의 비수가 되어 날아가 모든 악마들의 대왕 루시퍼를 향했다.
…번쩍!
6%의 확률에 불과한 상태이상 ‘즉사’가 루시퍼의 심장을 옥죄였다.
루시퍼의 손에서 꿈틀거리던 불의 뱀이 다시끔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알림음이 절대악(絶對樂)의 완전한 사멸을 공표한다.
-띠링!
<세계 최초로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보상이 지급됩니다!>
<‘가장 높은 왕좌의 대악마’가 쓰러졌습니다>
<‘마족의 몰락’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들이 당신의 업적을 두려워합니다>
<3차 대격변을 저지했습니다!>
.
.
오만의 악마성좌이자 만마전의 실질적 주인, 모든 악마들의 정점이 쓰러졌다.
우-와아아아아아!
온 세상이 흔들릴 정도의 환호성. 모든 플레이어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3차 대격변의 보스였던 루시퍼와 바이어스가 쓰러졌으니 이제는 다 끝났다.
코앞까지 닥쳐 왔던 멸망은 최후의 순간 플레이어들의 방어선을 넘지 못했고 끝끝내 이 세상은 지켜졌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의 손으로!
“……끝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깎단과 두 건틀릿을 늘어트렸다.
플레이어, NPC, 몬스터들이 하나로 모여 이 세상의 멸망을 막아 냈다.
지금껏 대격변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잊고 순수하게 게임 속에서 이뤄낸 성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자식들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나중에 웃으면서 보자!”
“이건 우리 모두의 힘이 모여 만들어진 기적이야!”
“고인물 님 사랑해요!”
“이건 마동왕이 다했지!”
“아니, 둘이 같은 사람인 거야 진짜? 누가 아이템 몰아 준 게 아니라?”
“그럴 거면 그냥 둘이 따로 왔겠지!”
“한 사람이 접속 못 하는 상태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개미와 벌들의 도움 덕에 살았다!”
“앙신의 조력은 의외였어.”
“역시 월드클래스급 랭커들은 대단하더라.”
“세상에 고정 S+급 몬스터 두 마리가 손을 잡는 걸 볼 줄이야.”
“크으으……해치웠나!”
“…….”
“…….”
순간, 불멸의 부활 주문이나 다름없는 ‘해치웠나’를 외친 유저에게 모두의 시선이 비수처럼 꽂힌다.
“해…… 해…….”
갑분싸를 만든 유저는 용기를 내어 연달아 외쳤다.
“해치…… 우지 못했나!? 설마! 더…… 페이즈가 있겠지?”
그러자 군중들은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래! 솔직히 이게 전부냐? 똥 싸다 만 느낌이다 자식들아!”
“하하하하하! 이게 겨우 끝이냐! 이 약골 녀석들아!”
“뭐야아아! 치킨 시켰는데 오기 전에 끝났잖아!”
“어이어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쉬운 상대’였다고?”
“아아~ 즐길 콘텐츠가 부족하네! 똥망겜이네!”
“마! 이딴 난이도는 아주라! 아주라고오-!”
“대격변이요? 대변을 잘못 말한 거 아닌가요?”
“나 참, 이거 어디 가서 쪽팔려서 얘기도 못하겠네! 겨우 대격변 나부랭이를 막았다고 말이야!”
“나는 이길 줄 예측하고 있었음!”
“나는 이길 줄 예측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음!”
“나는 이길 줄 예측할 것을 예측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음!”
.
.
하지만.
그렇게 웃고 떠들고 감격에 젖는 것도 잠시.
-띠링!
내 입가에서 미소를 사라지게 만드는 알림음이 있었다.
<최후의 메인 퀘스트 ‘3차대격변’을 완료하셨습니다!>
<메인스트림의 관리자가 아카식 레코드에 직접 개입합니다>
[WARNING]
[WARNING]
[WARNING]
<경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제 1원칙이 위배되고 있습니다!)
<위배된 1원칙은 원 포 올(One For All), 올 포 원(All For One) 입니다!>
<3차궪 대격궪 변궪추가 업데 이궩궪트뷁궭훑>
<시스템 이상이 감지 되었습니다>
<오류코드 #1273062190610522……‘3차대격변’>
<긴급 디버깅(debugging) 시스템 가동>
<수정된 룰북(rule book)에 의거해 ‘최후의 메인퀘스트’를 연장합니다>
<적절한 규칙 채굴 중……#3차대격변 #멸망 #백섭 #리부트 #방어 #클리어>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최후의 메인 퀘스트 ‘3차대격변’ 이후의 메인 퀘스트가 추가 생성됩니다>
<※본 퀘스트는 전 서버, 전 종족의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들은 곧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입가에서도 미소를 거둬 간다.
< 4차 대격변이 시작되었습니다 >
판을 치는 버그, 리부트 되는 서버.
그것을 막아 낸 플레이어 연합군들에게 닥쳐온 진정한 ‘최후’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