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화 3차 대격변 (2)
동북쪽에 위치한 필드 ‘악령 서커스단 야영지’, 석탄과 가스층에 불이 붙어 항상 불길과 폭발이 끊이질 않는 맵이다.
이곳에 등장한 존재는 오만의 군대를 이끄는 ‘대공작 단탈리안’, 위험등급 S랭크 최상위권 판정이 뜰 정도로 강한 악마형 몬스터이자 고정 S+급 몬스터인 루시퍼의 직속 부하이다.
노인, 젊은이, 어린아이, 여자, 남자, 미남, 미녀, 추남, 추녀, 뚱보, 홀쭉이, 흑인, 백인, 황인, 귀족, 노예, 부자, 거지, 영웅, 악당…….
자그마치 36개의 머리와 얼굴,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 악마는 인간형의 호리호리한 몸에 정장을 빼 입고 손에는 신사들이나 들 법한 지팡이를 들었다.
하지만 그 지팡이 속에는 악의로 담금질되고 증오로 벼려진 칼날이 시퍼런 빛을 숨겨놓고 있었다.
단탈리안은 한 자루 칼을 놀리며 유저들의 방어선을 뚫어 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으로 수많은 악마 대군을 몰고 들어왔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악마군을 막아선 이들은 단 두 명의 천상계 랭커.
유세희와 마태강.
‘눈 먼 처형인’과 ‘투신’이 오만의 군대를 이끄는 대공작 단탈리안을 막아 내고 있었다.
“오빠! 주변에 잡음들 좀 정리해 주세요! 패턴 좀 읽게!”
“오케이! 싹 다 태워 버린다!”
유세희가 외치자 마태강이 바로 움직였다.
쿠르륵!
마태강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열풍이 주변의 석탄과 가스들을 싹 날려버리자 곳곳에서 시끄럽게 끓고 터지는 소리들이 일순간 뚝 멎었다.
잡졸들이 내지르는 단말마를 끝으로 필드의 소음들이 가라앉았고 비로소 유세희는 단탈리안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
…싹뚝!
불카노스 대낫이 날아들어 단탈리안의 정장 옷깃을 베어냈다.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몰아치는 유세희의 목숨 추수!
9번의 강화를 거치며 더욱 더 단단해진 불카노스 대낫은 단탈리안의 지팡이 칼 ‘페르소나’와도 대등하게 맞붙고 있었다.
그리고 마태강이 그런 유세희를 엄호하며 불타는 주먹을 날려 보낸다.
그 모습에 유저들이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단탈리안을 겨우 두 명이서 막고 있어!”
“이거다! 이것이 한국 랭킹의 자존심이다!”
“우리도 가세하자!”
“발목잡지 않게 잘 해 보자고!”
힐러와 마법사 등의 원딜러들이 가세했다.
유세희와 마태강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각종 버프와 디버프, 힐 마법들이 시전되고 있었다.
근접 딜러나 탱커들은 마태강과 유세희의 동선을 꼬이지 않게 하기 위해 굳이 다가서지 않았고 대신 포위망을 구축하여 잡몹들이 단탈리안을 돕지 못하게 막기로 했다.
그러나.
“오빠! 이 자식 너무 쎄요!”
“큭! 뭐 이딴 몹이…….”
천하의 유세희와 마태강 역시도 S랭크 몬스터들 중 최상위권의 개체값을 자랑하는 단탈리안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특히나 탱커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단탈리안의 사기적인 물리공격력은 맞받아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으니까.
천천히 뒤로 밀리는 둘.
그에 따라 플레이어 연합의 방어선도 천천히 뒤로 밀리고 있었다.
“……젠장.”
마태강이 이를 악물고 항전했지만 이 지옥 같은 참호 속의 왕은 이미 정해졌다.
대공작 단탈리안, 그는 36개나 되는 얼굴 전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마태강과 유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함락 직전의 고지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뚝-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던 단탈리안의 칼 페르소나가 갑자기 허공에 뚝 멎는다.
“……?”
마태강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유세희는 지원군이 당도했음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주 강력한 원군이.
…파지지지지직!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던 단탈리안의 칼 페르소나에 떨어진 진짜 벼락이 강력한 뇌전 데미지와 함께 상태이상 ‘마비’를 건다.
공격하던 모션이 취소되는 즉시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나는 단탈리안.
그리고 이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친구. 힘들어 보이는데?”
이연호! ‘천재’라 불리는 마법사.
그가 마태강의 옆에 마도서를 펼친 채로 서 있다.
콰쾅! 콰쾅! 콰지지직!
연달아 떨어져 내리는 벼락줄기.
단탈리안은 36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칼을 고쳐 쥐었고 이내 정면을 향해 세게 찔렀다.
산조차 꿰뚫어 버리는 찌르기.
퍼-엉!
하지만 그것은 요란한 폭음과 함께 한 ‘장벽’에 가로막혔다.
“어허, 어딜 감히 몬스터 따위가 우리들의 고향을 넘보느냐.”
‘돌부처’처럼 서 있는 임요셉.
그가 두꺼운 방패를 든 채 단탈리안의 참격을 막아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속속들이 보이는 낯익은 얼굴들.
“어이, 두 명이서 다 해먹겠다는 거가?”
“좋은 건 나눠 먹자고.”
“이거 옛날 생각 나는구만.”
폭풍 홍지노, 쌍칼 이준호, 천지패황 류요원, 송곳 송병건, 귀족 최연석, 그리고 신창원, 유한방, 오달진, 장보람, 이근형, 오태식, 최무홍, 조현아…… 그 외 등등등.
옛날의 국K-1 멤버들을 비롯, 전국 각지의 한국 대표팀들이 모두 모였다.
더군다나.
“어우, 사람 많은 건 질색인데.”
“어쩔 수 없잖아 언니.”
“이번에는 우리들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도 손을 잡아야 하겠는데?”
금은동 자매.
“사부는 안 오시나?”
“일단 우리끼리 해 보자.”
“언젠간 오겠지 뭐!”
“아자! 아자! 버텨 보자 한번!”
박보연, 윤두나, 배수지, 박소담, 니아 멤버들까지!
한국 랭킹의 자존심들이 이곳 한 자리에 모였다.
그간 게임 세계를 떠나 있었던 이들까지도 오랜 친구들의 도움 요청에, 그리운 NPC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이 멸망해 가는 세계로 되돌아왔다.
“좋아! 다시 해 봐요 오빠!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 추억을 불사르는 거야!”
“알겠어. 근데 나는 6대주리그 우승 때문에 군대 면제라고 몇 번을 말하니.”
유세희와 마태강이 다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뒤로 수많은 한국 랭커들이 힘을 보탠다.
그 뒤의 뒤로 수많은 한국 유저들이 거대한 성원을 보내오고 있었다.
힐과 버프, 원딜과 탱 서폿으로 인해 유세희와 마태강의 스탯이 말도 안 되는 증가폭으로 상승한다.
반면 각종 디버프와 집중포화로 인해 단탈리안의 움직임에는 제동이 걸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S랭크 최상위권의 초고위악마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수의 일점사 대상이 된다면 별 수 없다.
콰콰콰쾅!
대공작 단탈리안이 결국 성벽 바깥까지 밀려났다.
그를 따르는 악마병들은 전부 다 가루가 되거나 아니면 지휘관급 악마들을 따라 허둥지둥 도망친다.
“이겼다! 놈을 몰아냈어!”
“우리가 이겼다고!”
“그 단탈리안을 후퇴시켰다!”
플레이어 연합은 방어선을 지켜낸 것에 열렬히 환호한다.
……하지만 그 환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쿵!
잠시 주춤하는가 싶었던 몬스터 웨이브가 다시 약동하기 시작했다.
“……어? 뭔가가 좀 다른데?”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전장의 분위기를 제일 먼저 눈치 챈 이는 바로 유세희였다.
아니나 다를까.
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떨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벼락이 플레이어 연합을 휩쓴다.
벼락은 땅에 떨어져 닿은 뒤에도 계속해서 꿈틀거리며 지면을 활개 쳤고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들을 집어삼켰다.
마치 뱀의 혀처럼 꿈틀거리는 불기둥.
우수수 리타이어되는 목숨들의 향연.
그것은 거대한 한 줄기의 채찍이었고 그 끝을 타올라 간다면 먹구름 위에 군림하고 있는 채찍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냉혹한 인상의 미남자.
흡혈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흡혈귀 따위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고한 경지에 닿아 있는 존재.
<루시퍼>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3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오만과 편견을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트렸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나를!”
-루시퍼- <구약, 이사야서(ספר ישעיהו書) 23:66>
오만의 악마성좌 루시퍼가 이 세상에 강림했다.
모든 플레이어들을 좌절시키는 자.
하지만! 한국 랭커 연합에게는 이 강대한 적 앞에 오롯이 절망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콰콰쾅!
또 다른 ‘멸망’이 루시퍼의 반대쪽에서 그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어스>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108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위대한 황금 용.
“비록 태양이 사라져도 한 줄기 빛이 있으리라.”
-바이어스- <구약, 명왕기(明王記) 하권,
명왕 108절>
뎀 유니버스의 총수 윌리엄 링트 윌슨이 일으킨 3차 대격변.
그리고 그 거대한 멸망의 핵심 주역인 두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보자 마을, 어머니의 땅 유토러스를 중심으로 동북쪽의 루시퍼, 그리고 남서쪽의 태양룡이 서로를 마주본다.
모든 것이 불바다로 변해 버린 대륙.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이끌고 온 이 악마성좌와 용군주는 그저 무감정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 하나를 위한 모두(All For One).]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늘어놓으며 말이다.
“아아…….”
어디선가 탄식이 새어나온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그 절망은 이내 샘처럼 치솟았고 해일이 되고 풍랑이 되어 모두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공포. 코앞까지 닥쳐온 멸망.
그 누가 이 압도적인 누미노제(Numinose)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막 빠져나가려 할 때.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굳고 강인한 신념이 배어 있는 그 목소리에 대중은 꺼져 가던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다잡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 무너져가는 중앙 광장의 시계탑 위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영웅을 필요로 하지만.”
검은 망토를 휘날리고 있는 남자.
“영웅은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바로 페이사 릴레사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속속들이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은다면 이 혼란 역시도 극복되리라.”
전 세계 통합랭킹 1위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호호호, 잠시 PPL타임~ 우리 기업 핵폭탄 사세요 여러분들~”
전 세계 통합랭킹 2위 비앙카 트럼프.
“힘을 하나로 모읍시다! 연대합시다!”
전 세계 통합랭킹 3위 페이사 릴레사.
“발목만 잡지 마라, 이 약해빠진 것들아.”
전 세계 통합랭킹 4위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그리고 이 외, 각 여섯 대륙의 챔피언스 리그를 걸어왔던 수많은 다른 영웅들 역시도 모습을 내민다.
‘월드클래스(World class)’, 대간판 급 랭커들이 모두 모였다.
각자의 길드, 각자의 레이드, 각자의 팀과 파티를 이끌고!
아키사다 아야카가 이끄는 일본 길드와 장마오 쉰이 이끄는 중국 길드, 카렐린 강이 이끄는 러시아 길드 등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은메달리스트들 역시도 당연히 참전한다.
전 세계의 모든 핵심 전력들이 이곳 어머니의 땅에 모두 모여 있는 광경.
각국의 왕좌를 놓고 싸우다가 ‘은메달’에 그친 쟁쟁한 영웅들까지 모두 집결하자 그 수가 상당하다.
그 광경을 본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벅차오르는 고양감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우리들의 고향은 우리들의 손으로!
이 단순한 일념 하에 모든 이들은 하나가 된다.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 하나를 위한 모두(All For One)!”
이 구호가 플레이어 연합군에서도 터져 나왔다.
모두가 대중, 모두가 영웅.
바야흐로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