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54화 (854/1,000)
  • 854화 2.5차 대격변 (3)

    나는 곧장 뎀 유니버스의 본사로 소환되었다.

    뎀 유니버스의 본사는 캘리포니아 남부 도시 어바인시에 위치해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본사 건물의 심장부를 향해 가는 길.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여전히 위축되기는 매한가지다.

    뎀 유니버스 본사 안은 예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깔끔한 건물, 아기자기한 내부 인테리어, 모노레일이 오가는 철길과 카누들이 둥둥 떠 있는 수로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주변을 돌아다니던 7세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싹 다 사라졌다는 것 정도?

    “……아니, 어린애들만 사라진 게 아니네?”

    사람 자체가 한 명도 없다. 보안부터 안내까지 전부 다 인공지능이 하고 있을 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끔 후줄근한 티에 초췌해 보이는(누가 봐도 프로그래머들이다) 얼굴을 한 이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제외한다면 내부에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기괴할 정도로 커진 야자수만이 잎사귀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예전처럼 두 개의 박물관과 한 개의 생태공원, 그리고 그 사이 새로 지어진 두 개의 도서관 건물을 통과해 윌슨의 거처로 향했다.

    그래도 건물 안쪽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도 상당히 바빠 보였다.

    아마 조디악이 일으킨 문제 때문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걷자 이윽고 윌슨의 거처가 보인다.

    작은 크기이긴 하지만 핵폭탄이 떨어져도 버텨낼 수 있다는 윌슨의 돔.

    실로 복잡한 패턴의 잠금장치를 몇 겹이나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갤러리 형식의 내부, 제목모를 그림들이 수없이 걸려 있는 벽.

    돔 모양의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들린 것은 앳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서 와.]

    허공에서 홀로그램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이번에는 100살은 되었을 법한 노인의 모습. 예전에 만났을 때는 분명 10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 같았었는데 말이지.

    내가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윌슨은 피식 웃었다.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나는 것은 오랜만인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윌슨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만을 만난다고 들었다.

    한번 만난 이는 절대 두 번 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괴벽 중 하나로 그것은 가장 최측근의 비서진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죠?”

    [게임을 좋아하면 됐지 외모가 뭐가 중요해?]

    말을 마친 윌슨은 내 앞에서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어마어마하게 뇌쇄적인 몸매의 9등신 미녀가 되는가 하면 전신의 근육들이 터져나갈 듯 우락부락한 덩치 남자로 변했다가 다시 3살 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100세는 넘었을 법한 꼬부랑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 다크서클은 뭡니까?”

    윌슨이 변하는 어떤 인종, 어떤 성별, 어떤 외모의 사람이든 간에 두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 역시도 예전과 달리 마냥 밝지만은 않다.

    어딘가 근심이 녹아들어 있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내 예상대로 윌슨은 약간 시무룩해진 어조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힘들어서 그래 힘들어서.]

    “힘들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잠을 거의 못 잤지. 요 일주일간 1초도 못 잤어. 피곤해 죽을 것 같아.]

    일주일간 잠을 못 자다니. 나도 예전에 어릴 적에 몇 번 게임하다가 그렇게 해 봤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사흘을 못 넘기고 기절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윌슨이 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초인플레이션(超inflation)’

    현재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의 세상은 거대한 대공황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을 넘어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

    윌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주일 만에 대비 물가가 50%이상 상승했어. 딥러닝으로 계산해 보니 이대로 가면 한 달 뒤에는 물가가 100배 이상 뛴다고 하더군.]

    그야말로 끔찍한 소리다.

    5천 골드도 하지 않는 빨간 포션의 값이 나중에는 50만 골드가 된다니.

    하지만 단순히 인플레이션만 문제가 아니다. 시중에 풀려 있는 엄청난 양의 돈 중 거의 대부분이 위조화폐라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와, 나중에는 똥 싸고 나서 휴지가 아니라 지폐로 닦는 게 더 싸겠네요.”

    [……꼭 싸는 것에 비유해야 했니?]

    윌슨은 내 눈앞에서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동상으로 변해 보인다.

    그래도 장단은 맞춰 주려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뭐 때문에 저를 부르셨죠?”

    내가 본론을 꺼내자 윌슨 역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 내 앞에 앉았다.

    [위조지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GM들에게 알려 주지 않겠어?]

    윌슨의 태도는 전에 없이 간절하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위폐를 구분하는 방법은 회귀 전 GM들이 발견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하지만 회귀 전에 돈 복사 버그를 퍼트렸던 이는 김정은 하나 뿐, 그녀가 일으킨 소동은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니었고 따라서 GM들은 차분하게 대응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 회귀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에 김정은은 조디악과 손을 잡았고 그 때문에 소동의 규모는 말도 안 되게 커져나갔다.

    결국 GM들이 차분히 대응책을 찾을 여유조차 없이 전 서버의 경제가 대공황 상태로 빠져 버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위조지폐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불사조’는 윌슨의 의지에 대립되도록 만들어진, 즉 ‘정반합(正反合)’의 ‘반(反)’에 해당하는 존재.

    그러니 윌슨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기업 총수를 비롯한 그 어떤 누구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 안에 직접적인 간섭을 할 수 없도록, 모든 이들이 게임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강령을 위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윌슨은 이제 태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 세계를 지키고 싶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이 공간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고. 힘을 빌려줬으면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다.

    부유섬에서 벨제붑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에서 시작해 불사조와 레비아탄의 대립, 사탄의 유혹, 조디악의 뱀 같은 속삭임.

    그리고 선악과(善惡果).

    나는 뱀과 신 사이에 놓인 이 금단의 과실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저도 모릅니다.”

    나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것이 잘 하는 짓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결과적으로 조디악의 손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조디악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만한 반인륜의 결과물.

    아무리 많은 이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도 그것이 소수의 억울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는 반대한다.

    물론 그것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뱀의 말에 속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낙원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독사의 간교한 혓바닥에 놀아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잃어버릴지, 아니면 진실의 눈을 뜨고 나 자신을 비로소 마주볼 수 있게 될지.

    그것은 ‘선택’ 특성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편.

    내 거절 아닌 거절을 들은 윌슨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본다.

    이윽고, 그는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한 채 나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듣고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동시에, 거대한 뱀의 모습은 순식간에 우람한 근육질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신의 모습으로 변한다.

    마치 창조주와 같은 후광을 뿜어내는 윌슨.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나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어. 태양이나 구름, 바람과 땅. 이처럼 그 자체로 완전하며 당연한,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불변의 개념을 증명하려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저는 딱히 당신에게 뭘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모르는 걸 모른다고 했을 뿐이에요.”

    내 대답을 들은 윌슨은 창조주의 모습을 일그러트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흡사 큰 머리에 큰 눈, 가느다란 몸체를 가진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너에게 나의 신념이나 사상을 말해 줄 수도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지. 원 포 올(One For All), 올 포 원(All For One). 나는 모두를 위해 더 큰 목표를 세우고 있는 중이야.]

    동시에.

    윌슨은 내 앞에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현신했다.

    그 모습은 바로 조디악의 모습이었다.

    나는 뜨끔했지만 애써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윌슨은 내 표정변화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세상을 좁게 보는 놈들은 절대로 이해 못하지. 자기가 입은 사소한 피해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놈들 말이야.]

    그는 조디악에서 김정은으로 모습을 바꾼다.

    [자살교의 교본을 기억해?]

    “……!”

    내가 두 눈을 크게 뜨자 윌슨은 김정은의 얼굴로 배시시 웃는다.

    [그 빨간 책은 내가 만든 거야.]

    ‘김정은이 만든 게 아니었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윌슨은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그럴 리가. 내가 만들어둔 NPC코드인걸. 좀도둑들은 그저 그것을 훔치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지.]

    동시에. 그는 내 눈앞에 놀라운 모습을 드러낸다.

    불사조.

    눈부시게 환한 미네르바의 올빼미로 변한 윌슨은 내 두 눈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너 역시 나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을 거야. 오직 너만이 나에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선택. 끊임없이 강요받는 양자택일의.

    나는 윌슨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중립국’을 말할 수밖에 없던 어느 광장의 청년처럼, 나는 계속해서 같은 대답만을 말할 뿐이다.

    “……모릅니다.”

    그러자.

    윌슨의 눈동자에 타오르던 불꽃이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이내.

    그는 마지막으로 변신했다.

    바로 나. 이어진의 모습으로.

    나는 나를 마주보게 되었다.

    나도 나를 마주보게 되었다.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변한 윌슨은 내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어서 너를 부른 게 아니야.”

    “……?”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힘이 없었을 뿐이지.”

    동시에, 그는 맑게 웃었다.

    하지만 내 얼굴이라서 알 수 있는, 어딘가 슬픈 미소.

    “오늘의 네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를 평생 잊지 말고 기억해.”

    처연하게 들려오는 윌슨의 말.

    그것이 암시하는 바를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백섭(Back server).

    지금껏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백섭이 서버 전체를 밀어 버리려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