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52화 (852/1,000)
  • 852화 2.5차 대격변 (1)

    대중매체 속의 멸망은 어떤 식으로 시작될까?

    천천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멸망으로 향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 수많은 영화, 만화, 소설.

    과학자들의 위기 어린 표정? 스멀스멀 어두워지는 밤하늘? 떼를 지어 대피하는 야생동물들? 먹통이 되어 가는 전자기기? 뉴스 속 대통령의 긴급담화? 천천히 무너져 가는 문명?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복선도, 개연성도 없이 도래한다.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2.5차 대격변’이라는 것도 시작은 간단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이 풀려나오는 돈.

    출처가 불분명한 게임머니가 갑자기 시장으로 쫙쫙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10골드에 1원 정도의 환율을 유지하고 있었던 환전소가 제일 먼저 타격을 입었다.

    저렴한 가격에 계속해서 게임머니들을 팔아치우는 의문의 암흑상인들.

    그들이 출현한 직후 게임 속 화폐의 가치는 가면 갈수록 떨어져 종국에는 20골드에 1원, 50골드에 1원, 100골드에 1원, 500골드에 1원, 1000골드에 1원…….

    게임머니의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게임 안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주식들도 대거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드문 312,300 ▼3,000>

    <미라클파츠 1,680 ▼120>

    <레고캡슐 5,110 ▼250>

    <성은게임즈 1,250 -0>

    <뎀 코리아 1,113,050 ▼30,000>

    .

    .

    게임머니를 팔아가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다크 게이머들이 몰락하고 그 뒤를 이어 헤비 게이머들 역시도 아이템 판로가 막히고 게임머니를 환전할 곳을 잃어버렸다.

    지독한 인플레이션(Inflation)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의 온 세상을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검은 목요일, 1929년의 ‘대공황(Depression)’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게임 산업을 주력 핵심 국가 산업으로 밀고 있던 수많은 나라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특히나 가상현실 게임 사업에 값싼 노동력을 투입하여 경제성장을 꾀했던 제3 세계 쪽은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누가 돈을 풀었나?’

    사회의 지배계급들이 관심을 갖는 1차적인 문제는 이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2차적인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뭐가 진짜 돈인가?’

    이 압도적인 양의 화폐들은 분명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능력이 있는 이들은 없었다.

    “이거 진짜 돈 맞아?”

    “어차피 구분도 못하는데 뭐 어때?”

    “망했다! 얼마 전에 현질했는데!”

    “아이템 재고가 너무 많이 쌓였는걸…… 그렇다고 가짜 돈 천지인 판국에 팔수도 없고.”

    길드거래소의 플레이어들과 NPC들은 모두 난색이다.

    게임 커뮤니티는 허구한 날 폭파되고 있었다.

    -아 진짜 돈복사 버그 뭐냐 이거ㅡㅡ

    -어떤 색기가 이딴 짓 벌인 거여????

    -환전소 다 망함?

    -진짜게임머니제일싼곳WWW...☜

    -회사 망했다...문 닫는다ㅠㅠ

    -길드도 망했다...문 닫는다ㅠㅠ

    -진짜돈이랑 가짜돈 구분할 수 있는 방법 없나여?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이거 복사돈이 풀린게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데...

    -아니, 여기 서버는 왜 허구한 날 터짐????

    -운영자가 서버비 게임머니로 충당해 돌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인플레 터지면서 서버도 망함ㅋㅋㅋ

    -도랏네 진짜;;;GM은 모하냐 이 사태 빨리 해결 안하고~

    -응 꼬우면 접어~

    -응~ 꼬접한다ㅅㅂ

    .

    .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나는 분쟁과 좌절, 절망과 다툼. 진흙탕 쌈박질.

    그리고 그것은 유다희가 시장으로 있는 그레이 시티도 피해 가지 못할 일이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가 완전한 사화산으로 돌아간 이후 평화로워진 그레이 시티에는 고래고래 고함치는 몇몇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으음.”

    시장 집무실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유다희는 난감한 기색이다.

    시청 앞에서는 연신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 유다희는 약속한 아이템들을 지급하라! 지급하라!”

    연금술사 계열의 플레이어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급기야 어떤 플레이어는 큰 나무상자를 여러 개 쌓아올려 연단을 만들어 버렸다.

    제일 앞에 나와 있던 염소수염의 남자였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기계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뎀 세계관에서는 꽤나 보기 힘든 기계로, 그가 꽤 높은 레벨의 연금술사 플레이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매우 숙달된 고급 연금술의 복잡미묘하고 효율적인 논리적 육성 증폭 장치> / 양손무기 / A

    -연금술사의 집념은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냈다.

    이 물건의 꽁무니에 입을 대면 나팔과도 같은 앞부분에서는 천둥 같은 목소리가 나는 것!

    전설에 따르면 이 도구로 이야기할 시 아카식 레코드에 그 말의 글자 크기가 2pt 확장될 뿐만 아니라 서체까지 진지하게 바뀌어 기록된다고 전해진다.

    -특성 ‘고성방가’ 사용 가능

    “아, 아!”

    염소수염은 모두의 이목을 모았다.

    그렇다. 이것은 그냥 고작 확성기.

    그러나 ‘그냥 확성기 아냐?’라고 물으면 연금술사 플레이어들이 길길이 날뛰는 매우 하이테크놀러지의 확성기였다.

    쓰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패션템’ 내지 ‘룩딸뎀’이었던 것이다.

    “들리나? 아아, 원투쎄, 아아.”

    염소수염의 말이 좌중을 훑자 시장실의 창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연금술사 플레이어들이 점차 그를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건 정말 심각한 사태입니다. 모두 슬라임 젤리를 베이스로 하는 아이템 조합을 위해 오랜 시간을 머리 싸매지 않았습니까! 저만 해도 이 조합 퀘스트에 50일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연금술사도 손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난! 난 55일이라고!”

    “나는 8주야 8주! 어딜 55일을 들이밀어!”

    “8주면 56일 아냐? 그럼 나랑 차이도 없구만!”

    “어허, 둘 다 그만하세요! 저는 무려 79일이나 조합 퀘스트를 성공시키려 매진 중입니다!”

    “찌랭이들은 그만 쉿! 79일 너도 쉿! 나는 123일이다, 이 말씀이야!”

    “난 무려 반년이야 반년!”

    “전 어제 시작함! 쿠쿠, 흐흐, 죄송!”

    “나도 90일째 깨는 중이야……. 제발…….”

    주변에서 성토가 이어지자 염소수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확성기가 분명한 물건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동지들이여.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질문! 묻겠습니다. ‘연금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눈치 없는 초보 연금술사 플레이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정량! 정량이죠 정량! 완벽한 정량을 따라야 한 치 오차 없는 조합물이…….”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연금술 고인물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에이……쟤 어느 길드 소속이야?”

    “정량? 정량은 기본이지 기본! 그게 중요하냐?”

    “라떼는 말이야~ 모기 눈알 34개! 하면 바로 손으로 한 움큼 집고 그랬어! 딱 맞았지!”

    “엥이, 쯧쯧! 이래서 뉴비들이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이것이다.

    대부분 연금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물으면 당연히 ‘정량’이라고 대답한다.

    1g의 오차로 사랑의 묘약이 사망의 묘약이 되는 게 연금술인 만큼 대중의 인식 속에서는 그 절대적인 양을 맞추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고인물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말이다.

    양궁 선수들에게 ‘양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똑바르게 시위를 당기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양궁 선수들은 기가 찰 것이다.

    왜냐하면 시위를 바르게 당기는 것은 양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따로 있다.

    얼굴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중년 연금술 플레이어가 거칠게 일갈했다.

    “신선도야 신선도! 어이 젊은 친구! 연금술사답게 행동해!”

    그러자 손을 번쩍 들었던 초보 연금술사는 꾸물꾸물 다시 군중 속으로 돌아간다.

    연단에 선 염소수염의 남자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자자, 흥분하지 마세요. 맞습니다. 연금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선도죠. 유일하게 연금술사의 실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재료의 신선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슬라임 젤리와 함께 솥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재료들이 각자의 공방에 있지 않습니까?”

    염소수염 남자의 말에 다들 번쩍 정신이 드는지 더욱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야! 젖거미의 오른쪽 네 번째 다리는 금방 상한다구! 적어도 삼 일 내로 돌아가야 해!”

    “……그러게! 내 정신 좀 봐! ‘뿔없는코뿔소’의 뿔을 그냥 선반에 올려놓고 왔는데!”

    “큰일 나! 이거 오늘 안에 젤리 못 받아 가면, 설사약이 혓바닥 염색제가 되어 버려! 무려 공작이 준 퀘스트란 말이야!”

    “이거 어떡하냐! 이럴 때가 아닌데!”

    신선도는 비단 조합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선도를 유지 못해 쓸모가 없어져 버린 재료는 고스란히 연금술사 플레이어들의 손해가 된다. 구입액 그대로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재료를 사는 데도 차질이 빚어진다.

    의뢰를 실패하면 신뢰도도 떨어져 수주가 잘 들어오지 않게 된다.

    결국 악순환의 연속.

    연금술사는 본래 ‘스노우 볼링(작은 이득을 천천히 불려 나가는 행위를 뜻하는 게임 용어)’을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피해가 큰 것이다.

    자신들의 위기를 직감한 연금술사 플레이어들이 더욱 아우성쳤다.

    “이봐아아아! 시자아아앙!”

    “우리 죽이려고 환장했어?”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시장 나오라 그래! 시장!”

    “얼굴만큼 심성도 독한 년이군!”

    그러자 유다희가 발끈해 창문을 열어 젖혔다.

    손에는 딱 보기에도 살벌해 보이는, 그리고 언제든 투척 가능해 보이는 손도끼가 들려져 있다.

    “뭐? 얼굴만큼? 마지막 새끼 나와!”

    “…….”

    “…….”

    모두의 눈길이 유다희를 향했다.

    누군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안에……있었네?”

    “……아차!”

    유다희가 다급하게 목을 움츠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동안 시청 문과 창문을 굳게 닫는 걸로 잠수 타던 것을 그만 망쳐 버렸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안에 있었네?”

    “뭐야 안에 있었어?”

    “안에 있잖아! 우릴 속였어!”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안에 있었네?”

    기세를 몰아 제일 앞에 나와 있던 염소수염의 남자가 유다희의 집무실 창문을 향해 외쳤다.

    “이봐! 유 시장! 저번에 주문했던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가 왜 아직도 안 도착했냔 말이야!”

    그러자 유다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창 아래를 향해 말했다.

    “혀, 현재 환율의 영향으로 인해서 수출품들의 가격과 관세를 재조정하는 과정에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주셔야…….”

    “그럴 것 없다고! 여기 돈 싸들고 왔으니까 물건 내어 달라고오!”

    “그게 위조화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잖아요.”

    “아니 그럼 계약 내용을 불이행하겠다는 거야!? 뭐 저딴 년이 다 있어! 야 이년아! 너 이리 내려와 봐! 칵 기냥……!”

    염소수염은 저 위에서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다희를 향해 주먹질에 발길질에 아주 난리도 아니다.

    유다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계약서에는 분명 오늘 물건을 출고하기로 되어 있기는 한데…… 뎀 속의 시장경제가 이 모양인 상황에 어떻게 물건을 팔아요.”

    “아 글쎄 패치만 되면 위조지폐는 자동으로 싹 소멸한다니까! 그리고 뭐가 걱정이야! 내가 가져온 대금은 다 진짜 게임머니인데!”

    염소수염은 수레에 가득 쌓여 있는 금화와 지폐다발들을 팡팡 치며 외친다.

    그리고 이때다 싶었는지 다른 장사꾼들 역시도 서운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님! 너무하십니다! 우리가 거래한 세월이 얼만데!”

    “저희가 가져온 건 진짜 리얼 골드라니까요? 절대 위폐가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제발! 나중에 긴급패치 이후에 위조지폐들 싹 다 소멸해도 제 돈은 남아있을 거라구요!”

    “만약 나중에 위조지폐로 판정나면 200% 환불해 드릴 테니까 제발……!”

    다들 진실 되고 애절한 태도로 유다희에게 동정과 자비를 구한다.

    자기들이 가져온 돈자루에 담겨있는 것은 위조가 아닌 진짜 골드라고 읍소하는 이들.

    유다희가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거 다 가짜구만 뭘.”

    염소수염을 비롯한 장사치들의 가슴에 싸늘한 비수를 박는 한마디가 있었다.

    유다희의 옆에서 쑥 튀어나온 알몸의 남자.

    고인물. 동시에 위조지폐 감별사.

    바로 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