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51화 (851/1,000)
  • 851화 내 이름을 걸고 (2)

    …콰쾅!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폭음.

    중앙대륙에서 가장 큰 검투사 홀인 ‘베르세르크 콜로세움’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이 거대한 건물의 실소유주인 스크루지 공작이 일주일간 대여를 허가한 지금, 이곳은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한데 모여 발을 구르고 함성을 지르는 축제의 장이 된 상태였다.

    모두의 시선이 꽂혀있는 중앙 전장.

    붉은 피가 흘러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다.

    승자는 큰 칼을 쓰는 오크 족 플레이어 ‘김피에취한달빛(15)’, 패자는 채찍을 쓰는 인간 족 플레이어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52)’으로 정해졌다.

    김피에취한달빛은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이겼다! 레벨 20구간의 챔피언이 될 사람은 나야 나!”

    반면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은 침울하기 그지없다.

    “……허허, 열정만 가지고는 역시 안 되나. 아들레미 볼 낯이 없구먼.”

    하지만.

    “‘김피에취한달빛’님은.”

    “저희와.”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

    심사위원 4명의 대답은 냉정했다.

    고인물, 마동왕, 윤솔, 드레이크가 한 자리에 모여 점수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김피에취한달빛>

    -체급 내 피지컬: 7점

    -체급 내 숙련도: 3점

    -잠재력: 2점

    -태도: 1점

    총합 13점.

    반면 패자인 쪽의 점수는 오히려 승자의 것보다 높았다.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

    -체급 내 피지컬: 6점

    -체급 내 숙련도: 8점

    -잠재력: 6점

    -태도: 9점

    총합 29점.

    솔루션 커트라인인 25점을 겨우겨우 넘는 수치였다.

    그러자 김피에취한달빛은 맹렬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말이 됨? 내가 이겼는데 왜!?”

    그러자 네 명의 심사위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김피에취한달빛님은 피지컬은 좋지만 가지고 있는 특성들의 숙련도가 너무 떨어집니다.”

    “아마 이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급하게 메타를 변경했거나 자기 아이템이 아닌 것을 빌려오는 등 편법을 취했겠죠. 아니면 현질을 했거나요.”

    “잠재력 부문에서도 좋은 점수를 드릴 수 없습니다. 플레이 타임이 적은 것으로 봐서는 앞으로의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경기 중간, 넘어져 있는 자신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준 상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역습을 가하는 부분에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상대방이 자꾸만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패드립을 박는 모습도 스스로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고인물, 마동왕, 윤솔, 드레이크가 각각의 평가를 남긴다.

    그러자 김피에취한달빛은 빼액 소리를 지르더니 경기장을 나가버렸다.

    “이딴 게 어딨어! 오늘을 위해 문화상품권 다 질러서 템 샀는데! 학원 쨀 때마다 틈틈이 버스 타서 레벨 맞추느라 개고생했단 말야! 아아아! X발 느금마 만수무강!”

    바로 인성을 드러내더니 로그아웃해 버리는 녀석이다.

    반면.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님은.”

    “저희와.”

    “함께…….”

    “가시죠.”

    심사위원 4인은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을 향해 손을 내민다.

    바닥에 푹 주저앉은 채 한숨을 쉬고 있던 그는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눈물 글썽이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저, 정말 제가 위로 올라가는 겁니까? 리그에서 졌는데도요?”

    그러자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고인물이 대답했다.

    “승패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항목들의 점수죠. 그러니 지더라도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펼쳐 보여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마고리그 101, 나를 뽑아줘!>,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리그 중 하나이다.

    ID ‘국민학교급우덜헤쳐모엿’. 아니, 올해 52살의 곽춘봉 씨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승자 인터뷰 화면에 대고 외쳤다.

    “아들아! 여보! 나 위로 간다! 상위 리그로! 야호! 동창회 녀석들아 보고 있냐!”

    세대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요즘 관계가 서먹해진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이번 대회에 참가한 아버지.

    대회 나가 봐야 바로 떨어질 게 뻔한데 동네 창피하게 왜 나가냐고 타박하는 아내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남편.

    그 나이 먹고 뭘 하겠느냐며 자조적으로 비웃었던 동년배 친구들.

    하지만 결국 곽춘봉 씨는 눈물어린 합격 목걸이를 받고야 말했다.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멋집니다 형님. 스웩 있어.”

    고인물 모드로 앉아 있는 내 귀에 속삭이는 마동왕 모드의 유창이다.

    나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오래 전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형 누나, 선배들이 거의 다 보인다.

    생활고, 아내의 등쌀에 게임을 접어야만 했던 형님들.

    육아, 남편의 눈치 때문에 사랑하는 이 세계를 떠났던 누님들.

    가지각색의 사정들로 인해 결국 한계를 넘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던 수많은 선배들이 아직 여기에 파릇파릇한 새싹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회귀하기 전, 마지막 기억까지 끝끝내 남아 있었던 든든한 버팀목들 역시도 보인다.

    아직 미숙하고 어리숙한 뉴비의 모습을 벗지 못한 상태로 말이다.

    이 모든 사람들을 내 산하로 끌어 모았다.

    어떻게 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 그렇게 해서 올린 레벨 구간대에서 가장 효율적인 아이템은 뭔지, 어디에 있는 맵으로 가서 무슨 몬스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어떤 스킬을 습득하고 어떤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지.

    모든 공략법은 레벨에 맞게, 장비에 맞게, 그리고 그 사람의 성향에 맞게 솔루션으로 주어진다.

    “ZI존전사123이라는 닉을 쓰고 있습니다! 그, 그런데…… 정말 이 아이템들 저 주시는 겁니까?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받아도 될지 후,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제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반드시 갚고야 말겠…….”

    “안녕하세요? 저는 T없이맑은아E입니다! 정말 그 맵으로 가면 히든 던전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아휴, 당연히 못 믿는 건 아니구요. 너무 뜻밖이라서요. 저기 제가 맨날 가든 필드인데 설마 그런 곳에 히든 던전이 있을 것이라고는…… 앗? 네네 목소리 낮출게요, 저만 알고 있으라구요? 어떻게 해…… 저 지금 너무 감동받아서 저절로 목소리가 막 높아지…….”

    “예 선배님! 이번에 10레벨 체급대에서 우승한 ㅎr늘빛사랑™입니다! 예쁘게 봐 주십시오! 예? 저는 딱히 장비가 필요 없다구요? 하하, 제 피지컬이 좋긴 하죠. 예? 아이템보다는 더 지옥같은 피지컬 훈련을 시켜 주시겠다구요? 얼마든지요! 저 괴롭힘당하는 거 좋아합니다! 특히나 고인물 선배님에게라면 얼마든지 더 채찍질당해도…….”

    “오빠! 소듀맛캔듸에요! 진짜 평소에 너무 팬이었는데! 특유의 3.3.7 덜렁스탭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니 너무 기뻐요! 사랑해요! 이제부터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될…….”

    “……딸7I겅듀ღ다.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한다. 한데 내가 마침 필요로 하고 있던 이 히든 피스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또 내가 마침 이걸 딱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그대는 마치 나의 소울을 들여다본 것처럼…… 유어 마이 데스티니…….”

    다들 자기 자신보다 자기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의 솔루션에 기쁨에 찬 경악성을 내뱉는다.

    나는 피식 웃을 뿐이다.

    ‘어떻게 알긴. 내가 전생에 당신들의 베프였으니까 알지.’

    베스트 프렌드. 위급한 상황에 언제나 내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이번 생에서는 내가 그 빚을 갚을 차례다.

    ‘참, 그때는 거목(巨木)으로만 보였던 선배들도 이렇게 새싹일 시절이 있었구나.’

    문득 오래 전 게임을 즐기던 향수가 떠오른다.

    지금은 별로 할 게 없어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삭해진 이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하지만 회귀하기 전 쪼렙 시절에는 참으로 넓고 광대하다고 느껴졌던 세상이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콘텐츠의 수는 제한적이고 뭐 기타 요소들도 특별히 바뀐 것 없이 똑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회귀 전의 게임이 더 콘텐츠가 풍요로웠고 할 것이 많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 몰입감과 열정의 문제겠지.’

    어느 정도 강해진 이후부터는 데미지 수치, 딜량을 계산기로 두드리며 높은 자릿수의 히트를 기록하는 것만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고렙이 되면 당연하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하지만 회귀하기 전 저렙일 당시에는 정말로 탱이면 탱, 딜이면 딜, 힐이면 힐, 파트를 나눠서 정말로 그 역할에 깊게 몰입했었다.

    마치 어릴 적 했던 소꿉놀이랄까?

    진심으로 게임 속 배역에 몰입하고 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Role-playing’이 이루어졌던 시절.

    템과 스킬 트리보다는 연출과 서사를 더욱 더 신경썼던 시절.

    파티원이 패드립과 트롤짓을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진정코 내 등을 맡기는 동료로 대우했던 시절.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뽕 차오른 감성에 젖어 낭만을 즐기던 시절.

    비를 맞으며 모닥불을 쬐고 앉으면 하나둘씩 다가와 주위에 앉아 감자를 굽거니 하프를 연주해 주던 사람들.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고 있으면 근처에 와서 동전을 던져 주거나 아니면 같이 따라서 춤을 추던 사람들. 지나가기만 해도 인사 대신 버프를 걸어 주던 사람들. 사냥터에서 맨날 티격태격 다투던 상대편 진영의 죽돌이, 죽순이들.

    그 얼굴 모를, 이름 모를 사람들. 그때 그 사람들.

    게임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라져 가던 그 시절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동안 다들 어디 갔었어요.’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긴? 여기에 있지!’ 라고 말하는 듯 낯익은 얼굴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탱커 형님도, 언제나 나를 치료해주던 듬직한 힐러 누님도, 그 외 맨날 티격태격 싸웠지만 위급할 때는 항상 손을 잡았던 딜러 친구도, 만나면 욕밖에 안 하지만 그래도 게임에 접속 안 하고 있노라면 접었을까 걱정되던 대장장이 친구도, 컨셉질에 심취해서 맨날 비효율적인 짓만 하지만 그래도 낭만이 뭔지 알고 있었던 음유시인 친구도, 그 외 과몰입한 오덕도, 컨셉에 잡아먹힌 감성충도, 웃고 떠들며 즐기는 수많은 이름 모를 낯선 친구들도.

    북적북적거리는 채팅창을 보고 있자니 내 몸에 버프라도 걸린 듯 힘이 난다.

    윤솔도, 드레이크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지만 나의 소회(所懷)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바로 그때.

    “……마, 마왕님!”

    저 멀리서 콜로세움 심사위원석으로 뛰어올라오는 이가 있었다.

    유다희. 그녀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부른다.

    “큰일 났어요! 지금 인터넷 창 띄워 봐!”

    어찌나 당황했는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외치는 그녀.

    하지만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인터넷 창을 켠다.

    “……!”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이들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먹통이 되어 군데군데 깨져버린 스크린.

    그리고 회색으로 지직거리는 이 화면의 중앙에는 조잡한 글씨체의 메시지들이 떠 있었다.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Nuclear launch detected!]

    핵폭탄.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디악 놈의 짓이라는 것을.

    놈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드디어 핵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자기가 믿을 것은 자기가 정해. Help your self야.’

    조디악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진실 혹은 거짓.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끊임없이 대립하는 용과 악마 사이에 놓인 인간처럼, 나는 윌슨과 조디악 사이에 놓인 중간자(中間子).

    흑과 백. 어느 한 쪽에 속할지는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껏 양자택일의 선택을 유예해왔던 나 역시도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홀로 고고할 수는 없는 일.

    나는 리그에서 가려 뽑힌 고인물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깨진 상태창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부터 벌어질 이야기는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

    정식 업데이트, 확장팩이 아니라 한 분탕 유저가 일으킨 파란.

    바로 ‘2.5차 대격변’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