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화 내 이름을 걸고 (1)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
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
헤아릴 수 없는 얘기 속에.
나도 우리가 됐소.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움직이려나.
-이태원 『솔개』-
* * *
-띠링!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와 주세요]
.
.
나는 캡슐에서 나온 이후로 쭉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처리반 측에서 뭔가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해서 그 이후로 자그마치 7일이나 게임 접속을 하지 않은 채 기다렸건만 딱히 연락이 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남세나는 그 아이템을 봤을까?’
만약 남세나가 그 아이템을 사용해 조디악의 기억을 엿보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홀로 올라선 나 역시도 이제 남세나처럼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용과 악마, 그리고 윌슨과 조디악.
진실로 포장된 거짓, 거짓으로 치부되는 진실, 혹은 진실로 진실, 거짓으로 거짓.
무엇을 택할지는 여전히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때.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남세나, 아니면 처리반 측에서 연락을 준 게 아닌가 해서 황급히 받아 보니.
[여보세요?]
유다희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뭐야, 너였냐.”
[이게!? 뭔데 그 노골적으로 실망한 어투?]
유다희는 뭐라뭐라 잔소리를 늘어놓은 끝에 용건을 꺼냈다.
[그때 내가 얻었던 잿빛용의 아이템 말야. 그레이 시티의 연구원들이 연구 중인데…… 정확한 효과와 한계를 알아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나는 잿빛용을 잡고 얻은 재료 아이템 하나를 유다희에게 조사하게끔 했던 적이 있었다.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재> / 재료 / S+
회색분자를 상징하는 재. 둘 이상의 물질이 하나로 섞였을 경우 이 재를 사용하면 깨끗하게 분리된다.
-특정 공간, 일정 시간 동안 잿빛용 로도피스의 권능을 일부 재현해 냅니다
※본 아이템은 1회용입니다
화산재에 관한 연구라면 그레이 시티의 연구진들이 가장 능력이 좋다.
1년 365일 24시간 내내 항상 화산재 때문에 고역을 치르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단 ‘융합’ 특성의 카운터용 아이템이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어디까지 분리가 되는지 그 한계를 알 수가 없네. 아무튼, 꼭 성과를 내 보일게.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그래, 뭐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무리 안 해. ……참, 이따 저녁에는 뭐해?]
유다희가 쭈뼛거리며 묻는다.
나는 일정들을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30분 뒤에는 운동 가서 근손실 난 것 보충해 주고 혼합대용식 한 컵 마신 뒤에 바로 개인방송채널들 조회수 점검하고 오류 난 것 없는지 확인 후 광고료 정산하고 그 다음에 세무사랑 통화해서 법인세 개정안 받고 펀드랑 주식에 넣은 거 투자성과 보고서 확인한 뒤에 새로 들어온 광고 제안들 검토하고 유튜뷰 전략기획실 팀장이랑 앞으로 벌어질 빅 이벤트, 즉 고마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설리그에 대한 큰 그림을…….”
[…….]
“뭐야, 왜?”
[……엄청 바쁘다는 거잖아. 알겠어.]
유다희는 그 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나 참. 밤 11시 45분에서 57분까지, 약 12분 정도는 한가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 했는데, 원 참을성 없기는.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잠시 고민했다.
사실 앞서 말한 일정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가 벌일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Help your self지.”
예전에 ‘고인물 VS 마동왕’의 특집방송에서 예고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인물과 마동왕이 주최하는 사설 리그.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이름을 딴 개인 리그를 개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명 ‘마고 리그’, 혹은 ‘고마 리그’. 이것은 고인물과 마동왕이 가지고 있는 화제성 때문인지 세계리그보다도 수준이 높은 상위 리그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랭커들, 은둔 고수들이 출전하겠지.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조건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국적, 인종, 나이, 직업, 그 모든 것들을 불문에 부칩니다.]
[또한 현실의 격투기가 몸무게에 따른 체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이 리그에서는 레벨에 따라 체급이 나뉠 것입니다. 물론 두각을 나타내는 저렙 체급의 유저들에게는 따로 아이템이나 솔루션 등이 제공될 수도 있습니다. 무체급 리그도 존재하고요.]
이미 가진 자, 선발주자들, 현실의 자본력이 뒷받침 되는 이들.
속칭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린 프로 판에서 고인물과 마동왕이 내건 공약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고 많은 언더독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게임 커뮤니티에 ‘고마리그’, 혹은 ‘마고리그’를 검색만 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고인물이랑 마동왕이 직접 솔루션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참가할 여지 충분하다ㄷㄷㄷ
-근데 어떤 식으로 지도해준다는 거임?
-그니까 토너먼트 식으로 해서 둘이 경기장 위에서 싸우고 나면 그 경기를 총평하면서 단점 지적해주고 장점 키워주고 한다는 거란다!!
-내 경기를 마동왕이랑 고인물이 보고 평가해준다니ㅠㅠㅠ이런 영광이...ㅠㅠㅠㅠ
-프로들은 시드 주냐??
-이미 유명한 스트리머나 아마추어들까지 시드 준다던데?
-와 솔직히 프로리그 보면서 난 후발주자니까 안되겠지...했는데...이건 레벨 별로 체급을 나눈다니까 나한테도 희망이 있다!
-솔찌 나는 템만 받쳐줬어도 프로리그에서 상위 티어 갈 수 있었는데...지금은 준프로 급에서 아무리 발악해도 위로 못 올라가잖어ㅠㅠㅠㅠㅠ이번 기회가 나에겐 마지막일거야!!
-와;;;;후발주자들 중에서 재능 깡패급인 애들 이번에 다 발굴되겠네ㅋㅋㅋㅋ
-게임판이 한번 또 이렇게 뒤집어지나요!?!?
-이런 변화는 상위 티어 프로들도 반기던데?
-왜???걔네들은 아래에 있던 애들이 올라오게 되니까 입지 흔들리는거아님?
-ㄴㄴ걔네들도 어차피 결국 마동왕이랑 고인물 아래잖어ㅋㅋㅋ이번에 꿀팁 몇 개 받아서 더 위로 가고 싶어하는 분위기더라ㅋㅋㅋ
-모두에게 좋은 일이구만:}
-나도 참가해서 꼭 경품 아이템 받고 솔루션도 받는다.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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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반응들은 하나같이 호평일색이다.
하기야, 가장 꼭대기에 있는 천상계 of 천상계 랭커가 가장 아래까지 굽어 살피며 하나하나 조언을 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무보수로 말이지.”
레벨이나 템빨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피지컬 괴물들, 극강의 재능충들, 상상초월의 고인물들을 선발하는 리그.
한편, 나는 이 리그를 통해 찾아내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다들 뭐 하고 살까. ZI존전사123 형, T없이맑은아E 누나, 그리고 ㅎr늘빛사랑™, 소듀맛캔듸, 딸7I겅듀ღ 친구들…… 그립구만.”
회귀 전에도 7만 시간 플레이어였던 나를 어린이 취급하면서 보살펴 주던 사람들.
조디악이 곧 몰고 올지도 모를 끔찍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비록 후발주자인지라 템빨이 구리고, 젊어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들에 비해 피지컬이 딸린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애정과 근성이 있다.
등 뒤를 맡겨둔 탱커가 갑자기 게임이 질린다며 로그아웃 해 버린다면 얼마나 치명적인가!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힐러가 말도 없이 어느 순간 게임을 접어 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한가!
하지만 내가 찾는 이들은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
이 세계를 향한 애정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고인물들.
그들에게 충분한 솔루션과 공략 팀, 장비가 지원된다면 과연 어떻게 바뀔까? 그것이 궁금하다.
“이제 돈에 구애받을 일도 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문득 옛날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과거 프로리그 신인 때 겪었던 나름대로의 굴욕.
“그 뭐냐. 위에서 오더가 하나 내려왔어.”
“……위?”
“음. 주최측이랑 진흥원, 그리고 스폰들이지 뭐.”
“뭐라는데요?”
“‘쇼맨십(showmanship)’을 좀 보여 줄 수 있냐더라. 격투기 경기랑 같은 거야. 그 왜, 잘나가는 선수들을 보러 오는 관중들이 많잖냐. 그들을 위해 경기 내용을 조금 자극적으로 해 줄 수 있느냐는 거지.”
“자극적이라면 어떻게… 똥꼬쇼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저번에 매드독과의 경기 때 있잖아. 랭커들 다섯 명 연달아 파파팍 잡는 거. 이번에도 그런 걸 기대하는 것 같던데.”
엄재영 감독이 위에서 내려온 부탁 아닌 부탁을 전하며 곤란해하던 것이 기억에 새록새록 남는다.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네. 역올킬 10분 컷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 시절에는 남이 이룩한 성과를 만만히 보고 툭툭 내뱉는 꼰대들이 게임계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 때문에 벌어졌던 웃지 못할 사건.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차규엽 게이트 사건 이후 게임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꼰대들이 대거 물갈이되고 요즘의 협회들은 나름대로 클린하다.
나 역시 개인 리그를 개최해 버릴 정도로 자본력이 빵빵하졌으니 스폰서들의 눈치를 보느라 광대처럼 퍼포먼스를 한다거나 하는 굴욕은 이제 겪지 않아도 된다.
“자, 그럼 이제 이력서들이나 한번 살펴볼까?”
나는 메일이나 서면 등 가지각색 방법으로(심지어 화살에 편지를 묶어서 사옥 현판에 쏘아 보낸 이도 있었다!) 온 리그 참가 신청서들을 살펴보았다.
각종 개인방송 플랫폼에서 꽤 실력파로 알려진 스트리머들은 대부분 참가를 희망하고 있었다.
충분히 프로리그에서 뛸 만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리그에 남아서 인터넷 방송을 하는 실력파 스트리머들이 대다수였다.
“확실히, 프로로 데뷔하게 되면 수입이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많지. 돈 벌 때 제약이 많으니까.”
실력과 콘텐츠가 확실하다면 개인방송이 오히려 돈을 더 많이 버는 시대다.
나는 프로급 아마추어들의 참가 신청서들을 쭉 훑어본 뒤 아예 개인으로 참가한 이들의 이력서들도 쭉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
몇몇 익숙한 아이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