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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47화 (847/1,000)

847화 신데렐라 (4)

훤히 드러난 이빨들 사이로 긴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거대한 괴물.

잿빛용 로도피스. 고정 S+급 몬스터,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황제…… 였던 것.

하지만 그것은 전부 옛날의 위명.

놈이 죽으며 흘린 피는 잿가루 고토(古土) 위를 파고들 듯 말라붙어 길고 깊은 협곡을 만들어 냈다.

허공 높은 곳에서 떨어져 지면에 박힌 시체는 아마 이곳에 유적처럼 남을 것이다.

한편. 나는 잿빛용의 잘려나간 머리통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까꿍.”

“…….”

“아차, 미국인이지. 피카부-”

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드러내며 놀란 표정을 짓자 조디악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돋아난다.

“이게 뭐 하자는 플레이야?”

“좋은 건 좀 같이 나눠먹자는 플레이야.”

나는 말을 마치는 동시에 상태창을 띄웠다.

딜 미터기와 기여도 항목에는 내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있다.

-띠링!

<세계 최초로 ‘잿빛용 로도피스’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누구보다 제일 앞에 기록되어 있는 플레이어, 기여도 1위. 바로 나다.

김정은이 시뻘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야이 X! XX! XXXX! XXX XXX! XXXXXX! XXX야! 대체 왜 XX XXX같은 XXXXX게 XXX냐고!”

“막타만 먹었는데 왜 내가 기여도 1등이냐고? 어허…… 딜 미터기를 잘 봐.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는 제한시간 안에 로도피스를 잡지도 못했다고. 애꿎은 그레이 시티만 화산쇄설류에 뒤덮여 멸망했을걸?”

그 말대로다.

나는 깎단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내 도트데미지가 착실하게 잿빛용 로도피스를 압박해 주지 않았더라면 조디악 놈은 레이드에 실패했을 것이다.

아마도 놈들은 몰아치는 재의 폭풍과 로도피스 특유의 암막 패턴 때문에 나의 개입을 보지 못했겠지.

“와! 이렇게 편한 고정 S+급 몬스터 레이드는 처음이었어. 이게 버스 타는 기분인가?”

내가 안전한 곳에 숨어 기여도를 날로 먹은 것에 대해 조디악과 김정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 말고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풀썩! 츠츠츠츠츠-

잿빛용 로도피스의 육체가 완전히 재로 변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맵게 풀썩이는 잿구름이 녀석의 마지막이었다.

바람이 불어 회색빛 연기가 모두 사라진 곳에는 거대한 뼈만이 허옇게 남았을 뿐이다.

그때.

나는 깔끔해진 시야 한켠에서 의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저 사람은……?’

피를 마시는 칼에 뼈만 남은 투구, 그리고 예전에 내가 쓰던 것과 같은 바실리스크의 갑옷.

ID 편잭, 본명은 편귀연.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회귀하기 전에 3신기 메타로 유명했었던 할머니네.’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보다 조금 더 노쇠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똑똑히 기억난다.

회귀하기 전, 나에게 유튜뷰를 통해 3신기 메타를 알게 해 준 네임드 플레이어인 동시에 저렙 뉴비 때부터 오직 샤를페로 대분화구에서만 사냥을 하던 고인물 중의 고인물. 거기에…….

“브로큰 링!”

나는 편잭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하나를 바라보았다.

펫과의 호감도, 그것이 MAX를 찍었을 때나 떨어지는 것이 바로 브로큰 아이템.

과거 히드라가 내게 남긴 것과도 비슷한 반지가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회귀 전, 전신마비 상태로 12년간 게임을 하던 테이머 유저의 브로큰 아이템이 화제가 된 적 있었다.

수많은 거부들이 엄청난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그 플레이어는 끝끝내 팔기를 거부했었고.

그 플레이어의 ID가 분명 편잭이었던 것도 같다.

자리에 누워서도 엄청난 의지로 게임을 했던 고령의 게이머, 하지만 끝끝내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여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었지 아마?

“……근데 어디서 한 번 더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회귀 전에 알던 얼굴만이 다가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저 할머니를 언제 또 봤었더라?

나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저 할머니를 어디서 봤든, 그녀의 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은 그저 조디악의 일행일 뿐이다.

나는 보상으로 떨어진 호칭과 아이템부터 얼른 수거했다.

<이어진>

LV: 99

HP: 990/990

호칭: 회색 용군주 로도피스의 위상(특전: 회색분자)

‘회색분자’ 특성.

이것은 공격한 상대가 융합형 몬스터였을 경우 10배의 추가데미지를 입히는 스킬로 하린마루나 카이도마루, 아카오니와 아오오니와 같은 융합진화형 몬스터를 잡을 때 아주 유용할 것 같았다.

한편.

아이템 보상으로는 조금 색다른 것이 떨어졌다.

-<잿빛용 로도피스의 어두운 영혼 화톳불> / 목걸이 / S+

잿더미 안에서 작게 타오르는 잔불의 씨앗.

이것만 있으면 어디서든 불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 불씨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절대 꺼지지 않는다.

타락한 이들의 영혼을 장작삼아 타는 불이라는 소문이 있다.

-‘어둠’ 저항력 +500%

-특성 ‘초고속재생’ 사용 가능 (특수)

리치왕을 잡고 얻은 ‘여벌의 심장’과 썩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다.

‘흐음, 내 여벌의 심장 아이템을 이 목걸이와 함께 두면 회복 효과가 훨씬 더 좋아지겠군.’

늘 포션값이 막대하게 들었는데 이 초고속재생 특성이 여벌의 심장과 함께 콜라보된다면 포션값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회복효과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호칭도 아이템 보상도 꽤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왔다.

경험치도 대폭 상승했으니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한편.

“젠장!”

조디악은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했는지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쇄설류 샌드박스> / 재료 / S+

샤를페로 대분화구가 사화산이 되기 전, 한창 격렬하게 폭발하던 활화산 시절의 폭렬(爆裂)이 담겨있는 상자.

-특정 공간, 일정 시간 동안 잿빛용 로도피스의 권능을 일부 재현해 냅니다

※본 아이템은 1회용입니다

응, 일회용 아이템~

조디악은 슬라임 젤리의 레시피를 알지 못하니 저것을 양산할 수도 없다.

나는 꼴좋다는 표정으로 조디악을 바라보았다.

“그거 쓸 거면 지금 쓰지? 한번쯤은 죽어 줄 용의도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조디악은 진심으로 열 받았다는 듯 나를 노려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상자를 열어 재낄 모양새.

하지만.

“안 되지.”

내 옆에서 고개를 내미는 또 하나의 얼굴이 그것을 막는다.

유다희.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조디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그레이 시티를 화산재 범벅으로 만들었겠다? 그리고 까딱했으면 그레이 시티가 멸망할 뻔했다고? 하, 놔 이 색기들이 누구 맘대로 남들 삶의 터전을 가지고 도박이야?”

그녀의 뒤로 그레이 시티의 정예 경비병들이 하나둘씩 화살과 창을 겨눈 채 모습을 드러낸다.

시혼 시장의 암흑기를 견뎌낸, 하나같이 숙련도 높은 NPC들이었다.

유다희와 그녀의 친위대들이 내뿜는 서슬 푸른 기세에 조디악조차 입맛을 다시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놈은 잿빛용 로도피스의 시체를 무덤사역 특성으로 되살리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스킬 숙련도가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 보이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흥. 이 샌드박스로도 내가 원하는 바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놈은 뒤에 아직도 꽤 많이 남아 있는 고대화석 해골병들을 돌아보며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조디악을 향해 시비를 걸기 전, 유다희에게 먼저 보상 아이템을 확인할 것을 권했다.

“야, 너는 아이템 뭐 얻었냐?”

유다희는 기여도가 낮아 별다른 아이템을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의외로 아이템 보상을 제대로 챙겨 받았다.

“나? 뭐 이런 거 주웠는데.”

유다희는 내 앞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숯처럼 뭉친 잿덩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잿빛용 로도피스의 화산재> / 재료 / S+

회색분자를 상징하는 재. 둘 이상의 물질이 하나로 섞였을 경우 이 재를 사용하면 깨끗하게 분리된다.

-특정 공간, 일정 시간 동안 잿빛용 로도피스의 권능을 일부 재현해 냅니다

※본 아이템은 1회용입니다

본디 재는 때를 분해하는 성질이 있어 빨래에도 자주 쓰인다.

이 경우에는 두 가지 이상의 혼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겠지만 말이다.

“……흐음. 이걸 어디에 써야 하나.”

나와 유다희가 머리를 맞대고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

나는 유다희가 얻은 아이템을 똑같이 나눠받은 다른 한 사람을 발견했다.

편잭.

그녀는 손에 들어온 이 재 덩어리를 손에 쥔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산산조각난 링> / 반지 / S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반지.

오랜 친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를 제외한다면.

편잭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이내, 그녀는 망토 자락 아래로 입마개를 한 좀비 강아지를 꺼내놓았다.

[그르르르릉……]

좀비 강아지는 불안과 공포, 증오에 범벅된 눈동자로 발버둥 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두려워하는 기색.

편잭은 그런 좀비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갈라 터진 목소리로 말했다.

“강생아. 이제 다 끝났다. 돌아오렴.”

그녀는 아무래도 이 재 덩어리를 어디에 써야 할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스스스……

이윽고, 로도피스의 잿덩이가 좀비 강아지의 몸에 스며든다.

……오잉!? ‘좀비 강아지’의 상태가……?

F급. 아무도 찾지 않는 싸구려 펫에게 S+급 아이템을 먹이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 누가 믿을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편잭의 행위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녀를 미련하다 말하지 못할 것이리라.

이윽고, 메시지가 떴다.

-축하합니다! ‘좀비 강아지’는(은) ‘강아지(으)로 되돌아왔다!

동시에.

[……끼잉.]

편잭의 품 안에서 환한 빛기둥이 솟구친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은 새로 커스터마이징 해야 하는 기본옵션 강아지가 아니었다.

작고 토실토실한, 그리고 이 세상 둘도 없는 그녀만의 강아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눈과 코, 입, 발, 꼬리를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강아지가 발발발 뛰어와 노파의 품에 안긴다.

그대로. 맨 처음 커스터마이징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

풀썩이는 잿가루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던 편잭의 두 눈에 매운 습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방금 막 아궁이에서 뛰쳐나온 듯 재투성이의 똥강아지.

‘주인님 잘 지냈어?’라고 묻는 듯 꼬리를 흔드는 녀석.

그제야 편잭, 아니 편귀연은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 개를 저장(Save)할 수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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