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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46화 (846/1,000)

846화 신데렐라 (3)

조디악은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벨페골을 잡고 얻은 갑옷, 무투룡을 잡고 얻은 날개, 그리고 지금껏 정성을 다해 양성해 온 고대화석 해골병 정예군단.

이 모든 것들이 잿빛용 로도피스 하나를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잿빛용 로도피스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노룡(老龍), 거대한 덩치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용족의 원로이다.

자연스럽게 한 방 한 방의 평타가 어지간한 A+~S급 몬스터의 궁극기와도 비견될 만했고 가끔씩 터져 나오는 발악기는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지형을 통째로 뒤바꿔 버릴 정도였다.

“으으으, 화산재 때문에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겠어.”

김정은은 연신 검은 침을 뱉어내며 기침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디악과 편잭은 빠르게 움직이며 로도피스의 몸 곳곳에 딜을 박아 넣고 있었다.

“자정까지 3시간 남았으! 딜을 멈추면 안 뒤야!”

“푸스스스…… 딜 미터기 봐 할망구, 누가 제일 데미지 많이 넣고 있나.”

편잭은 조디악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둘은 파티를 맺고 있지 않음에도 서로의 공격 타이밍을 견주어 보며 차근차근 다음 스텝을 밟아 가고 있었다.

이윽고, 잿빛용이 전신의 비늘 밑에서 검은 연기들을 뿜어낸다.

“나왔군. 회해의 암막!”

김정은이 외쳤다.

회해(灰海). 재의 바다가 펼쳐졌다.

온 시야가 다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린다.

이쯤 되면 화이트 아웃이 아니라 그레이 아웃이라 해야 할 정도.

잿빛용은 자기가 만들어 낸 재의 구름 속으로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다.

하지만.

“네놈의 위치는 꿰고 있지. 잿더미 언덕을 회돌아서 왼쪽으로 치고 나올 작정이렷다!”

“푸스스스…… 해골병들도 왼쪽으로 가는군. 쟤네는 AI가 시킨 대로 움직이니 그냥 어택땅 찍으면 돼서 편해.”

편잭과 조디악은 잿빛용의 위치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또다시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딜을 넣는 데 열중하기에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김정은과 조디악은 끊임없이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예상보다 딜링이 더디구만.”

“네놈이 저 할멈에게 정예병들을 가져다 바치지만 않았어도……!”

“그래 봐야 몇 구 되지도 않는 물량이잖아. 봐, 시간이 됐다.”

“두 번째…….”

김정은이 낮게 읊조렸다.

회해의 암막은 총 세 번 사용되는 기술이다.

첫 번째가 언덕을 회돌아 치고 나오는 기습 작전이라면 두 번째부터는 그 궤를 달리한다.

“정면…… 무조건 정면이다, 집중해!”

두 번째 암막부터 잿빛용은 정면 돌파를 감행해 온다.

문제는 소리.

“이봐, 조디악!”

김정은은 조디악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저 사이코의 청력은 일반인보다 예민한 편이라 이 난장 속에서도 똑똑히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답 자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아 분명 문제가 생겼다.

소리 자체가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

“……5미터 이상. 떨어져 버렸나.”

두 번째 암막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 안까지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기존처럼 재로 암막을 쳤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덤.

파티와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대로 끝이다.

이 재의 바다에서 파트너를 다시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이 공격패턴이 끝나기를 바라며 버티고 또 버틸 뿐.

바로 그 순간,

툭-

그의 앞에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김정은의 눈이 번뜩였다.

정확히 7시 방향으로 연달아 굴러오는 둥근 물체.

그것은 해골병사의 머리였다!

툭- 툭- 툭- 툭-

동시에 여러 개의 머리들이 김정은 앞에 날아들었다.

“정면 중심 45…… 45도!”

김정은은 말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리자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잿빛용의 거체가 쇄도했다.

콰쾅! 쿠구구구궁-

스크린 도어 없이 지하철을 맞이하는 듯한 감각.

잿빛용의 몸은 탄환처럼 암막을 뚫고 지나간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일이다.

김정은이 해골병사들의 머리를 따라 재의 바다를 더듬어 나가고 있을 때.

츠츠츠츠츠……

암막이 걷혔다.

두 번째 페이즈가 끝난 것이다.

김정은의 눈에 보인 것은 재의 언덕을 뒤덮듯 널브러진 해골병사들의 뼈들이었다.

조디악이 비교적 여유롭다는 태도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김정은을 구하러 움직이지 않고 그저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자식아! 찾으러 안 오냐!?”

“이 폭풍 속에서 널 어떻게 찾아, 머저리 같은 년아. 해골바가지 몇 개나마 던져 준 것을 감사하게 여겨.”

“브레인 취급을 감히 이따위로 해!?”

김정은은 잔뜩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디악 덕에 살아남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암막이 펼쳐짐과 동시에 파괴된 해골병들의 신체 파편을 곳곳에 흩뿌린 뒤 굴러들어온 뼈다귀들의 시간, 각도들을 이용해 잿빛용의 위치를 역산하는 공략법.

“결과가 나쁘지 않았어. 저걸 보라고.”

조디악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잿빛용이 보인다.

조디악은 그 짧은 순간 암막을 정면으로 돌파해 잿빛용의 위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딜을 꽂아 넣은 것이다.

잿빛용의 다이브(Dive)형 돌진기는 행동 개시 이후 끝이 날 때까지 취소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조심하라구. 딜을 생각보다 많이 꽂아 넣어 버려서…… 바로 다음 장막이 올지도 몰라.”

과연 조디악의 말대로였다.

잿빛용 로도피스는 먹구름 같은 날개를 움직여 상승기류를 타오른다.

그리고 몸 바깥에서도 보일 정도로 활활 불타는 폐를 크게 부풀린 뒤 곧장 화산쇄설류를 뿜어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대망의 3단계.

이 단계에서의 잿빛용은 하늘 높이 치솟아 지상을 향해 암막을 뿜어낸다.

하늘에서 꽂히듯 내려오는 잿빛용의 공격은 2단계와 같은 꼼수로도 알아챌 수 없다.

해골병사가 던진 뼈들이 먼 상공에 있는 잿빛용에게까지 닿지 않기 때문.

“……그러나! 준비가 안 되었다면 여기 올 일도 없었지.”

조디악이 한 일은 단순했다.

텁!

자신의 손에 든 마도서를 덮는 것.

이것으로 그의 사역 마법은 해제되어 모든 해골병사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통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지켜본 김정은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힐까?”

“푸스스스스! 이제 와서 묻는 건 실례 아닌가? 계획은 본인이 다 짜 놓고 말이야!”

조디악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되어야지. 물리 법칙대로라면.”

후우우욱-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소리를 차단하는 암막 속에서도 분명히 들려왔다.

“된다!”

김정은의 얼굴이 비로소 환해졌다.

고르르르르-!

환풍기의 소리 같기도 하고, 동시에 진공청소기의 소리 같기도 한 이것!

이 소리는 암막이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였다.

정확히는 뻥 뚫린 구멍을 향하여!

그것을 본 편잭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땅 밑에 해골병을 깔아뒀다가 역소환시켜 공동(空洞)을 만들어 낸 건가.”

확실히, 해골병사로 꽉 메워 놓는다면 제아무리 잿빛용의 눈으로도 알아챌 방법이 없다.

쿠르르르르르륵!

하늘을 가려 버릴 정도로 넓게 펼쳐졌던 재의 구름은 바람구멍을 통해 언덕 반대편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그로 인한 기류의 변화는 잿빛용이 뿜어낸 브레스의 각도마저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어 버렸다.

그 바람에 산기슭 저 아래의 그레이 시티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화산재들이 날리고 있었지만 그것이야 뭐 조디악이 알 바 아니다.

3번째 공격패턴까지 무효화된 지금.

남은 것은 흐릿하지만 그 존재 여부는 명확해 보이는 보스 몬스터, 잿빛용 로도피스 하나뿐!

“자, 이제 가장 쉬운 일을 할 차례야. 노인네, 당신도 할 수 있지?”

조디악이 편잭을 향해 윙크를 해 보인다.

편잭이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마지막이다! 마나통도 이제 텅 비었다고!”

조디악은 남아 있는 모든 해골병들을 일으켜 전력을 쏟아낸다.

편잭 역시도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

쿠드드드드드……

지면이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 전체가 심하게 요동친다.

김정은이 외쳤다.

“자정까지 30분 남았어! 그 안에 못 잡으면 이 분화구가 폭발할 거야!”

잿빛용의 ‘잔불’ 특성은 화산재 와이번의 잔불 특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화산재 와이번이 잿더미 속에 남은 불씨를 그러모아 발사하는 수준이라면 잿빛용은 이미 죽어 사화산이 된 샤를페로 대분화구를 다시 폭발시켜 활화산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잿빛용 레이드가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 있는 모두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한 줌 잿가루가 되겠지.

샤를페로 대분화구가 내뿜는 용암과 화산쇄설류의 규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 자연스럽게 저 산기슭 아래의 그레이 시티 역시 멸망해 버릴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재앙과도 같은 존재, 단신으로도 능히 멸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고정 S+급 몬스터인 것이다.

촉박한 시간제한에 조디악과 편잭의 표정마저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한데?

“어?”

눈알에 달라붙는 잿가루를 막 씻어낸 김정은이 상태창을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운 재가 동공을 찔렀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정까지 쓰러트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줄 알았던 잿빛용 로도피스의 몸이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으으윽……]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로도피스.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잔불과 화산쇄설류들은 점점 그 힘을 잃어 가고 비늘 위에 두껍게 굳어 있던 재들은 점차 가루가 되어 바스라져 내린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놈은 출처 의문의 데미지를 짊어진 채 공중에 못 박혀 있는 것이다.

잿빛용의 상태를 계속 점검하고 있던 김정은이 외쳤다.

“뭐지? 놈이 점점 약해지고 있어!”

“푸스스스- 갑자기? 그건 왜냐?”

“모르지! 재 폭풍 때문에 지금 눈 뜨기도 힘들다! 상태창도 피어 때문에 깨져나가서 잘 안 보여!”

아무튼 지금이 버스트 딜 타이밍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의 이견도 없다.

조디악은 내일모레 특성으로 데미지를 할부로 돌린 채 계속해서 해골병들을 끄집어낸다.

무투룡의 기운으로 파워업한 해골병들은 열심히 잿빛용의 거체에 칼과 창을 박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끝을 보는구먼.”

편잭.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경지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일도양단(一刀兩斷). 번천(翻天).

그녀의 칼이 검은 하늘에 가늘고 긴 흰 실선 하나를 그어 놓았다.

동시에.

…쩍!

거대한 것이 깨지는 굉음.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도 같은 소리가 막 자정을 맞이한 밤하늘에 울려 펴진다.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열두 번, 괘종시계 종소리의 끝에 따라오는 소리가 하나.

…쿵!

그것은 잿빛용 로도피스의 목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지독하게도 매운 잿가루가 하늘 높이 버섯구름을 만든다.

동시에 모두의 귓가에 알림음들이 빗발쳤다.

-띠링!

<세계 최초로 ‘잿빛용 로도피스’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총 레이드 시간 47:59:59/48:00:00>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보상이 지급됩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지배자 로도피스’가 쓰러졌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타고 남은 것들이 당신의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가 사화산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레시 시티에 내리는 화산재들의 눈이 사라집니다>

<이 변화는 영구적일 것입니다>

<가장 높은 왕좌의 대악마가 당신의 업적을 주목합니다>

<황금왕좌의 고귀한 젊은 군주가 당신의 업적을 주목합니다>

.

.

잡았다.

불과 1초의 차이로 갈린 성공와 실패, 그리고 생존과 멸망.

드디어 고정 S+급 몬스터,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황제 잿빛용 로도피스를 거꾸러트렸다.

잿빛용의 잘려나간 거대한 머리에서 회색의 피가 흘러나와 잿더미를 적시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

어느새 화산재의 폭풍도 멎었다. 환한 달빛이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콰콰쾅!

머리보다 조금 더 늦게 추락한 몸체가 지면에 묵직한 지진을 일으킨다.

“잡았다! 드디어 잡았다고! 우리가 해냈다!”

조디악이 드물게도 ‘우리’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외쳤다.

김정은과 방씨 형제의 표정도 흥분과 성취감으로 환해진다.

그들은 실로 기나긴 시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일궈낸 성과에 전율하고 또 기뻐하고 있었다.

“푸스스스스- 정말 ‘우리’가 해냈다고 생각해?”

잿빛용의 머리통 위로 모습을 드러낸 한 알몸의 남자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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