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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45화 (845/1,000)
  • 845화 신데렐라 (2)

    필드 곳곳에 깊은 구덩이가 패였고 회색 재가 버섯구름을 이루며 피어오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잿더미의 잔불들이 시뻘겋게 살아나고 있었다.

    <로도피스>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3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잔불과 아궁이를 지배하는 위대한 잿빛 용.

    “12시의 괘종이 울리면.”

    -로도피스- <구약, 회신왕기(灰燼王記) 하권,

    회왕 4절>

    대분화구의 지배자는 필드에 모인 모든 인간들을 내리깔아본다.

    고정 S+급 몬스터, 잿빛의 용 로도피스.

    그녀는 일곱 용군주들 중 유일하게 인간 형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짙은 회색의 머리칼과 옅은 회색의 피부, 아름다운 이목구비, 늘씬한 팔과 다리.

    마치 현실의 아름다운 모델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외형이다.

    드레스 안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비늘과 긴 꼬리,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긴 눈동자만 아니었어도 영락없는 인간의 몸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외면 속에는 미처 숨길 수 없는 폭력과 미증유의 광기가 숨겨져 있다.

    로도피스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용족의 전사였다.

    장검의 날처럼 긴 손톱과 송곳처럼 길고 뾰족한 굽이 달려 있는 유리구두는 그야말로 살인에 최적화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한번 휘둘러진 손톱에서는 날카롭고 매운 참격이 뿜어져 나와 산을 가르고 유리구두의 굽은 닿는 그 모든 것에 구멍을 뻥뻥 뚫어 놓는다.

    단신으로 광역의 지형을 비틀어놓는 그 힘은 가히 압도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정복도 가능하다는 것.

    제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위험등급 S랭크 판정의 육체로는 조디악 일당의 합공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르르륵…… 이놈들.]

    로도피스가 탁한 눈동자를 들어 정면을 노려본다.

    입가에 흐르는 피는 매운 재가 녹아들어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한편.

    로도피스의 앞에는 조디악과 편잭 노인이 지친 숨을 헐떡이며 마주 서 있다.

    현재 시각 새벽 4시 30분.

    정확히 자정에 나타난 로도피스를 상대로 레이드를 개시한 어언 4시간 30분째.

    “할망구, 꽤 지친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겨우 이 페이즈에서 주저앉을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어.”

    편잭의 대꾸에 조디악은 피식 웃고는 눈앞의 잿빛용 로도피스를 바라본다.

    츠츠츠츠츠츠……

    칼과 마법에 의해 닳거나 부서진 비늘이 눈에 띌 정도의 속도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저 정도 급의 고속재생은 조디악조차 전에 본 적이 없는 수준이었다.

    “용옥의 고문기술자는 비교도 안 되는군. 이렇게 사기적일 수가!”

    “……그래도 아직 S급이라 다행이지.”

    김정은이 그런 조디악의 말을 받았다.

    이윽고, 또다시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조디악은 무투룡의 날개를 활짝 펼쳤고 이에 수많은 고대화석 해골병들이 몸을 일으켜 잿빛용을 향해 달려든다.

    죽은 해골병은 곧바로 다시 무덤사역 특성으로 일으켜 세우니 조디악이 부리는 죽음의 군단은 좀처럼 그 기세가 줄지 않는다.

    더군다나.

    …콰쾅! 쩌억!

    편잭이 군데군데 빈틈으로 찔러 넣는 참격은 로도피스에게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이 벌레같은 놈들!]

    로도피스는 손을 휘저어 강력한 화산쇄설류와 잔불을 내뿜었다.

    그것은 나름의 발악기인 듯하다.

    쿠르르르르륵!

    이전보다 빨라진 쇄설류가 모두를 덮쳤다.

    편잭은 예상했다는 듯 능숙하게 몸을 빼냈지만 조디악은 아니었다.

    “……어?”

    시야가 빙글 회전한다.

    수많은 공격이 교차함으로 생기는 기류의 변화.

    인간의 머리로는 차마 다 파악하지 못할 난수의 상황.

    조디악은 순식간에 폭풍에 휘말렸고 공중에 뜬 채 그대로 뒤집어졌다.

    “이걸 맞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던가, 조디악은 스스로의 처지에 헛웃음을 지었다.

    곧 뜨거운 쇄설류에 난자될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하지만 바로 그때.

    …콰악!

    조디악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있었다.

    방철우. 그가 굳은 표정으로 조디악을 낚아챘다.

    밑에서는 방철해가 그런 방철우의 허리통을 감싸안고 있었다.

    “헤에, 너희가 웬일이냐? 쓸모 있는 짓을 다 하고.”

    조디악은 실실 웃는 얼굴로 방철우의 얼굴을 짓밟았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삼아 박차고 다시 지면으로 착지했다.

    …쿠우웅!

    곧 엄청난 재의 파도가 들이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몸을 피한 조디악이야 살았지만 방철우와 방철해 형제는 재의 파도에 떠밀려 저 멀리 쓸려갔다.

    김정은이 그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이 개졸렬한 쓰레기 새끼! 내 부하들한테 뭔 짓이야!”

    “푸스스스스…… 고기방패라면 뒈져서라도 도움이 되어야지. 유용하게 잘 썼다, 네 부하들.”

    “이 새끼! 진짜 죽여 버린다!”

    “오우, 진정해. 저기 아직 살아 있네, 네 부하들.”

    조디악은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는 김정은을 향해 손사래를 쳐 보인다.

    그의 말대로 과연 화산재의 쓰나미 끝에는 방씨 형제가 보인다.

    둘 다 땅에 다리를 무릎까지 파묻고 버티고 있는 모양새.

    “얘들아! 내가 금방 도와줄……!”

    하지만 김정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까가각- 기긱……

    귓가로 파고드는 이질적인 마찰음.

    마치 고막을 긁어 파내는 듯한 이 기분 나쁜 소리는 분명…….

    “피해! 하이힐이 온다!”

    편잭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디악 역시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역시 그 소리인가?”

    바닥을 긁는 이 마찰음은 분명 유리 구두의 높은 굽이 바닥을 문댈 때 나는 소리.

    아니나 다를까.

    …퍼엉!

    잿더미의 폭풍 최전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로도피스가 엄청난 관통력을 가진 킥을 날려 보낸다.

    쉐에에에엑-!

    제트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대기를 뒤집어 놓는다.

    방씨 형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완갑과 방패를 이용해 전면부를 방어했지만.

    …쾅! 쨍그랑!

    아이템이 박살나는 소리.

    방철해의 방패를 걷어찬 로도피스의 발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터진다.

    유리구두의 한쪽 굽이 부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는 이쪽에게도 참혹했다.

    콰콰콰콰쾅!

    방철해는 방패가 박살나는 충격에 뒤로 수십 미터나 나가떨어졌다.

    방철우가 중간에 그를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공격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꾸구구국-

    방씨 형제는 사이좋게 잿더미 속으로 파묻힌다.

    실로 어마어마한 공격력.

    두 명의 동시 탱킹이었다면 틀림없이 몸이 꿰뚫려 즉사했을 것이다.

    방철해의 어정쩡한 포즈와, 한 박자 늦은 방철우의 그랩이 오히려 힘을 분산시켜 버틸 수 있었다.

    요행이긴 했지만 분명 승기를 잡은 것은 이쪽이다.

    “…….”

    전장에는 침묵이 감돈다.

    조디악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추 된 건가.”

    그는 상황이 끝났음을 직감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손에서 마도서를 놓지는 않았다.

    언제든 로도피스의 추가 공격을 염두에 둔 행동.

    그의 두 눈은 다시 로도피스에게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쿵!

    결국 로도피스가 무릎을 꿇었다.

    반파된 호박마차에 기댄 그녀는 원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디악과 편잭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디악은 그제야 여유가 생겼는지 마도서를 내리고 휘파람을 분다.

    “후아! 해골병 절반이 완전 파괴되었나. 무시무시한 힘이로고…….”

    위험등급 A랭크의 해골병들이 5,000구가 넘게 갈려나갔다.

    이를 단순 계산하면 위험등급 A+랭크의 몬스터 500마리, 위험등급 S랭크의 몬스터 50마리에 해당하는 화력이니 로도피스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이 된다.

    그때.

    로도피스가 조디악을 향해 물었다.

    [나는 쓸 만한 부하를 찾고 있다. 여기서 한 줌 잿가루로 스러지기는 아까운 실력이니 나의 권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떠하느뇨?]

    눈앞에 상태창이 뜬다.

    <수락 / 거절>

    조디악은 더 볼 것도 없이 거절을 눌렀다.

    그러자.

    [……아까운 실력이로다. 하지만 별 수 없는 일. 너희들은 금일 12시의 괘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것이리라.]

    로도피스의 기세가 변했다.

    그녀는 그토록 고집하던 인간형태의 몸을 버렸다.

    우드드드득!

    온몸의 드레스가 다 찢어져 나갔지만 하나도 선정적이지 않았다.

    늘씬한 몸매는 어느덧 엄청난 속도로 부풀어 굵은 뼈와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였기 때문.

    이윽고, 잿빛용 로도피스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로도피스>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4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잔불과 아궁이를 지배하는 위대한 잿빛 용.

    “12시의 괘종이 울리면.”

    -로도피스- <구약, 회신왕기(灰燼王記) 하권,

    회왕 4절>

    거대한 머리, 육중한 뿔, 그리고 전신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포연과 잔불의 화광(火光).

    용이라기보다는 고대의 악신(惡神)이 강림한 것에 가까운 그 흉악한 모습에 김정은이 입을 딱 벌린다.

    “무슨 용이 저렇게 생겼냐!? 악마 같아서 무섭잖아!”

    “푸스스스…… 지들이 그렇게 디자인 해 놓고서는 뭘 새삼.”

    “내가 했냐!? GM 스토리 반 애들이 했지!”

    “처리반이나 스토리반이나, 다 똑같은 도깨비들 아니요? 인면수심의.”

    조디악의 싸늘한 비난에 김정은은 순간 입을 꾹 다문다.

    하지만 그 둘이 티격태격 싸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편잭이 다소 조급한 어조로 외쳤기 때문이다.

    “저놈은 오늘 자정까지 잡아야 해! 그러지 못하면 도망쳐 버린다!”

    그것은 클로즈 베타 출신인 조디악도, 클로즈 베타를 기획했던 김정은도 처음 듣는 공략 팁이었다.

    특이하게도 잿빛용 로도피스는 공략 제한시간이 있는 보스몬스터로 출현한 지 24시간 안에 잡지 못하면 대분화구 속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쳇! 24시간 동안 골렘이랑 재 폭풍 웨이브를 견디라고 하더니만, 이제는 또 24시간 안에 잡으라고?”

    “으음. 제한시간을 거의 다 사용한다고 친다면…… 적어도 48시간 동안은 1분 1초도 쉬지 못하고 빡세게 집중해야 한다는 거네.”

    조디악과 김정은, 방씨 형제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잠 한숨 못 자고 온 힘을 다해 싸워온 시간이 이미 29시간에 육박하지만 진정한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스릉-

    검집에서 반쯤 빠져나온 검면(劍面), 이 날카로운 거울에 편잭 노인의 선선한 웃음이 비친다.

    “곧 원래대로 돌려주마. 강생이야.”

    이번에야말로 이판승사판승(理判僧事判僧), 필사의 각오를 다질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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