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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43화 (843/1,000)
  • 843화 저장(Save)하지 못했던 기억 (4)

    열두 번 울리는 괘종시계.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잿빛의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편잭은 그레이 시티 서고에서 찾아낸 ‘샤를페로 대분화구’ 관련 서적들의 내용대로 뼈로 만든 재단 위에 몇 가지 보석을 재물로 올려놓은 뒤 예정된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거대한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로□■스> -■급: S+ / 특성: ■

    -서■지: ■

    -□기: ■□m□

    -이 세상의 모든 ■을 다스리는 ■□ 군주 중 □■.

    □■과 □■□를 ■■하는 ■□한 □□ 용.

    “너, 자정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도피□- <구약,  ■□왕기(灰燼王記) ■권,

    □□ ■절>

    매운 바람이 부는 통에 상태창을 제대로 열람할 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죄다 글자가 깨져나간 탓에 식별이 불가능했다.

    “퉤엣! 움직여! 움직여!”

    편잭은 입안을 가득 메우는 재를 뱉어냈다.

    혀끝이 타들어가는 듯 매웠지만 그보다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 쪽이 더 문제였다.

    “아이구! 왜…왜 꾸물거려! 움직이라니까! 벌써 노망이 왔나!”

    분명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무리 움직이라고 생각해도 다리는 돌로 변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왜… 왜……!”

    편잭은 하드코어 게이머들이 주로 사용하는 ‘노잼사’라는 개념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패턴, 새로운 페이즈에 도달했을 때 가장 처음 맞는 죽음은 흔히 말하는 ‘노잼사’라는 것.

    분위기에, 연출에, 생경한 환경에, 여지껏 보지 못했던 패턴에 당황하고 압도당하게 되면 얼이 빠져 제대로 된 컨트롤을 하지도 못하고 얼게 된다.

    쉽게 말해 횡단보도를 건너다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트레일러를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머리로는 ‘움직여! 피해!’ 라고 하지만 과연 그 순간 몸을 굴려 트레일러를 피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피할 시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와는 아무 상관없다.

    “뒤로……아냐 앞으로! 대, 대각선으로 굴러서 회피를……!”

    패닉에 빠진 편잭은 우직하게 밀고 나가던 평정심도, 악착같이 이곳을 외워 나가던 집중력도 잃어 버렸다.

    그저 노인.

    거대한 자연 앞에 선 하나의 왜소한 노인이 되고 만 것이다.

    “아니면 멈춰야……?”

    후우우욱!

    그 순간 편잭의 시야가 밝아졌다.

    일시적으로 모든 재를 날려 보낸 거대한 공기의 흐름.

    그리고 그 광풍을 쫓는 것은…….

    발톱.

    거대한 발톱이 만들어 내고 있는 참격이었다.

    편잭은 항거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잿가루가 섞여 휘날리는 바람 때문에 눈을 뜨지도 못한 상태.

    홍해를 가르듯 나타난 거대한 참격을 앞두고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

    결국 머리 위로 크고 육중한 참격이 떨어져 내린다.

    “허억!”

    발톱이 정수리 가까이 당도하고 나서야 그녀의 발이 움직였지만,

    …우직!

    편잭은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고개를 한 발자국도 오르지 못한 채 즉사하고 말았다.

    눈앞이 온통 하얬지만 그녀는 그것이 화산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이 하얀 것은 그저 로그아웃을 알리는 빛무리 때문이다.

    “염…병…….”

    이 순간 편잭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거대한 존재에 대한 무력감도, 패배감도 아니었다.

    한순간 본의를 잊고 겁에 잔뜩 질린 자신에 대한,

    “염병할 늙은이……! 거기까지 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허고!”

    분노였다.

    “이 멍청한 년아! 쭉정이 같은 년!”

    그녀의 캡슐 안쪽에서는 한참이나 쿵쿵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       *       *

    편잭은 회색 입김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노력한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레벨과 스탯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다시 도전했을 때도 한 방에 죽었다.

    꽤나 레벨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도 한참 모자랐다.

    그 다음에 도전했을 때도 한 방에 죽었다.

    세 번째로 도전했을 때 기어코 한 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방째에 죽었다.

    그 다음 다음에 도전했을 때는 한 방, 두 방을 피해 냈고 세 방에 죽었다.

    그 다음 다음 다음은 네 방, 그 다음 다음 다음 다음은 다섯 방.

    다섯 방을 피하고 다른 방향으로 피해 보려 했지만 어디로 가든 녀석의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잘못된 갈랫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렇게 열두 번을 더 죽었을 때였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다른 방향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음은 다시 한 방.

    눈밭을 추하게 굴러서 두 방.

    다리 한쪽을 절면서 기어코 세 방.

    아예 갈비뼈를 내어주고 네 방. 복부 다섯 방. 머리 여섯 방. 그렇게 맞다가 머리로는 이해 가지 않지만 몸이 이해하는 길을 따라 일곱 방을 피하고.

    기어코 여덟 방에 도달. 짓뭉개진 주먹이라도 휘둘러 봤지만 데미지는 아예 없고, 바로 이어 온 반격에 로그아웃.

    아홉 방. 캡슐에 나가서도 연구에 매진하여 열 방. 마침내 녀석 앞에 섰다가.

    열한 방. 열두 방. 녀석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처음 목격하고, 열세 방.

    열세 방째엔 도저히 뚫어 낼 재간이 없어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해 보기도 했으며.

    열네 방. 요행이 찾아와 운 좋게 피해 이번엔 성한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 뒤는 보지도 못하고 사망.

    열다섯. 열여섯. 머리가 터져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을 거듭한 다음에야 마침내 열일곱 방.

    장기적인 바이오리듬 불균형으로 접속 제한을 받아 10일 강제 계정 휴면.

    10일 뒤에 돌아와 다시 한 방.

    몸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무수히 두 방. 세 방을 전전하다,

    불현듯 어느 날 다시 열여섯 방을 피하고, 마침내 열일곱의 벽을 돌파하여 열여덟.

    생전 지어 본 적도 없는 환한 웃음과 함께 발톱에 꿰뚫려 죽고,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 하루가 억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듯 몰입한 끝에 결국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 번의 실효 데미지가 있는 공격.

    온몸이 저릿할 만큼의 흥분.

    오르고 또 오르고.

    스물다섯 방 피하고, 한 방 때리고, 그 다음 스물다섯을, 오십 번째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한 번의 공격이 안 되면, 두 번을 두 번이 안 되면 열 번, 아니 백 번, 천 번, 만 번.

    그것이 지금의 편잭 노인을 만들어 낸 경험치가 되었던 것이다.

    .

    .

    .

    “늙은이라 그런지 죽음에 친숙하지. 그래서 다행이야.”

    편잭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디악 역시 끙 소리를 냈다.

    “보아하니 내가 아는 것은 할멈도 어느 정도 알고 있구먼?”

    클로즈 베타 출신인 조디악 역시도 전에 갇혔던 세계에서 잿빛 용을 상대해 본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편잭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조디악이 레이드에 도움이 될 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편잭과 조디악은 마치 정보를 공유하듯 말을 이었다.

    “푸스스스…… 맞아, 놈은 밤 12시 자정에만 나타나.”

    “하지만 어둡다고 횃불을 밝힐 수는 없더구먼. 놈이 등장하면 잿가루 폭풍이 불어와 모든 불을 꺼 버리니께.”

    “아 맞아. 게다가 시야 자체도 블라인드 처리되지. 재가 눈에 들어가면 멀어 버리거든.”

    “근처에 서식하던 화산재 와이번들이 중간중간 소환되어 귀찮게 하지. 그래서 내가 미리 잡아놓은 것이구.”

    “손톱에 한 번이라도 찔리거나 베이면 끝장이야. 그것에 베인 상처는 절대로 아물지 않고 지속적인 도트 데미지를 입히거든.”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출혈 말인감? 아아, 그거 골치 아프지.”

    “몇 퍼센트인지 알아?”

    “나는 그따우 것 몰러. 그냥 214번 정도 출혈이 있으면 죽는구나 하고 세할리지. 현재 레벨에서 말이여.”

    “호오, 근성이 있는 할매구만. 그럼 버스트 딜 타이밍이 언제인지도 알겠군. 꼬리를…….”

    “내렸을 때여.”

    “……올렸을 때 아냐?”

    “올렸을 때가 더 공격이 잘 들어가지만서두 그 타이밍에 현혹되어 뒈지기 딱 좋지.”

    “아니…… 그래서 한 방은 맞는다고 생각하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절대 아니지. 내렸을 때 끝에서 두 번째 꼬리마디가 살짝 떨릴 때 들어가야 혀.”

    “두 번째 마디라?”

    “두 번째, 확실허지.”

    “꼬리도 잘라 본 적 있는 건가?”

    “늙으면 비위가 없어지니께.”

    “푸스스스스…… 내가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었다니. 이것 참 우습군.”

    “……글쎄. 지금 생각해 보믄 여지까정 끝을 보지 못혔으니 이 늙은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네.”

    조디악도 편잭도 순간 입을 다문다.

    기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편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난 7년여 동안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이 자리를 지켰어.”

    “푸스스스…… 지독한 늙은이일세. 그게 되던가?”

    “너도 늙어 봐. 잠이 없어져.”

    편잭은 바둥거리는 좀비 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우며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저 멀리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그놈에게 인정받아 도마뱀 인간이 될 뻔했던 적도 있지.”

    그 말에 조디악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은 결코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무려 잿빛용에게 직접 인정받은 플레이어!

    만약 편잭이 잿빛용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휘하로 들어갔다면 아마 아주 골치 아픈 리자드맨 고인물이 생겨났을 테니까.

    한편, 편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잿빛용은 크고 강혀. 등치도 산만한 것이 표홀하기 그지없어. 쬐끔이라도 상처를 입었다 싶으면 어둠과 재의 장막 뒤로 숨어불지. 교활한 놈이여. 때때로 졸개들을 풀어놓기도 혀고.”

    조디악 역시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용이 소환하는 잡몹들 중 가장 귀찮은 상대가 바로 화산재 와이번들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 근방에 서식하는 화산재 와이번들은 죄다 편잭이 죽여 놓은 듯했다.

    잿빛용의 성가신 페이즈 하나를 미리 삭제해둔 셈이었다.

    “준비 많이 하셨는데요?”

    김정은이 박수를 치며 말하자 편잭은 콧방귀를 뀌었다.

    “‘늙은 마귀무사’라는 칼잡이 몬스터를 잡아 칼을 얻었고 ‘스컬렉스’라는 뼈만 남은 공룡을 잡아 투구를 얻었다. 그리고 ‘바실리스크’라는 큰 뱀을 잡아 갑옷도 얻었어. 이제는 잿빛용을 상대로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 있다.”

    혈액포식자와 앙버팀, 그리고 패륜아 특성.

    일명 3신기!

    조디악은 표정을 확 구겼다.

    “할매 혹시 유튜뷰 봤어?”

    “그래. 어떤 유명한 청년이 아이템을 뭘 써야 하는지 추천해 주더구먼.”

    “에이 씨, 누군지 딱 알겠네.”

    “고마운 사람이지. 그 청년이 가르쳐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편잭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대화를 해서일까? 약간은 후련해 보이는 표정.

    하지만 좀비 강아지를 끌고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만 간다.

    조디악이 김정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몇 시야?”

    “11시 반. 곧 자정이야.”

    “……흐음.”

    조디악은 턱을 쓸었다.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뭔가 재밌을 것도 같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뭔가를 고민하던 조디악.

    그는 이내 방정맞은 걸음걸이로 편잭을 따라가며 외친다.

    “이봐 할매. 몸빵 필요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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