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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42화 (842/1,000)

842화 저장(Save)하지 못했던 기억 (3)

그렇게 그레이 시티까지 향하는 오랜 여정이 시작되었다.

초보자 마을 유토러스에서 남대륙 깊은 곳에 있는 그레이 시티까지는 아주 멀고도 험한 길, 레벨 높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루트였다.

이제 막 초보자 존을 벗어난 수준인 편귀연이 그곳까지 혼자서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기, 젊은이들. 마차를 좀 얻어 탈 수 있겠는가?”

한평생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적 없던 편귀연은 별 수 없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 다음 틀딱~”

“어딜 버스를 탈라고?”

“뗵! 무임승차라니! 틀니 2주간 압수!”

아직 어려 보이는 플레이어 몇몇은 레벨이 낮은 편귀연을 보며 낄낄 비웃을 뿐이다.

편귀연은 발끈했지만 아쉬운 쪽은 자신인지라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젊은이들 하는 게임인데 늙은이가 끼어들어서 미안혀. 그래도 한 번만…….”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그녀를 비웃을 뿐이었다.

“할매~ 집에 가서 손주나 봐요. 뭐 할라고 그레이 시티까지 가?”

“거기가 어떤 맵인지나 알아요? 참나, 가다가 무조건 죽어.”

“몬스터 말고 플레이어들이 더 무서운 곳인데? 괜히 할매 데리고 다니다가 어그로 튀면 어쩌려고?”

쏟아지는 조롱에 편귀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

“이런 개싸가지없는 호로잡새끼들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세 플레이어의 머리통이 움푹 들어갈 정도의 꿀밤을 날리는 주먹이 있었다.

움푹- 움푹- 움푹-

강철로 된 투구에 주먹 자국이 퍽퍽 패이는 동시에 HP 바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든다.

세 플레이어들은 기겁을 하며 신전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주먹의 주인은 지나가던 것으로 보이는 한 여자 플레이어였다.

그녀는 편귀연의 사정을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저도 마침 남대륙으로 탐험 가던 길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요.”

세대를 뛰어넘어 누구라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쁜 외모, 그리고 그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우악스러운 도끼.

그녀는 편귀연을 마차에 태우고 말을 몰았다.

도중에 꽤나 크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출몰했지만 그녀의 도끼질 몇 번에 죄다 박살이 난다.

그녀는 잡몹을 잡고 얻은 아이템 중 쓸 만해 보이는 몇몇은 따로 챙겨 놨다가 편귀연에게 건넸다.

“어르신, 레벨이 좀 낮으신 것 같은데 그 상태로는 그레이 시티에서 버티시기는 힘들 거예요. 이 아이템이라도 좀 장비하세요.”

“아이구, 내가 뭘 했다고 이런 귀한 걸 받어~ 처자가 써~”

“호호호, 제 레벨에는 안 맞는 장비라서요. 사실 남대륙 가는 것도 제가 쓸 게 아니라 막냇동생이 쓸 장비 찾으러 가는 건데, 아무튼 어르신 쓰셔요!”

그렇게 해서 편귀연은 약간이나마 레벨을 올릴 수 있었고 장비도 구할 수 있었다.

길 가는 도중 만난 한 친절한 여자 플레이어.

그녀 덕분에 편귀연은 그레이 시티까지 비교적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처녀. 도와줘서 고마워. 착하고 친절하기도 하지. 내 이 보답을 어찌 해야 하나…….”

“아니에요. 그럼 전 척살령 준비하러 가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파이팅하셔요!”

친절한 여자 플레이어는 커다란 도끼를 짊어지고는 바삐 자리를 떴다.

중간중간 ‘고인물 죽어!’라는 대사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겉은 드세도 맘씨는 상냥한 처녀로구만.”

편귀연은 멀어지는 그녀를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배웅해준 뒤 돌아섰다.

그레이 시티는 더럽고 추악한 곳이었다.

곳곳에 살인자들과 시체들이 가득하다.

편귀연이 찾아간 곳은 그레이 시티의 시청.

그녀는 그곳까지 가는 동안 자그마치 7번이나 죽어야만 했다.

게다가, 어렵사리 만난 시장 로드리게스는 편귀연의 요청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성급하고 무례한 NPC였다.

[뭐요? 그레이 시티의 도서관을 개방해 달라고?]

“그렇수. 신관들에게 물어보니 여기에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월드맵이 있다던데.”

[나 참. 도서관 자료실이 뭐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다 개방하는 곳인 줄 아나.]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친 로드리게스 시장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이! 시혼 보좌관! 빨리 이 냄새나는 늙은이 내쫓아!]

그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더니 더 안쪽으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그러자 난감한 기색의 젊은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어이쿠, 할머니. 시장님께서 오늘 쿠데타 세력들의 암살시도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셔서 저러니 이해를 좀 해 주세요.]

시혼 보좌관. 그는 대사의 말미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사 하나를 덧붙였다.

[……어차피 오래 가지도 못할 사람이니까요.]

뭐 정쟁(政爭)의 뒷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그것은 편귀연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레이 시티의 도서관에 들어가고 싶다는 편귀연의 거듭된 요청에 시혼 보좌관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 그러시다면 도시를 위해 뭔가 기여를 해 주세요. 그러면 특별히 제 권한으로 서고를 열어드리죠. 저는 도시 미화에 아주 관심이 많거든요. 어떠신가요?]

편귀연의 눈앞에 퀘스트들이 떠올랐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하수처리장 청소’>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뒷골목 청소’>

.

.

도시를 청소하라는 잡 퀘스트.

하지만 편귀연은 두말하지 않고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시청을 나서던 시혼 보좌관은 시청 앞 쓰레기 처리장에 쌓여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폐지와 오물들을 바라보고는 기겁해야 했다.

거대한 쓰레기들의 산.

그리고 그 앞에는 편귀연이 퀘스트 창을 띄워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폐지 줍던 세월이 몇 년인데 이쯤이야.”

결국 시혼 보좌관은 멍한 표정으로 서고 출입을 허가하는 증서를 내주었다.

거대한 도서관 안에는 수없이 많은 장서들이 꽂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삽화와 증언, 유물들.

허구와 사실. 신화와 전설, 민담이 뒤섞여 있는 기록들의 총제.

편귀연은 그 안에 있는 ‘샤를페로 대분화구’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읽고 외웠다.

외워지지 않는 것은 적고 또 적어 가면서 달달 암기했다.

지형과 기후,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생태계.

그리고 지금은 죽어 버린 이 거대한 분화구에 얽혀 있는 ‘잿빛용 전설’.

편귀연은 그곳에서 흥미로운 문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를 지배하는 잿빛의 황제,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잔불의 흔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혼합물들을 분리해 내는 힘이 있다.’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보스 잿빛용은 특수한 ‘재(ash)’ 아이템을 랜덤한 확률로 떨어트리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이상의 것이 섞인 혼합물을 다시 원래대로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양잿물로 빨래를 해서 때를 지우듯 하는 겐가?”

만약 이 문구가 사실이라면 분명 강아지의 데이터 코드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오염된 부분만을 떼어내 분리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새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옷을 새 옷처럼 ‘표백’하는 것이다.

“……그때 그 알몸의 변태 총각이 말해 준 그대로구먼.”

그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짧은 궁금증이 들기는 했지만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편귀연은 재빨리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목적지는 그레이 시티 뒤편에 있는 거대한 잿빛의 사화산, 샤를페로 대분화구였다.

*       *       *

“……그게 시작이었지.”

편귀연, 아니 ID 편잭은 회상을 끝마쳤다.

그녀는 게임이 출시된 이래, 그러니까 거의 7년 동안을 게임만 했으며 플레이 타임이 어느덧 3만 5천 시간에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 3만 시간 정도는 계속 이곳 샤를페로 대분화구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말이 3만 시간이지 자그마치 1,250일 동안 1분 1초도 쉬지 않고 플레이해야 얻을 수 있는 기록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이 출시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하루에 15시간 이상씩을 플레이해왔다는 뜻.

“장례 치를 돈으로 산 캡슐이니 이제 이게 내 관짝이여. 여기에 뼈를 묻을 것이구먼.”

편잭의 말에 김정은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씨 형제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고 촉촉하게 변해 있었다.

전장의 분위기가 어느덧 묘해졌다.

해골병들은 칼을 회수하지도, 휘두르지도 못한 채 머쓱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

한편.

“푸스스스스…….”

조디악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저 개 한 마리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네? 무슨 바보짓이야 그게?”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조디악을 향해 빽 소리치는 김정은이다.

하지만 조디악의 힐난에 대답하는 편잭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렇지. 바보 맞지.”

편잭은 옆의 화산재 둔덕에 칼을 꽂은 채 말했다.

“레벨이 10도 안 되었을 시절부터 이곳에 정착한 결과, 잿빛 산의 지형과 기후, 생태계는 모조리 꿰고 있으이. 현실에서는 치매 걸려서 방금 본 것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노인네가 게임에서는 이러고 앉아 있으니 바보 맞아.”

레벨도 낮고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거의 없던 뉴비 노인이 이곳에서 능숙한 생존전문가, 베테랑 고인물이 되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시련을 넘어왔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녀는 앞에 했던 말에 덧붙였다.

“그런 바보이기에 더더욱 이 자리를 비켜 줄 수가 없다네.”

그 말에 김정은과 방씨 형제가 또다시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조디악은 그런 매드독 일행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그 ‘잿빛용’을 만난 적은 있으시고?”

“……물론.”

편잭은 또다시 지난날을 회상했다.

무수히 많은 뱀과 도마뱀, 각종 파충류들과 골렘, 언데드 따위를 넘어.

오래 전 어느 날, 결국 편잭은 이곳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진(眞) 보스를 만났었다.

밤 12시.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열두 번의 괘종시계 소리와 함께 드리워지는 그림자.

그 회색의 기억이 편잭의 주름살 깊게 파인 고랑에 깊은 수심을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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