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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39화 (839/1,000)
  • 839화 샤를페로 대분화구 (4)

    ‘편잭’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노파.

    그녀는 지팡이를 분리시켜 그 안에 갈무리되어 있던 서슬 퍼런 파카윤(pakayun) 소드를 꺼내들었다.

    지팡이 모양 손잡이에 한쪽으로 굽은 칼날.

    조디악은 그 칼의 정체를 한 번에 눈치 챘다.

    -<등 굽은 살인귀의 칼> / 양손무기 / A+

    늙은이의 허리처럼 구부러져 있는 이 칼에는 기나긴 세월을 버티며 쌓여온 살의(殺意)가 몇 겹으로 단조되어 있다.

    -공격력 +4,400

    -특성 ‘혈액포식자’ 사용 가능 (특수)

    상대방을 베면 그 상처로부터 혈액을 훔쳐오는 요도(妖刀).

    더군다나 이 소름끼치는 칼을 뒷받침해 주는 무구들이 두 개나 더 있었다.

    -<뼈만 남은 포식자의 머릿가죽> / 투구 / A+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화산재 속에는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던 고대의 포식자들이 파묻혀 있다.

    이들 중에는 아직도 지면 위로 올라가 세상을 호령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존재들도 있을 것이다.

    -방어력 +4,444

    -체력 +20%

    -특성 ‘앙버팀’ 사용 가능 (특수)

    -<패륜아의 심장> / 갑옷 / A+

    바실리스크의 심장 가죽을 도려내어 잘 말린 것.

    세상 그 모든 것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방어력 +500

    -특성 ‘패륜아’ 사용 가능 (특수)

    아이템들의 이름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특성들만 놓고 보면 분명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메타이다.

    3신기. 바로 고인물이었다!

    조디악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이 할매…… 어디서 많이 본 아이템들을 가지고 다니는데? 템트리 한번 지랄맞군!”

    화석 해골병들이 갖가지 병기들을 든 채 달려든다.

    하지만 편잭은 이 많은 언데드 병사들을 상대로 하면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숨어 있거라.”

    그녀는 좀비가 된 강아지의 목줄을 화산재 안에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는 놀라운 솜씨로 칼을 휘둘러 눈앞의 해골병들을 하나하나 파괴해 나간다.

    …번쩍! …툭!

    칼빛이 한번 뿌려질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의 머리통이 하늘을 날아 잿더미 속에 파묻혔다.

    퍽! 우드득!

    어쩌다 해골병의 공격에 맞게 되면 앙버팀 특성으로 버텨내는 동시에 곧바로 반사 데미지를 뿌려 공격한 해골병의 몸뚱이를 가루로 바스라트려 버리는 편잭.

    그렇게 해서 떨어진 HP는 바로 다음 해골병의 머리통에 칼을 박아 넣음으로써 회복한다.

    [오-오오오오오!]

    하지만 조디악이 부리는 해골병들의 수는 너무나도 많다.

    심지어.

    …쿠르르르륵!

    세 번의 죽음을 거치며 잔뜩 악에 받친 조디악의 지옥불 마법에는 한 줌의 자비조차 없었다.

    편잭을 향해 몰아치는 검은 불길, 그리고 잿더미를 헤치고 악귀처럼 기어나오는 해골병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잭은 전혀 물러나지 않는다.

    “숨어 있거라.”

    편잭은 자꾸 기어 나오려는 좀비 강아지를 칼등으로 밀어내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쿠쿵!

    칼만 휘두른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을 구르자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얽혀 있던 앙상한 고목 가지들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나무 위에 쌓여 있던 수북한 잿더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

    조디악은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잿가루를 훑어냈다.

    하지만 이미 지옥불 위에 쏟아진 잿가루 때문에 불은 꺼져 버린 상태.

    거기에 수많은 해골병들 역시 시야가 흐려져 갈팡질팡한다.

    쩍! 쩌억! 뎅겅-

    그리고 그 사이를 누비는 편잭의 칼빛만이 매운 재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날뛰고 있었다.

    이윽고 열두서너 구의 해골병들이 추가로 무너져 내린다.

    다시 한번 시커먼 불기둥들이 날아가 편잭을 노렸지만.

    사아아아악- 퍼퍼펑!

    편잭은 노련하게도 뒤로 빠짐과 동시에 칼로 바닥을 한번 세게 그어 잿가루의 벽을 일으켰고 그것으로 불길을 막아 냈다.

    지형지물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 필드에서 적어도 수년은 살아왔을 법한 노련한 생존자.

    “으으으…… 이 빌어먹을 늙은이!”

    조디악은 이를 갈았다.

    변변치 않은 시골 늙은이라고 생각해 무시하다가 한 번 죽고 황당함과 호기심에 다시 찾아갔다가 한 번 더 죽고, 증오에 사로잡혀 또 찾아갔다가 또 죽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은 진중하게 생각하고 접근해야 할 강적이라는 것을.

    한편, 이 싸움을 지켜보는 김정은은 울화통이 터져 못 견디겠다는 듯 발을 팡팡 굴렀다.

    “으으, 진짜 어처구니없는데서 차질이 생기네! 대체 뭐야! 저 괴물 같은 노인네는!”

    “푸스스스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런 데서 낭비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해골병을 만들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드물게도 김정은과 조디악의 심경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편잭의 칼에 목이 떨어지거나 가루가 되어 버린 해골병들의 수가 세 자릿수에 육박해 갈 무렵.

    “그만! 그만! 이래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조디악의 중재 사인이 내려왔다.

    그제야 해골병들이 뒤로 물러난다.

    조디악은 바스라진 해골병들이 아까워 죽겠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편잭 노인을 바라본다.

    “……할망구. 알지?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할망구랑 그 뒤에 있는 싸구려 개새끼는 뒈진 목숨이었다는 거.”

    “…….”

    “알면 이만 물러나. 이례적으로 특별히 봐줄 테니까. 자리 넘기라고.”

    조디악이 제안을 했다. 이쯤에서 휴전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편잭은 고개를 저었다.

    “네놈 눈깔을 보니 제대로 미치광이구나. 우릴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리 없다.”

    “푸핫! 맞아. 사람 잘 봤네.”

    옆에 있던 김정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디악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달력과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 이런 데서 허비할 시간은 더더욱.

    “푸스스스- 진짜로 살려 줄 테니까 빨리 꺼져. 아니면 이대로 자연사 해 주는 것도 좋고.”

    “…….”

    편잭은 조디악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거리가 조금 먼가?”

    “뭐? 뭔 소리…….”

    조디악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하려는 찰나.

    핏-

    눈 깜짝할 사이에 뽑혀 나온 편잭의 칼이 조디악의 콧등을 가르고 지나간다.

    위기의 순간 방씨 형제가 튀어나와 완갑과 방패로 가드를 서 주지 않았더라면 조디악은 네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깝군. 역시 거리가 조금 멀었어.”

    짧은 소회(所懷). 편잭은 방씨 형제를 피해 뒤로 물러난 뒤 칼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할망구.”

    조디악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짜배기 광기가 그 안에서 지옥불보다도 더 뜨겁게 타오른다.

    그런 조디악을 김정은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워- 워- 진정해. 이런 데서 쓸 힘이 어딨어.”

    “…….”

    “위, 윌슨을 잡아야지! 저런 늙은이한테 해골병 낭비하면 안 돼. 응? 소모전을 피할 방법을 찾아보자.”

    말을 마친 김정은은 편잭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요 할머니.”

    “…….”

    “하- 알박기 할 계획이라면 성공했어요. 그래, 우리가 졌네요. 자리 살게요. 얼마면 돼요?”

    김정은은 상태창을 열고 금고와 공증서를 꺼내들었다.

    편잭 노인이 자리를 양보하고 길을 비켜 줄 경우 지급할 금액. 그것이 백지 상태로 허공에 떠올랐다.

    “어느 길드 거래소를 가든 현금으로 바꿔 줄 거예요. 원하는 금액을 말해 봐요.”

    김정은은 자리값이든 통행료든 달라는 대로 지불한 뒤 이 귀찮은 적을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돈이라면 돈 복사 버그로 인해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사냥터는 내 자리여. 나는 잿빛용을 잡아야 혀.”

    편잭의 태도는 완강했다.

    김정은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골드를 거래창에 기입해도 그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조디악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이봐 늙은이, 노망났어? 저 돈을 현실의 돈으로 환전하면 얼마인지 알아?”

    “나는 지금까지 이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푸스스스- 뭐 자리를 지키면 얼마나 지켰다고 그래?”

    빈정거리듯 묻는 조디악의 질문에 편잭은 순순히 대답했다.

    “3만 시간.”

    그 말을 듣는 순간 조디악의 표정이 굳었다.

    김정은과 방씨 형제 역시 입을 딱 벌렸다.

    3만 시간이면 1,250일. 3년 동안 1분 1초도 쉬지 않고 게임을 해야 기록할 수 있는 플레이 타임이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이 사냥터를 지켰다고?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살벌한 필드를?

    “……지형지물에 도가 틀 만하군.”

    조디악이 헛웃음을 지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가끔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이레귤러들.

    한 가지에만 어마무시한 수준의 집착을 보이는 특정 분야의 고인물들이.

    조디악은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뒤에 있던 방철우와 방철해가 앞으로 나서 편잭에게 물었다.

    “우 우어 우어?”

    “우어어, 우?”

    그러자 김정은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방씨 형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자식들 오크어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람 말을 못하네. 야! 빠져 있어!”

    방씨 형제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자 김정은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짐짓 생긋 웃으며 편잭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할머님~ 국적이 어디셔요?”

    “왜? 알면 현피 뜨러 오게?”

    “아휴~ 할머님도 참~ 호호호!”

    속으로 조금 뜨끔하는 김정은이었다.

    그녀는 이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할머님이 이 자리를 그렇게 지키려고 하시는 이유를 저희가 좀 알 수 있을까요?”

    “지럴, 지금까지 칼 들이밀어 놓고 갑자기 사근사근허게 구는 이유는 또 뭐당가?”

    “아유~ 궁금해서 그러죠! 보면 저희랑 할머님 목적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요. 잿빛용 잡기!”

    고정 S+급 몬스터,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지배자 잿빛용.

    그 말을 들은 편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김정은이 회유책을 위한 미소를 양 입가에 걸고 물었다.

    “이대로 끝장을 볼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소모적이잖아요? 그 점에는 동의하시죠 할머님도?”

    “…….”

    “잿빛용을 잡으려고 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서로 조율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파티라는 방법도 있잖아요?”

    그러자 편잭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파티가 뭐여?”

    그 말에 김정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나, 편잭 노인은 외골수에 한 필드에서만 오래 정착해 있어서 그런가 게임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른다.

    “할머님. 파티라는 건요. 혼자 힘으로 잡기 힘든 강한 몬스터를 잡기 위해 여러 명이서 동맹을 맺는 거예요. 괜찮으시면 레이드 목적을 서로 공유하고 파티를 맺…….”

    “안 해.”

    하지만 김정은의 시도는 바로 싹둑 잘려나갔다.

    편잭은 단호한 태도로 김정은의 파티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조디악이 건조한 웃음을 머금었다.

    “죽여 버려야 돼 그냥. 저 뒤에 있는 오염된 개새끼까지 싹 다 태워 죽여 주지. 아주 고통스럽게 한 땀 한 땀…….”

    “야! 넌 좀 조용히 해!”

    티격태격하는 조디악과 김정은.

    한편 조디악의 말을 들은 편잭의 표정이 또다시 무섭게 일그러진다.

    그것을 본 김정은은 뒤에 있는 좀비 강아지가 편잭에게 있어 꽤나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김정은은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띤 채 편잭에게 물었다.

    “뒤에 있는 좀비 강아지…… 감염되기 전에는 참 귀여웠겠네요. 저 강아지를 치료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

    편잭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것은 무언의 긍정처럼 보였다.

    김정은은 다시 한번 허리춤의 포션을 흔들었다.

    “이 포션 한 방울이면 그 강아지를 치료할 수 있어요. 아주 쉽게요.”

    “…….”

    “하지만 이 정도 사실은 할머님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시는 거겠죠? 그쵸?”

    그제야 조디악 역시도 눈에 이채를 띤다.

    편잭은 왜 좀비 강아지를 저토록 소중히 여기면서도 치료하지 않는 것일까?

    김정은은 편잭이 대답을 해 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간의 대치, 매운 재가 섞인 바람만이 불어오는 황무지 위에서 두 패가 서로를 마주 대한다.

    이윽고.

    편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내 강아지를 저장(save)하지 못했어.”

    바싹 타들어간 잿더미 속, 아직 꺼지지 않은 잔불 같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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