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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38화 (838/1,000)
  • 838화 샤를페로 대분화구 (3)

    질긴 가죽 밑의 두툼한 지방층 밑의 기름진 살코기 밑의 굵고 단단한 뼈.

    …쩍!

    이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반 토막 난다.

    쿵!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

    하지만 지면에 두껍도록 쌓여 풀썩이는 화산재들 때문에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회색 와이번의 거대한 머리통이 목에서부터 떨어져나간 채 대지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화산재 와이번> -등급: A+ / 특성: 어둠, 비행, 1:1, 뺑소니, 살금살금, 백전노장, 잔불, 매운바람, 화산쇄설류

    -서식지: 화산쇄설류 길, 제 1 용옥, 거인국

    -크기: 12m

    -드래곤은 레어를 짓고 주변을 미궁처럼 만들어 놓았다.

    드래곤의 보물을 탐내어 근처에 접근하는 자들은 하늘을 선회하는 이 습격자들의 방문을 피할 수 없다.

    용족의 일원으로 치기에는 덩치와 힘이 다소 부족하지만 그것을 만회할 정도로 훌륭한 날개와 비행 실력을 가지고 있어 용 군단 내에서는 인정받는 편.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같은 용 군단 내의 ‘바실리스크’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화산재 와이번은 공략 난이도가 높은 상위포식자로 이 근방에서는 거의 적수가 없는 몬스터이다.

    비행종은 실질 위험등급이 최소 반 등급 위로 책정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런 엘리트 비행종 마수조차 ‘ID: 편잭’ 노인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편잭은 지팡이처럼 생긴 칼 한 자루를 휘저어 허공을 통째로 갈라 버렸고 순식간에 화산재 와이번의 목을 베어 냈다.

    물론 와이번의 목 부근은 질긴 가죽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어 쉽지 않았지만 정확히 같은 곳을 몇 번이고 벤 끝에 결국 놈의 무거운 머리통이 외따로 바닥을 구르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르르륵……]

    목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와이번은 절단면에 뚫려 있는 목구멍으로 계속해서 기괴한 소리를 뱉어낸다.

    하지만 파충류 특유의 기괴할 정도로 질긴 생명력도 머리통이 잘려나간 이상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풀썩!

    목구멍에서 피와 위액을 게워내던 와이번은 한동안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날개를 접은 채 잿더미 위로 쓰러져 버렸다.

    피는 잿가루 위에 뿌려지자마자 순식간에 말라붙어 건조한 자국으로 남았다.

    편잭은 구부정한 허리를 습관처럼 툭툭 두드린다.

    “드디어 잡았구먼. 요 질긴 놈.”

    몇 개월간의 접전 끝에야 겨우 난 승부였다.

    편잭은 화산재 와이번의 커다란 머리통을 힘주어 밀었다.

    기기긱-

    와이번의 거대한 머리통이 비탈길을 굴러내려가 저 아래 화산재 구덩이에 파묻힌다.

    그곳에는 아직도 불씨가 살아 있는 잿구덩이가 있었다.

    지글지글지글……

    잔불에 익어 가는 와이번의 머리통.

    이윽고 편잭은 칼을 뻗어 재 속에 파묻힌 와이번의 볼살 한 토막을 끊어냈다.

    “후-”

    입김을 불자 재가 털어져 나간다.

    편잭은 칼로 고기 표면의 재 묻은 부분들을 도려냈다.

    그러자 이내 잘 익은 살점이 보인다.

    선홍빛 육질과 허연 비계 층, 아직도 기름이 배어나오고 있는 고기토막.

    편잭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이 고기토막을 가지고 돌아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으르르르르릉!]

    좀비 강아지 한 마리가 목줄에 묶인 채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재로 더러워진 흰 털, 눈에는 먼지가 앉아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다.

    원래의 작고 귀여웠던 얼굴은 핏줄과 주름 때문에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편잭은 좀비 강아지에게 고기토막을 던져 주었다.

    그러자 좀비 강아지는 게걸스럽게 이빨을 박아 넣는다.

    “욘석아…… 담부터는 배고프다고 목줄 끊구 도망가지 말어. 할미가 끼니 제때제때 챙겨 줄 터잉께.”

    편잭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좀비 강아지는 편잭이 던져 준 고기토막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는 HP가 천천히 차오르는 것을 본 편잭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위이잉-

    접속을 알리는 환한 빛기둥이 보인다.

    편잭은 주름진 눈매를 더욱 구겼다.

    세월이 할퀴고 간 흉터가 더욱 더 깊은 골을 만들고 있었다.

    “……또 온겨?”

    어지간해서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노인의 목소리에도 슬슬 짜증이 여문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시선을 맞받는 이는 바로 조디악! 앙신 조디악 번디베일이었다.

    “푸스스스…… 오우, 할매야말로 늘 그 자리에 있군 그래?”

    “그야 당연하지. 여긴 내 자리니께.”

    편잭의 눈이 스산하게 빛난다.

    지팡이로 위장된 칼날이 허리까지 뽑혀 나왔다.

    “또 뒤져야만 정신을 차릴랑가?”

    “오우 노! 벌써 세 번이나 죽었는걸. 이제 됐어 그만할래.”

    조디악은 그간 편잭에게 세 번이나 죽었다.

    이 근방의 온갖 지형지물을 죄다 알고 있는 그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푸스스스- 이곳 샤를페로 대분화구는 온통 화산재에 덮여 있는데다가 실시간으로 재들이 계속 쌓이기 때문에 지형지물을 모르면 등반 자체가 불가능하지. 그러니 이런 데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를 고인물 할매를 상대로 이길 수가 없는 건 당연하잖아?”

    조디악의 말에 그 뒤에 있는 김정은과 방씨 형제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장애물 편잭 노인. 심지어 그녀는 이곳 샤를페로 대분화구의 최종 보스인 잿빛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조디악은 기가 막히다는 듯 울었다.

    “나야 뭐 클로즈 베타 테스터니까 잿빛용의 서식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할매는 대체 그놈이 여기서 뜨는 줄 어떻게 아는 거요?”

    “노- 코멘트다, 이 양키놈아. 내 자리에서 썩 꺼져.”

    편잭 노인에게는 여전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사실 조디악 역시도 딱히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인벤토리에서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그것은.

    “쨘. 선물이 있어 할매.”

    바로 선물 회유책이었다.

    -<최고급 치료제> / 소모품 / A

    그 어떤 상태이상이든 간에 모두 회복시켜 주는 최고의 물약.

    맛도 달달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모든 상태이상 회복

    -체력 +5,000

    조디악은 편잭의 옆에 묶여서 발광하고 있는 좀비 강아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까 그 싸구려 펫 말야. 좀비가 된 것 같은데, 뭣에 물린지는 몰라도 아무튼 치료하고 싶지? 이걸 쓰면 한 방이야. 구하기 힘든 포션이라고.”

    사실 좀비 강아지 정도의 F급 펫이야 아무 싸구려 포션으로 치료해도 된다.

    하지만 조디악이 굳이 최고급 포션을 가져온 이유는 편잭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는 확실히 포션 구하기가 힘들지. 자,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지. 이걸 써서 원래의 펫으로 되돌리는 거야. 뭣하면 내가 뿌려 줄까?”

    조디악은 친절하게도 직접 포션을 들어 좀비 강아지에게 가져가기까지 했다.

    바로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편잭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바뀐다.

    지금까지 엿볼 수 없었던 진득한 살기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조디악은 의외의 반응에 약간 당황했다.

    “하, 할매. 그레이 시티 깡촌에서만 플레이해서 모르나 본데. 이거 되게 좋은 포션이야. 보스 몬스터를 테이밍해서 만든 펫도 아니고, 초보자 마을에서 분양받은 그런 싸구려 펫한테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싼 포션이라고! 특히 좀비 상태 같은 하급 상태이상 따위에는 더더욱! 어차피 할매 카르마 수치 높아서 신전에도 못 가고 포션도 못 샀던 거 아냐? 이 정도면 과분한 줄 알아야지!”

    조디악의 판단은 나름 합리적인 것이었다.

    편잭 노인은 엄청난 카르마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신전이나 상점에 들를 수 없어서 좀비 개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늙어서 그런가 아이템에도 박식하지 못해 치료제라는 것의 존재도 따로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 포션을 당장 안 치워블면…… 니 손모가지가 날아갈 거시여.”

    당연하게도, 편잭은 포션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기야 화산재 와이번을 참수할 정도의 고수라면 모르는 게 말이 안 되긴 하다.

    조디악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푸스스스…… 할매.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좀비 강아지를 그렇게 물고 빨고 하면서 왜 정작 치료는 안 하는 것이지? 변태 패티쉬인가? 네크로필리아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꺼져.”

    편잭 역시도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이등분해 잡아당기자 이내 긴 칼날이 드리워진다.

    조디악 역시도 작정하고 왔다.

    일부러 숨을 곳, 피할 곳, 절벽이나 크레바스 따위가 없는 황무지로 적이 진입하는 것을 기다렸던 것이니까.

    이내.

    우드득- 뿌드득- 와긱!

    바닥의 화산재를 헤치고 수없이 많은 해골병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맵고 뜨거운 재 속에 있으면서 한층 더 단단해지고 하얗게 변한 해골병들이었다.

    “오늘 할매 모가지 따서 그 좀비 강아지 먹이로 줘야겠슈.”

    “……가능할꼬?”

    편잭의 반문에 조디악은 미소로 화답했다.

    “할매. 여기 있는 해골병들이 몇인지나 알아?”

    조디악의 질문에 편잭은 말로 답하지 않았다.

    …철컥!

    보이지도 않는 발도(拔刀)와 납도(納刀).

    그러자 이내 전방에 있던 해골병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툭- 툭- 툭- 툭-

    잘 익은 열매처럼 떨어져 내리는 해골병들의 머리통.

    조디악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해골병 넷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간 것이다.

    휘이이잉-

    어찌나 빠른 칼부림인지 바람이 뒤늦게 불어와 매운 잿가루를 흩날린다.

    “0마리로군.”

    편잭의 대답이 그제야 돌아왔다.

    조디악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유혈목이처럼 돋아난다.

    “이 노인네가 진짜…….”

    입가의 미소를 지운 채 살벌한 마기를 뿜어내는 조디악.

    이윽고.

    뿌드드드득!

    화산재 밑에 파묻어 놓았던 다른 해골병들이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디악이 검은 마도서를 펼쳐 든다.

    그리고 해골병 군단을 이끌고 눈앞에 있는 편잭 노인을 향해 전진했다.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을 후딱 치워 버리고 고정 S+급 몬스터 잿빛용을 잡으러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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