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화 샤를페로 대분화구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며칠간의 휴가가 끝났다.
나는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고정 S+급 몬스터 레이드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그레이 시티, 과거 범죄자들의 도시였던 곳이다.
남대륙 깊은 곳. 거대한 사화산 ‘샤를페로(CharlesPerrault)’가 위치해 있는 고산지대에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보인다.
오래 전 폭발한 샤를페로 대화산이 뿜어낸 화산재가 온 땅을 뒤덮은 이래 쭉 칙칙한 회색을 유지하고 있는 그레이 시티.
현재 유다희가 시장으로 있는 이 도시는 예전에 비해 범죄율이 많이 줄어들었다.
살인자들의 탑이 반파된 이후 그곳에 살던 오래 묵은 리치가 죽는 바람에 범죄자들 역시 딱히 그레이 시티에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모두 떠나 버린 까닭이다.
범죄자들과 카르텔이 있던 시혼 시장이 탄핵된 이후 도시가 정상화되는 속도는 빨랐고 이제는 다른 도시에 비해 훨씬 더 평화로운 곳으로 탈바꿈했다.
‘쓰레기의 도시’, ‘머더러들의 천국’, ‘카르마의 땅’, ‘무법지대’ 등의 오명들은 이제 옛말인 것이다.
“으음, 그래도 재투성이 도시인 것만은 변함이 없군.”
나는 높은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앉은 채 도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낡고 허름한 건물들을 모두 재개발한 뒤 깔끔하게 바뀐 골목들.
하지만 하늘에서 눈처럼 펑펑 쏟아져 내리는 화산재들은 여전히 골목 곳곳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조금만 청소를 게을리 해도 천막 위나 지붕, 하수도에 소복이 내려앉는 재 때문에 주민들은 여긴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아닌 모양.
“기분이다. 도와드릴게요.”
나는 버뮤다의 창을 들어 그레이 시티의 고지대에 잠시 꽂아두었다.
그러자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더니 이내 언덕 위가 물바다가 되었다.
콸콸콸콸콸콸……
물은 아래로 내려가며 수북하게 쌓인 재들을 쓸어 내려간다.
나는 주민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으악! 뭐야! 어떤 놈이 큰길에 잿물을 쏟아놨어! 재가 물 위로 다 둥둥 뜨잖아!]
[세상에! 빨래에 검은 물이 들었다구! 대체 뭐야 이 빌어먹을 홍수는!]
[으악 잿덩이가 뭉쳐서 하수구를 막았다! 물이 이상한 데로 범람하고 있어!]
주민들은 마구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재가 물에 섞이지 않고 둥둥 뜨거나 뭉치거나 가라앉는 둥 오히려 도시 미관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 모양.
[어떤 놈이 남의 마당에 똥물을 뿌리고 앉아 있어!?]
[수로를 막은 잿가루 뭉텅이들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 내! 빌어먹을! 인력이 두 배로 들잖아!]
[꺄아아악! 내 집까지 잿물이 들어오잖아! 어떤 놈인지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아아아!]
나는 버뮤다의 창을 다시 슬쩍 뽑아들었다.
‘잡히면 죽는다.’
방금 한 빨래들을 망친 주부들의 분노는 피카레스크 마스크로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나는 잽싸게 현장을 벗어났다.
“어휴, 잿가루는 진짜 여러모로 처리하기 까다로워.”
소금이나 설탕 같은 가루라면야 물에 녹으니 상대하기 편하지만 잿가루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그레이 시티 곳곳에 풀썩이는 잿가루는 저 멀리 거대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로 눈을 맵게 하며 수분을 빨아들여 주변을 건조하게 만든다.
간혹 때를 빨아들여 세탁물을 하얗게 표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처음 등장했을 당시 바다맵의 난공불락 보스 몬스터로 통했었던 씨어데블조차 잿가루가 약점이었겠는가.
…팡!
나는 우산을 펼친 채 화산재의 함박눈을 맞으며 거리를 걸었다.
“예전보다 화산재가 더 많아졌네.”
그레이 시티의 시청으로 향하는 길.
나는 우연히 광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동상을 보게 되었다.
고인물.
나를 본따 만든 거대한 동상이 그레이 시티 중앙 광장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전시되어 있다.
동상은 전체적으로 새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사타구니 가운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뭔가 싶어 가까이 가 보니 사람들이 그 부분만 얼마나 만져댔는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낙서들이 가득했다.
-아들 낳게 해주세요
-저는 딸 낳게 해주세요
-성지순례왔습니다
-성기할례...아니 성지순례 왔습니다 저도
-님들아! 놀랍게도 이 동상은 파손 시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함!
-애인급구 010 99** ****
.
.
그러고 보니 그레이 시티에는 전임 시장의 동상을 파괴해도 기물파손죄를 묻지 않는 법이 있었지 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청으로 향했다.
* * *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대?”
시장실에 앉아 세금 관련 공무를 처리하고 있던 유다희는 나의 깜짝 방문에 꽤 놀란 기색이었다.
늘 갑옷에 도끼 들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뿔테안경에 흰 와이셔츠, 검은 정장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니 조금 낯설었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묻는다.
“왜, 오면 안 돼?”
“되지! 되는데! 갑자기 오니까 좀 놀라서. 뭐, 뭐라도 좀 내올까? 뭐 있나 여기?”
유다희는 황급히 찬장을 뒤지며 군것질거리를 찾았다.
평소 군것질을 잘 하지 않는지, 이윽고 그녀가 내온 것은 무색무취무맛의 슬라임 젤리였다.
[뿌!]
물론 쥬딜로페야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칠 뿐이다.
“군것질 끊어야지. 너 배 나온 것 좀 봐.”
[……호애앵.]
나는 시무룩해진 쥬딜로페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유다희 역시도 서류들을 내려놓고는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아니, 왜 앞에 안 앉고 옆으로……?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어떤 일로 온 거야? 츄츄 보러 왔어? 걔는 지금 살인자들의 탑 5층에서 신제품 젤리 연구를…….”
“츄츄는 이미 만나고 왔지. 오늘은 너 보러 온 거야.”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순간 안경 너머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더니 뭔가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이며 두 손을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무, 무, 무, 무슨……? 그게 무슨 말?”
“너 보러 왔다고.”
“이, 이거 완전 선수 아냐!?”
“…선수 맞지. 프로게이머잖아.”
조금 의외의 반응이라 약간 더 지켜보고 싶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별로 없는지라 용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이번 레이드 장소가 요 근처라서. 시장 권한으로 도서관 좀 개방해 줘.”
그러자 유다희의 표정이 약간의 실망으로 물들었다.
뭔가 자기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라는 듯한 기색.
“……뭐야, 갑자기 도서관은 왜?”
“그레이 시티 근방의 지형 지도가 도서관에 있거든. 근데 플레이어가 맘대로 열 수 없는 곳이라서.”
내 요청을 들은 유다희는 떨떠름한 표정과는 달리 꽤나 흔쾌히 손을 움직여 명령서를 작성해 주었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경비병 NPC들에게 보여 주면 문 열어 줄 거야.”
“고마워.”
내가 명령서를 품에 갈무리해 넣자 유다희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바짝 다가와 묻는다.
“야야야야야야, 너 이번에도 고정 S+급 몬스터 잡으러 가는 거지? 그때 레비아탄이나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그렇지.”
“대체 지금까지 몇 마리나 잡은 거야?”
유다희의 질문에 나는 지난날을 짧게 회상했다.
“악마는 거의 다 잡은 것 같고. 용도 그만치는 될 텐데…….”
일곱 악마성좌 중 내게 잡힌 존재는 다섯.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 색욕의 악마성좌 아스모데우스, 분노의 악마성좌 사탄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놓쳐 버린 사냥감으로는 나태의 악마성좌 벨페골이 있다.
즉, 칠죄종(七罪宗)의 상징 중 여섯을 직접 보고 다섯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편, 일곱 용군주 중 내게 잡힌 존재는 총 넷이다.
죽음룡 오즈, 창해룡 버뮤다, 무투룡 카프카타렉트, 심록용 브라키오.
그리고 용암룡 모르그마르는 한번 먼발치에서 보기만 봤을 뿐이다.
그리고 세외 3존(世外三尊)이라 불리는 벌 여왕과 개미 여왕 소돔과 고모라, 불사조.
이들까지 합치다면 나는 거의 대부분의 고정 S+급 몬스터들과 연이 닿아 있는 셈이다.
[흥!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주인님…… 아니, 인간!]
심지어 이 건방진 오즈를 펫으로 거느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뭐 어쨌든.
나는 유다희에게 이번 레이드 대상을 말해 주었다.
“이번에 노리고 있는 대상은 바로 잿빛용이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가뜩이나 큰 두 눈을 크게 떴다.
“잿빛용이라고? 그게 고정 S+급 몬스터야? 레비아탄이나 소돔과 고모라만큼 크고 강해?”
“글쎄, 용과 악마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겠지만…… 그것들이 동급 몬스터로 분류되는 이유가 있겠지?”
“그, 그런 게 여기 그레이 시티에 있단 말이야?”
유다희는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친숙한 도시 근처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고대괴수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대답했다.
“너 그레이 시티의 화산재가 괜히 이렇게 펑펑 내리는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유다희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오른다.
이곳이 ‘그레이’ 시티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잿빛용이라는 놈 때문에 여기에 이렇게 화산재 눈이 펑펑 내리는 거야?”
“그렇지.”
“그럼 그놈이 사라지면? 이 화산재들도 사라질까?”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자 유다희는 손뼉을 치며 나의 레이드를 반겼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뭐든지 지원할게! 아오! 그동안 이놈의 화산재들 때문에 농작물들 다 죽고 빨래들 엉망 되었던 거 생각하면! 청소 퀘스트로 플레이어들 끌어 모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시 예산의 반이 청소비로 나간다구!”
“지원은 도서관 개방으로 충분해. 레이드 이후에는 더 좋아질 거야. 아마도.”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들뜬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고인물 님께서 그레이 시티에서 레이드를 뛰어 주신다니 영광이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우리 시에 있는 고인물 동상 1호의 관광 가치도 높아지겠지?”
“……그러면 파손 시 죄도 좀 물어라.”
“어머? 딱히 파손된 부분은 없는 걸로 아는데?”
“없긴 뭐가 없어. 그 부분이 거의 닳아서 없어졌던데.”
“아아~ 그 부분? 그 부분은 처음부터 원래 그렇게 작은 상태 아니었나?”
“뭐? 원래 작은 게 어디 있어, 니가 봤어?”
“무, 무, 무슨 소리야! 제작 때부터 그랬다는 거지 누가 뭐랬다고……!?”
그때.
나와 유다희의 말싸움을 막는 이변이 일어났다.
…쿠르릉! 콰쾅!
창밖에서 들려오는 굉음, 시청 전체가 옅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드드드드드드……
묵직한 지진파가 그레이 시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뭔가 싶어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니.
퍼퍼퍼퍼펑!
그레이 시티 옆에 있는 샤를페로 대화산이 분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이내 뿌연 화산재들이 떨어져 내린다.
유다희가 입을 딱 벌렸다.
“샤를페로 화산은 사화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게 왜 갑자기…….”
“흐음.”
나는 턱을 쓸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 화산이 갑작스럽게 화산활동을 시작할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가 고정 S+급 몬스터를 잡고 있는 모양인데.”
이 시점에서 나보다 먼저 고정 S+급 몬스터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는 몇 없다.
축 쳐진 졸린 눈, 시커먼 다크서클, 뒤로 넘긴 올백 흑발.
샤를페로 대분화구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얼굴.
앙신(殃神) 조디악이 아마도 저곳에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내 눈이 음산한 빛을 내뿜는다.
“……어디, 이번에는 내가 한번 스틸을 해 볼까?”
늘 당해 왔으니 가끔은 되갚아 주기도 해야지.
나는 빚을 꼭 갚는 성격이니 말이다.
“푸스스스스-”
혼자서 미소 짓는 나를 유다희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와, 진짜 악당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