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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31화 (831/1,000)
  • 831화 사탄 (7)

    …파직! …파지직!

    눈앞에서 흔들리는 포탈.

    불안정한 기류가 죽음길 나락 4층 전체를 꽉 채운다.

    이윽고, 눈앞에 있던 포탈은 시뻘겋게 물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콰콰콰쾅! ……쿠르릉!

    죽음길 나락 전체가 옅게 뒤흔들린다.

    나는 불타 사라져 가는 포탈 앞에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내 옆에 윤솔이 같은 표정으로 쓰러져 있다.

    “…….”

    “…….”

    천천히, 불의 와류를 그리며 소멸해 가는 포탈.

    그렇게 거인국으로 가는 차원문은 영영 닫혀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띠링!

    귓가에 알림음이 빗발친다.

    <세계 최초로 ‘사탄’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 세상 모든 악마들이 당신의 업적을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용들이 당신의 업적을 경외시합니다>

    <거인국이 멸망했습니다>

    <‘거인’이라는 종족이 완전히 멸종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화재들이 일시에 소화됩니다>

    <불 속성 몬스터들의 공격력이 1랭크 하락합니다>

    <분노조절장애 특성을 보유한 몬스터들의 스킬이 사라집니다>

    <현 시간부로 월드맵에서 ‘거인국’은 진입불가지역으로 설정됩니다>

    .

    .

    고정 S+급 몬스터 사탄이 죽었다.

    거인의 왕 이스비브놉 역시도 사망했다.

    이로 인해 거인국의 멸망에 비로소 종지부가 찍혔으며 거인이라는 굵직한 종 하나가 완전히 멸종해 버렸다.

    한때 지배종의 위치에서 군림하며 영광과 번성을 누리던 거인족의 완연한 몰락이었다.

    ……그리고 한 종의 대서사가 완전히 완결 난 그 페이지 종장에 내가 서 있다.

    <이어진>

    LV: 99

    HP: 990/990

    호칭: 분노의 악마성좌 사탄의 위상(특전: 선악과)

    레벨 99.

    회귀 전이나 후나 이 경지에 도달한 이가 있었던가?

    아득한 필요 경험치량의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경험치의 오작교.

    나는 그것을 건너 결국 레벨 99의 영역에 닿고야 말았다.

    …땅그랑!

    소용돌이치며 사라진 포탈이 있던 곳에서 아이템이 떨어졌다.

    그것은 시뻘겋게 중첩된 다수의 칼날 손톱으로 무장되어 있는 중장갑 건틀릿이었다.

    -<사탄의 홍염와류 건틀릿> / 한손무기 / S+

    거인국을 멸망시켜 버렸던 ‘적대자’의 뜨거운 분노가 깃들어 있다.

    영겁에 걸쳐 타오르는 불의 소용돌이는 주변을 유황의 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물리 공격력 +15,000

    -불 속성 공격력 +7,000

    -특성 ‘불와류’ 사용 가능 (특수)

    호칭 보상으로 인한 특전 ‘선악과’ 특성, 그리고 데스웜 건틀릿의 까마득한 상위호환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탄의 건틀릿을 얻었다.

    한편.

    윤솔은 레벨이 86으로 폭등했다.

    그리고 아이템 보상으로 기묘한 주문서를 얻었다.

    -<식인황제의 뉘우침> / 주문서 / S

    보카사가 쓴 일기장의 한 페이지.

    한때 맑은 정신으로 종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집정관의 고뇌와 후회가 담겨 있다.

    -?

    그것은 어째서인지 사탄에게서 드랍된 주문서였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문서는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윤솔이 가지고 있던 하프와 결합하여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천사의 랩소디> / 양손무기 / A+

    멸족(滅族)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대천사의 유품.

    -공격력 +12

    -귀속 (특수)

    -융합 (특수)

    -특성 ‘힐’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신성불가침’ 사용 가능 (특수)

    대천사의 하프와 결합된 보카사의 주문서는 이윽고 새로운 아이템으로 융합된다.

    <……아이템 융합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세요>

    간만에 보는 메시지였다.

    뭐 아무튼.

    이렇게 해서 사탄 레이드가 최종 종료되었다.

    나도 윤솔도 레벨업을 했고 호칭 특전과 아이템 보상을 받았다.

    …….

    하지만 나도 그녀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한 명 부족하기 때문이다.

    “…….”

    “…….”

    나도 윤솔도 그저 가만히 땅만 바라보고 앉아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텅 빈 죽음길 나락에는 용암 기포가 터지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이봐들. 뭘 그리 죽상을 하고 앉았나?]

    짐짓 유쾌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윤솔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빨리들 나와. 레이드 끝났으니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티셔츠 한 장을 걸친 드레이크가 영상 통화 스크린 속에서 캔맥주를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       *       *

    집 앞 호프집.

    “어진. 비싼 안주 먹어도 되나?”

    드레이크가 맥주를 들이키며 묻는다.

    나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 앞으로 메뉴판을 디밀었다. 안주가 다 뭐냐, 술집도 사 줄 수 있다.

    맥주 1,000cc 한 잔을 원샷한 드레이크가 시원하다는 듯 씩 웃었다.

    “보상이 별 거 있나. 레이드 끝나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게 보상이지. 인생이 생각보다 별것 없다네.”

    “……걱정했어요.”

    내 대신 입을 열어 준 이는 윤솔이었다.

    그녀는 고마움과 섭섭함, 미안함과 걱정을 담아 드레이크에게 한마디 했고 나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죽으면 같이 죽는 거지.”

    “하하, 알겠다. 안 그래도 죽어 보니 알겠더군. 어우, 고렙이 되니 사망 패널티가 너무 커져서 말이야. 두 번은 못 죽겠다.”

    내 단호한 말을 듣는 드레이크는 어울리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며 맥주 한 잔을 더 집어들 뿐이다.

    윤솔이 물었다.

    “그래서. 드레이크 씨는 보상을 하나도 못 받은 거예요?”

    “음. 아니, 레벨이 1 오르긴 했다. 아몬 후작도 잡았으니까 말이야. 뭐, 죽어서 경험치가 많이 깎이긴 했지만 레벨이 다운되지는 않았어.”

    이걸로 윤솔과 드레이크의 레벨은 똑같은 86. 다만 드레이크에게만 호칭 보상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때, 드레이크가 문득 물었다.

    “그래, 다들 아이템은 좋은 걸 받은 것 같고. 호칭 보상은 뭘 받았나?”

    “나는 선악과 특성을 받았어.”

    이제 이 세계관에서 선악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내가 유일하다.

    잭 오 랜턴, 식인황제 보카사, 아몬 후작, 사탄이 모두 다 죽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선악과 특성이라…… 그게 어진에게만 주어졌단 말이지? 그럼 솔은 어떤 호칭을 받은 건가?”

    드레이크가 윤솔을 바라본다.

    그러자 윤솔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비밀!”

    ……?

    나와 드레이크가 몇 번 더 채근했지만 이상하게도 윤솔은 자기가 얻은 특성에 대해서만큼은 비밀을 지켰다.

    그녀가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편.

    우리는 이내 기부금 문제로 화제를 변경했다.

    “사탄을 잡음으로써 뎀 유니버스 사의 내년 기부금이 대폭 삭감될 예정이라지?”

    “그걸 우리가 메꿔 줄 수 있겠군.”

    “나도 지금까지 번 돈 보탤게! 꽤 많이 모았어 그래두!”

    나와 드레이크, 윤솔은 기부금 문제까지 논의함으로써 회의를 전부 끝냈다.

    이제 순수하게 뒤풀이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때.

    문득 TV에서 하는 시트콤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개그맨 두 명이 주고받는 콩트.

    한 명은 정장 입은 사람으로, 다른 한 명은 악마로 분장해서 주고받는 대화였다.

    [어어, 아 그렇게 하지 말고. 악플을 달라고 악플을! 내가 사람 복장 뒤집어 놓게 잘 달아. 봐봐~ 뭐라고 달 거냐면……작가가……븅신……쓰레기……개노잼……하차합니다……]

    [와! 인성 합격! 사탄 직 후임 찾았다! 앞으로는 네가 사탄 해라!]

    대충 보면 인간이 악마보다 더 사악한 현실, 그리고 악마들이 그런 인간을 보면서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이윽고 작중 사탄으로 분장한 개그맨은 핸드폰을 들어 울먹인다.

    [어… 엄마 나야…….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아냐~ 별일은 무슨…… 아무 일 없어~ 응응…… 아 한국 생활? 살 만해~ 다들 잘해 줘. 어디든 악마들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인간들 타락 잘 시키고 있으니 걱정 마요. 응응…… 엄마도 아픈 데 없이 잘 지내구. 응, 이만 끊을게~ 내일 또 사람들 꼬드겨야 해서.]

    [아들~ 인간계 생활 힘들지? 어딜 가든 원래 마계 밖 나가면 고생인 거야~ 밥은 챙겨먹고? 뉴스 보니까 인간계도 요즘 헬 지옥이라던데… 악마들도 공부 많이 해야겠더라…… 그래도 우리 아들이 가장 사악하다는 거 엄마는 믿는다! 알지? 끊어 아들~ 사랑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악마보다 무서운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을까?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더군다나.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다. 윤솔과 드레이크 같은 친구를 얻었으니 말이다.

    사탄이 일으킨 거대한 홍염을 홀로 막아서던 드레이크의 넓은 등이 아직도 생각난다.

    윤솔은 말했다.

    “그때 개미귀신이 검은 포션을 떨궜던 것은 어쩌면 사탄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는지도 몰라요. 이기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파티였다면 그 열쇠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쓰지 못했겠죠.”

    드레이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아참! 혼자 먼저 로그아웃해 있기 심심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다. 알고 보니 골리앗이 마지막 순간 외쳤던 말…… 그러니까 ‘Hic. sordidum diaboli! Quia adversarius vester sit a me!’라는 말의 뜻은 라틴어로 ‘더러운 악마들아, 네 상대는 나다’라더군.”

    드레이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윤솔도 입을 반쯤 벌려야만 했다.

    확실히 사탄과 그 휘하의 아몬 후작은 어지간한 심계로는 공략이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뱀. 이간질. 선악과.

    그것은 보카사나 이스비브놉, 오즈 같은 위대한 존재들도 무너지게 만들었다.

    새삼 돌이켜 생각하면 오싹한 일이다.

    ‘……문득 조디악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나는 얼마 전 런던 지하수로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디악. 윌슨. 그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어진. 실은 나도 아이템 하나를 보상으로 받았다.”

    심각한 표정의 드레이크가 내 앞으로 휴대용 캡슐을 내밀었다.

    나는 스크린에 떠 있는 아이템을 보자마자 헛바람을 집어삼켜야 했다.

    -<검은 씨앗> / 재료 / ?

    길(吉)과 불길(不吉)의 사이에서 자라난 열매의 정수.

    그 끝이 좋을지(Happy ending) 나쁠지(Bad ending)는 알 수 없다.

    -?

    그동안 많은 히든 피스들을 접해왔던 나조차 처치곤란이라 말할 정도의 아이템.

    꿀열매의 씨앗!

    천사와 거인을 비롯한 수많은 지배종들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존재였다.

    “아마 사탄에게 죽은 플레이어에게만 따로 주는 보상 같더군.”

    “……여러 루트의 보상이 있었네.”

    사탄이 무슨 의도로 이것을 드레이크에게 넘겨주었을까?

    분노? 복수? 더 큰 힘에 대한 갈망? 죽은 유저들로 하여금 대체 무엇을 유도하기 위해?

    파티에서 살아남아 보상을 받은 이들, 죽어서 보상을 받은 이들의 보상 아이템은 이토록 다르다.

    아마도 또 내분과 이간질, 반란과 쿠데타를 의도한 것이리라.

    하지만 드레이크는 지혜롭게도 이것을 나에게 넘겼고 패자의 보상이 승자에게 간 지금, 인과율은 크게 뒤틀릴 것이다.

    “일단 킵해두자. 길드 창고에 넣어둘까?”

    “아니. 길드 창고보다는 어진 네가 직접 보관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도 그 말에 동의.”

    드레이크와 윤솔의 주장의 의해 이 불안의 씨앗은 내가 맡기로 했다.

    그때쯤 해서 안주들이 나왔다.

    테이블 위로 과일들이 깔린다.

    나는 접시 중앙에 있는 빨간 사과 하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Help your self.

    의역은 ‘마음껏 드세요.’

    직역은 ‘네 스스로를 도우라.’

    나는 술잔을 잡은 채 친구들에게 말했다.

    “조금만 쉬다가 다음 레이드 준비해야겠어.”

    “너무 텀이 빠른걸? 나는 접속불가 시간 동안 휴가나 다녀올 생각이었다만.”

    “어진아, 뭐 하고 쉬려고?”

    얼마 되지 않을 쉬는 시간이겠지만 그동안 할 것은 꽤 많았다.

    유다희와 논의할 문제들도 많고 홍영화의 요청에 따라 예능 방송도 하나 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으로 잡을 고정 S+급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한다.

    ‘……아마도 다음 레이드는 또 혼자 떠나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끼며 손뼉을 한번 쳤다.

    “자,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럼 여기서 끝!”

    이걸로 사탄 에피소드 완전 종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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