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30화 (830/1,000)
  • 830화 사탄 (6)

    쿠르르르륵!

    소용돌이치는 먹구름 아래 높이 치솟는 불기둥.

    범람하는 불의 대홍수. 창궐하는 화마(火魔)!

    [그오-오오오오오!]

    사탄이 온 세상을 죄다 불살라버릴 기세로 추격해 온다.

    놈은 자신의 거체(巨體) 전체를 던지듯 돌진하고 있었는데 한 발 한 발 달려올 때마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 온몸에서 육편을 흩뿌려 놓는다.

    곳곳에 용암과 유황불, 거대한 불의 궤적들이 덩실거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사탄의 의도는 1레벨 뉴비가 봐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최대한 거리를 좁힌 뒤 자폭할 심산. 가능한 한 많은 범위를 멸망으로 몰고 갈 계획인 것 같았다.

    물론 그 대상은 바로 나다.

    ‘선악과(善惡果)’

    ↳물리공격력 혹은 빛, 어둠 속성 공격력이 10배 증가합니다.

    대상이 죽는 순간 호칭도 곧바로 사라집니다.

    ※이 호칭은 오로지 한 개체의 대상에게만 적용됩니다.

    오로지 한 명에게만 걸 수 있는 이 1:1 버프기술을 나에게 겨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편.

    ‘언제까지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는지 지켜보마.’

    아몬 후작의 비웃음이 귓가에 들려온다.

    놈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최후의 저주, 그것이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 그대로 속삭이듯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귀를 털어냈다.

    “어우, 정신계 저항력이 높아졌는데도 이렇게 잡소리가 들리네.”

    한편.

    중얼거리는 내 앞으로 드레이크가 화살을 들이밀고 있다.

    전에 보지 못했던 비장한 표정.

    이윽고, 꽉 조여져 있던 목 안에서 말라붙은 음성이 새어나온다.

    “……미안하다 어진.”

    동시에 파공성이 울렸고 화살이 내 몸으로 날아들었다.

    퍼억!

    나는 드레이크의 화살에 정통으로 맞아 버렸다.

    …쭈우욱!

    HP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이어진>

    LV: 98

    HP: 457/980

    순식간에 50%가량이 날아가 버리는 체력.

    윤솔이 깜짝 놀라 외쳤다.

    “드레이크 씨! 지금 뭘 하시는……!?”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드레이크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나 역시도 조금 놀라 있는 상태였다.

    ‘데미지가 왜 이렇게 약해?’

    드레이크는 강하다.

    화살 한 대로 거대한 뱀, 흉악한 악마들을 원샷원킬로 보내 왔던 역전의 궁수다.

    PVP를 할 때도 어지간한 상대는 화살 한 발, 혹은 두 발로 정리해 버리는 성격.

    그것이 설사 단단한 방어력과 높은 체력으로 무장하고 있는 탱커형 캐릭터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기에 드레이크의 화살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나는 한 방에 죽어야 정상이었다.

    레벨에 비해 워낙에 체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는 어떤가?

    완전 쌩 기본 체력에 불과한 나조차 한 방에 죽지 않고 반피가 남을 정도의 상태.

    이쯤 되면 ‘물이 반밖에 없네?’ 가 아니라 ‘세상에! 물이 반이나 남았잖아!?’라고 놀라야 정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렙 유저들보다도 최대 체력이 적은 내가 드레이크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답은 하나뿐이다.

    드레이크가 화살에 촉을 빼고 쐈기 때문!

    “오오, 과연! 역시 드레이크야!”

    나는 드레이크의 화살에 맞은 즉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쭈우우우우욱-

    윤솔을 안고 있는 내 몸이 뒤로 쫙 밀려난다.

    드레이크의 화살에 ‘넉-백(Knock-Back)’ 특성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뒤로 밀어내어 거리를 벌리는 궁수의 기본 스킬.

    드레이크는 지금 나에게 계속해서 화살을 쏴 넉백 특성을 걸어 주는 것이다.

    내가 원래의 이동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많은 거리를 움직이게끔 돕기 위해서 말이다!

    “어진아! 바로 힐 걸어 줄게!”

    마침 윤솔을 안고 있었기에 포션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체력을 채울 수 있었다.

    …펑! …펑! …펑! …펑!

    드레이크는 앞으로 뛰어가는 내 등에 계속해서 촉 없는 화살을 쏴 넉백 특성을 걸어 주었다.

    본디 CC(Crowd control:군중제어기술) 기술이란 상대방을 원하는 대로 조종하여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에 빠트리고 나아가 피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창발적 플레이에 속한다.

    나는 뒤에서 넉백을 걸어 주는 드레이크 덕분에 원래 이동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포탈로 갈 수 있었다.

    그러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윤솔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진아! 근데 이러면 드레이크 씨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드레이크도 생각이 있겠지.”

    드레이크 캣.

    그는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고인물이다.

    때때로 나보다 훨씬 더 기발한 공략이나 탈출법 등 원조 고인물스러운 아이디어를 보여 주는 든든한 파트너이니만큼.

    “분명 뭔가 계획이…….”

    순간, 나는 말을 미처 잇지 못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는 드레이크의 얼굴이 보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이랬던가.

    “미안하다.”

    드레이크는 나를 향해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함께 가지 못해서.”

    무언가 결심이 선 듯한 어조였다.

    …끼익!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허리 벨트에 미리 걸어두었던 킬 체인을 잡아 당겼다.

    “멍청한 소리 마! 다 같이 살 수 있어!”

    하지만.

    콰긱! 꾸구구국……

    놀랍게도, 드레이크는 내가 잡아당긴 철조망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끌려오지 않았다.

    ‘……뭐지?’

    나는 조금 당황했다.

    마몬의 힘으로도 드레이크를 끌어당길 수 없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

    드레이크는 기본적으로 몸무게가 가벼운 궁수 클래스, 행여나 만근추 특성을 썼다고 해도 늘어날 수 있는 몸무게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하지만 분명 드레이크는 나의 힘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멈춰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소용없다 어진. 이대로라면 다 같이 죽는다는 걸 너도 알지 않나.”

    “아니?! 그건 해 보지 않으면 모르……!”

    “안다. 약 7초 정도가 모자라. 고인물이라면 이 정도 타임어택 쯤은 계산해야지.”

    동시에, 드레이크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입을 반쯤 벌렸다.

    드레이크의 손에 들린 채 흔들리는 것.

    그것은 검게 빛나는 유리병 속의 액체였다.

    -<악의 뿌리> / 재료 / S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유리병.

    열게 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효과는 발동된다.

    -특성 ‘악의 뿌리’ 사용 가능 (특수)

    ※이 물약은 대상을 불문하고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합니다.

    지옥불구덩이 속 개미악귀를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

    자신과 상대방의 위치를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특수한 포션이었다.

    드레이크는 이 검은 포션을 자신과 사탄에게 쓴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나는 고개를 들어 사탄을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돌격해 오던 이 분노의 추격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면에 발이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캬아악!]

    땅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뿌리는 안 그래도 불안하게 휘청거리던 사탄의 발목을 휘감아 제자리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내가 메다라메다라와 싸워 봐서 잘 알지. 이것에 걸리면 나도, 저놈도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다. 물론 S급 몬스터 정도의 힘이기에 오래 버틸 수 없겠지만.”

    “……너, 너.”

    “가라. 7초 정도는 막을 수 있어.”

    동시에, 드레이크는 허벅지에서 시퍼런 날이 서 있는 단도를 뽑아들었다.

    -<‘오염된 긍지’의 단검> / 한손무기 / S

    -물리 공격력 +1

    -특성 ‘데드 엔드(Dead End)’ 사용 가능 (특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 주인의 몸을 찌르는 단도!

    동시에 드레이크의 몸에서 시커먼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뿌드드득!

    데스 나이트(Death Knight).

    궁귀(弓鬼)의 힘이 드레이크의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뒤덮는다.

    펑! 퍼펑! 콰콰콰쾅!

    드레이크가 저 앞의 사탄을 향해 포탄에 가까운 화살을 날려 보낸다.

    당연히 이번에는 화살촉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다.

    볼텍스, 검은 기류가 날아가 사탄의 몸을 때렸고 그 순간 포탄처럼 터져 주변의 불길을 찢어놓았다.

    [오-오오오오오오!]

    사탄은 정면을 향해 유황불을 토했지만 명중률이 나쁜지라 불기둥은 드레이크의 어깨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가!”

    드레이크는 돌아보지 않은 채 외쳤다.

    고정 S+급의 위험도를 한참 초과한 괴물 사탄. 그리고 곧 이 세계에 다가올 거대한 멸망.

    그리고 그런 멸망을 홀로 막아내는 드레이크.

    시뻘건 홍염이 이글거리는 가운에 검은 갑옷을 걸친 드레이크가 심지처럼 타오른다.

    그것을 본 나는 일순간이나마 데자뷰를 느꼈다.

    어디서 본 적 있다, 이런 풍경.

    지직- 지지직-

    머릿속에 심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 우뚝 솟은 멸망(滅亡).

    <멸망의 어머니 ‘오무아무아’> -등급: ? / 특성: ?

    -서식지: ?

    -크기: ?

    -?

    종말을 맞이한 세상.

    수없이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그리고 그 시체들의 산 앞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

    온통 불타고 붕괴해 내리는 대지 위에서 최후까지 서 있는 그의 뒷모습.

    50대로 보이는 이 중년인은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마지막 순간마저 자신의 몸을 심지처럼 불사르고 있다.

    타오르는 하늘, 길게 그어진 붉은 궤적,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몬스터, 그리고 최후의 플레이어.

    내 것이 아닌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다.

    동시에.

    쿠-구구구구……

    몬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늘의 붉은 궤적이 점점 더 짙어진다.

    별똥별이 그어 놓고 간 긴 자국은 길고도 선명하게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리고 귓가에 음각되는 알림음.

    .

    .

    …지끈!

    머리가 터질 듯 아프다.

    귓가에는 여전히 이기(利己)의 악마 아몬 후작의 비웃음이 메아리치고 있다.

    ‘Help your selfish’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디악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그때.

    “……어진아!”

    내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윤솔. 그녀가 찰나의 순간 정신을 잃은 나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순간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재빨리 고개를 들자 이 와중에도 검은 화살을 쏘아내 사탄의 코로나 방벽을 뚫고 데미지를 입히고 있는 드레이크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막 드레이크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죽음이 너를 영원케 하리라.]

    내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오즈. 이 작은 녀석이 무슨 힘이 있었는지 나와 윤솔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확 끌어당긴다.

    그 때문에 나는 허우적거리는 자세 그대로 등 뒤에 있던 포탈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막 입을 열어 드레이크를 부르려는 순간.

    …번쩍!

    망막이 익어 버릴 듯한 섬광과 함께.

    온 시야가 빛으로 뒤덮인다.

    “어디 있어! 어진아…!”

    [뽀에-!]

    [하하! 보이는가 인간!

    지옥도가 따로 없군그래!]

    “…드레이크!”

    그 강한 빛에 나는 한참 뒤에야 시야를 회복할 수 있었다.

    “…….”

    홍염(紅焰).

    한 세계에 강림한 멸망.

    그것이 내가 본 거인국 바산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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